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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약속을 잡고 카페에서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다 커피 한 모금을 마셔보면 처음과 다르게 신맛이 도드라지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이는 식어가는 커피가 맛을 느끼게 하는 감각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맛 중 커피에서 표현되는 맛은 크게 세 가지다.
신맛, 단맛, 쓴맛.
커피가 나오고 마시는 순간부터 한잔을 비워낼 때까지 우리는 신맛의 변화를 가장 잘 느낄 수 있으며, 그렇다고 믿는다. 하지만 신맛은 온도에 따라 혀가 느끼는 감각의 변화는 없다. 분명하게도 신맛의 변화를 느꼈음에도 미각은 내 기준과 다르다. 이는 신맛을 느끼는 감각이 변했다기보다는 단맛이나, 쓴맛을 느끼는 감각이 달라졌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예를 들자면, 약하게 로스팅된 에티오피아 워시드 계열의 커피는 대부분 가벼우면서 화사한 느낌의 밝은 신맛과 향을 가지고 있다. 재스민이나 레몬, 자두, 살구 등 침샘이 고일만한 향들과 신맛, 단맛으로 이뤄진 커피를 아메리카노로 받아 들고 한적한 자리에 앉아 한입 들이키면, 그 온도가 약 85도 내외가 된다. 80도 이상의 고온은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고 화끈한 온도라 물 마시듯 한 입 들이킬 수 없다. 보통은 뜨거운 국물 마시듯 호로록 공기와 같이 식혀가며 들이킨다. 당연히 미각 세포들도 이 온도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제대로 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주로 밝은 신맛보다는 쌉싸름한 느낌의 신맛으로 느껴지는 첫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 뭔가 어색함을 만들기도 한다.
쓴맛은 신맛과 달라 온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쓴맛이 많지 않은 커피임에도 80도 이상의 뜨거운 액체는 내 입안을 불구덩이로 만들어 잠깐이나마 맛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떠한 연유 때문이지 이렇게 뜨거운 공간 안에선 쌉싸름한 쓴맛이 맴돈다. 뜨거운 액체가 식어갈수록 미각은 잃어버렸던 맛들을 다시 찾게 되고 쌉싸름했던 쓴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사라진다. 쓴맛이 사그라드니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커피 본연의 신맛을 이제서야 제 모습을 보여준다. 차가워지는 쓴맛은 계속 감소하다 사람 체온 언저리에서 다시 가파르게 상승한다. 신맛이 많은 커피가 아닌 중성적인 커피나 강하게 로스팅된 커피의 경우 ‘나는 이런 맛이야!’라고 외치듯 제대로 된 쓴맛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차디찬 커피를 찾는 무더운 여름날 아무렇지 않게 경험할 수 있다. 투명한 유리잔 안에 가득 차 있는 얼음을 품고 있는 커피는 약 5도 이하가 된다. 한겨울 공기와 같은 이 온도는 낯선 길을 거닐다 스친 상처도 느끼지 못할 만큼 내 감각들을 무디게 만든다. 입안이라고 다르지 않다. 차디찬 감각은 우리 내 모든 감각을 둔하게 만들지만,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신맛과 시원한 얼음물 안에서 커저가는 쓴맛을 제외한 나머지 맛들은 그 존재조차 느낄 수 없다. 신맛, 단맛, 쓴맛으로 이뤄진 커피에서 잃어버린 맛은 단 하나, 단맛이다. 이로인해 한여름의 차디찬 커피는 시거나 쓴 단조로운 맛들이 즐비하게 된다. 쌀쌀한 날, 길 가다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즐겼던 포근한 커피는 전혀 다른 계절을 지나면서 쌀쌀한 커피 한잔이 되어 서로 다른 커피로 인식되어 버리기도 한다.
