당신의 물음표는 중요하지 않다
도시에서 생활하며 흙이 좋다고 말하는 것, 편리함이 넘쳐나는 곳에서 말하는 배부른 소리이거나, 새로움을 쫓는 사람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는 소리이거나. 도시든 지역이든 도시 생활자가 말하는 흙에는 늘 의심이 따라붙는다. 취향을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물음표가 생긴다.
많은 물음표를 뒤로하고 나는 취향을 밀고 나간다. 언젠가 흙과 가까운 생활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다. 작년 한 해 여러 지역에서 마주한 것이 좋은 자양분이 되어 막연히 생각만 하던 일을 한참 앞당겼다. 사회가 말하는 인구감소에 따른 소멸지역, 나는 사라져 가는 땅으로 이주했다.
어린이와 청년이 귀한 곳에서 나는 어딜 가나 반가운 대상이 된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잡고 지역을 만들어가는 청년은 또 다른 자신을 만나 반갑고, 땅을 지켜가는 어르신은 겹겹이 쌓인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 가져주는 이가 반갑다. 긴밀한 사이가 아닌 타인에게 보내는 인사가 귀한 곳에서 온 나는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사람을 고민하는 지역에서 웃음이 나올 만한 일보다 걱정이 앞서는 일이 더 많다. 도시가 유일한 삶의 방법이 되지 않도록 다양한 선택지를 발굴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는 오히려 도시보다 더 치열하게 사는 곳이라 말할 수 있겠다. 누가 누가 더 많이, 오래 일하는지 겨루는 것이 아니라 시골을 한적함으로 치부해 버리지 말자는 것이다. 비어지는 사람 몫까지 일하는 지역민은 실제 바쁘지 않은 날이 없다. 고민하고 움직이며 숨 돌릴 틈 없는 지역민들.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시골의 단 하나의 장면, 지역을 여유라고 생각하는 그 납작한 시선을 거두자.
희로애락 없이 삶을 논할 수 없다고 한다. 그중 노(怒)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지표였다. 이유 모를(사실 안다) 화가 쌓이는 곳에서 분출할 길 없이 삭히기를 오래, 주체할 수 없이 불어나는 화는 나의 얼굴이 됐다. 그 얼굴을 참을 수 없던 찰나, 작년에 만난 농부에게 들은 말이 있다. “자연과 가까워야 화가 없어요.”
사람, 편리성, 일자리가 넘쳐나는 곳이 되려 삭막하다 느꼈던 이유, 화로 만들어진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다. 내가 그가 되고 싶지 않고, 그들과 섞여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지역도 사람 모이는 곳에는 화가 나는 경우가 당연히 있다. 큰 숨으로 밀어낼 수 있을 만큼의 화. 오며 가며 익숙해진 이웃과의 인사, 계절을 눈치챌 수 있는 길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삶의 화를 대신한다. 내가 살아가고 싶다 생각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거면 됐다.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자연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
매일 임무가 주어지는 삶이다. 이곳에 잘 정착하기 위해 지역의 구석구석을 쫓아다닌다. 걱정이 불쑥 올라올 때도 있지만 내가 지역민을 알아간 만큼, 지도에 표시한 곳이 사라진 만큼, 그만큼씩 걱정을 줄여간다. 어디 성공뿐인 삶만 있겠는가. 실패를 염두에 두지만, 태도가 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여기서 나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