시거나 쓴 커피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계절이 오면 차디찬 얼음에 잃어버린 단맛의 감각을 찾고자 하는 우리는 달디단 시럽을 넣거나, 애초부터 단 커피를 주문하곤 한다. 누가 나에게 신맛은 어느 정도, 단맛은 어느 정도, 쓴맛은 어느 정도가 좋은지 가르쳐 주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내 입맛에 필요한 맛을 알게 되고 모자란 만큼 채워간다. 단맛은 커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음식이나 음료, 과일 등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이는 레몬에이드가 레몬의 상큼한 과즙보다 단맛 강한 시럽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다른 누구보다 신맛 그 자체를 즐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상상만 해도 눈살이 지푸러지고 입안에 침이고인다. 더 단순하게 레몬과 오렌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단맛 좋은 오렌지를 선택한다. 레몬 그 자체를 즐기기엔 신맛이 너무 부담스럽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과일의 맛은 다르겠지만 신맛이 강한 과일보다 신맛과 단맛이 균형을 이룬 과일을 나는 더 선호한다. 중독성 강한 단짠단짠, 맵단맵단 이란 단어가 생겨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 땀 흘리며 공사판에서 일하던 시절, 현장에 있는 밥집에 들러 매일 밥을 먹었다. 간간이 바뀌는 찌개나 반찬들로 가득하지만 대부분 자극이 강한 짠맛이나 매운맛들이 누렇게 찌든 내 식판 위에 놓였다. 너무 짜다고 하면 나이 지긋한 밥집 아주머니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 ‘조금 짜야 밥을 많이 먹지!’라며 언제나 그 맛을 고수하셨다. 틀린 말도 아니다. 짭짤하고 매콤한 찌개 반 스푼에 듬뿍 뜬 흰 쌀밥 한 숟가락, 짭짤한 반찬 한 젓가락에 또 듬뿍 뜬 흰 쌀밥 한 숟가락, 나름 합리적인 조합이다. 먹다 보면 아주머니 말 그대로 밥 두 그릇은 금방이다. 그때까지 밥심으로 산다는 게 이밥을 말하는지 몰랐다. 매운 떡볶이나 불닭, 짬뽕과 같은 음식도 짜거나 매운 자극을 누그러뜨려 줄 단맛은 필수 불가결한 재료 중 하나다. 모든 맛의 균형을 맞추며 그 중심에서 다른 맛들을 조율한다. 중독성 강한 단짠단짠, 맵단맵단은 짠맛이나 매운맛도 아닌 바로 단맛이다. 짠맛이 강할수록 단맛도 강해야 균형 있는 맛을 즐길 수 있으며, 매운맛도 강한 단맛이 그 맛을 받쳐줘야 우리들의 입안을 즐겁게 해준다. 단맛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이점은 맛으로 표현되는 다섯 가지 맛 중 유일하게 그 하나만으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단물은 마실 수 있지만, 시거나 쓴 물 또는 짠물이나 감칠맛도는 물, 한 모금은 괜찮을지언정 두세 모금 들이키기에는 부담스럽다.
커피에서 표현되는 맛은 안타깝게도 세 가지가 전부다. 신맛, 단맛, 쓴맛. 앞서 설명한 중독성 강한 맛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커피도 단맛이 있어 충분히 중독될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커피에서 표현되는 단맛은 미미하다. 설탕이나 시럽 등을 첨가하는 다른 음료들과 달리 낱알 하나하나에 숨겨져 있는 단맛을 끌어내야 하기에 커피는 어렵다. 이 미미한 단맛을 어떻게 잔 안으로 담아내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담아낸다 하더라도 쓴맛과 동일하게 온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그 반응은 정반대다. 뜨거울 때보다 사람 체온에 가까워질수록 단맛은 강하게 느껴지며, 다시 급격하게 감소한다. 0도로 가는 순간 맛을 느끼는 감각들이 마비되어 단맛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전혀 단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무더운 여름날 냉장고 안의 물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온도, 약 5도에서 10도 사이에서는 미약하지만, 어느 정도 단맛을 느낄 수 있다. 평양냉면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다. 살얼음이 잔뜩 들어간 냉면은 그 온도 때문에 육수가 가지고 있는 향이나 맛 등을 느끼기 힘들다. 반면 평양냉면과 같이 양념장이 없는 냉면 국물은 시원하지만, 집 집마다 만들어낸 그들만의 고유 향이나 감칠맛 단맛들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린 아주 시원한 감각을 원하기에 얼음이 가득 넘쳐나는 커피 한잔을 받아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