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캉디드
그래도 우리는 밭을 갈아야 한다.
로마 신화에서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여인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다.
그의 사랑이 너무나도 간절하고 진심 어린 나머지 신은 그 조각상을 사람으로 만들어주게 되고
피그말리온은 그녀와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피그말리온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바라던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면, 영화 속 한 장면이 나의 현실이 된다면 그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긍정적인 사고와 기대가 좋은 영향을 미치는 효과를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부른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피그말리온이 있다면,
도서 '캉디드'에서는 온 세상을 절대 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팡글로스'와 '캉디드'다.
'캉디드'하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모든 것은 최선으로 되어 있다.(Tout est pour les mieux)'
위 대사는 이 소설의 주인공 캉디드의 스승인 팡글로스가 즐겨하던 말이다.
팡글로스는 이 책에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라는 긍정의 아이콘으로 대두된다.
그의 이름은 영어 'Panglossian'와 유사한데 이는 '한 없이 낙천적인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반면 캉디드는 프랑스어 'Candide'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는 '순진한, 천진난만한'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순진한 캉디드는 어린 시절부터 팡글로스의 가르침을 받아 세상 물정도 모르는 낙천주의자로 자라게 된다.
팡글로스에게 물이 절반 정도 담긴 컵은 '물이 절반씩이나 남은 컵'이며, 캉디드에게 물이 절반 정도 담긴 컵은 '물이 꽉찰정도로 많이 남은 컵'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앞서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자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 바로 현실이지만,
조금 더 먼 곳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사는 삶의 수레바퀴는 잘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아니면 부조리와 부정, 부패가 끊이지 않는 비관주의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할까?
삶의 정답은 아니겠지만, 볼테르의 대답은 아래 캉디드 안에 있다.
캉디드는 30년 전쟁의 평화조약이 맺어진 베스트팔렌의 어느 성 안에서 태어나 자라게 된다.
평범한 삶 속에서 팡글로스의 아래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그는 어느 날 남자의 퀴네공드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불운하게도 그 모습이 남자에게 발각되어 성에서 쫓겨나게 된다.
태어나 처음으로 성 밖의 세계에 발을 디딘 캉디드는 불가리아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게 되는데, 들판에 쌓여 있는 시체들을 발판 삼아 통통 점프하며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이후 캉디드는 팡글로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팡글로스는 불가리아 군대에 의해 참혹하게 강간당하고 살해된 퀴네공드와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는데 자기 자신조차도 매독에 걸린 거지가 신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캉디드에게 낙관주의에 대한 강연을 끊임없이 들려준다.
캉디드의 성병은 퀴네공드의 시녀 파케트에 의한 것이었다.
비록 한쪽 귀를 잃었지만 자크의 도움으로 매독을 이겨낸 팡글로스는 캉디드와 함께 리스본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그들에게 찾아온다.
자크는 바다에 빠져 죽게 되고 긍정의 힘을 전파한 팡글로스와 캉디드는 포르투갈에서 이단으로 몰려 온갖 고문과 교수형에 당할 위험에 쳐하게 된다.
그 이유는 종교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리스본은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는데, 나라 꼴이 엉망이 돼버리자 포르투갈을 다스리던 왕은 지진으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종교재판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종계는 팡글로스가 이단으로 몰아세우며 교수형을 선고하였고, 캉디드는 그의 제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채찍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형이 집행되기 전, 캉디드 일행을 탈출에 성공하게 되고 퀴네공드를 만나게 된다.
퀴네공드는 유태인과 종교재판관이 자신을 사창가로 팔아넘겼다고 눈물로 호소하게 되고 분노한 캉디드는 종교재판관을 찾아가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이후 캉디드는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엘도라도로 가기 위해 아메리카행 배를 타게 된다.
신대륙에서도 캉디드는 성 안에서는 꿈꾸지도 못했던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 여성을 구하기 위해 원숭이를 죽였으나, 구해준 여성은 원숭이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남자 친구였을 뿐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배를 타기 위하 모아놓았던 돈은 모조리 잃는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엘도라도에 도착한 캉디드.
다시 성 안에 들어온듯한 안정감이 느끼는 그지만, 이내 퀴네공드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유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시 만난 퀴네공드의 얼굴은 많이 상해있었지만, 오래전부터 그녀와의 사랑의 결실을 꿈꿔왔던 캉디드이기에 굳은 결심으로 그녀와의 결혼을 추진한다.
하지만 평민과는 결혼시킬 수 없다는 퀴네공드 오빠의 격렬한 반대로 결혼은 무산될 위기에 쳐한다.
결국 캉디드는 그녀의 오빠를 노예선에 태워 팔아버린다.
많은 길을 돌아왔지만, 가난과 현실의 압박 때문일까?
갈수록 흉측해지는 퀴네공드와 캉디드의 말타툼은 점점 더 잦아지고 서로의 사이는 멀어진다.
그토록 바라고 바라 왔던 그녀와의 결혼 생활이 쉽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캉디드는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노력을 통해 작물을 거두는 농부의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여정에서 만났던 팡글로스, 파게트, 지로 플레 형 등과 작은 농경지를 매입하여 농사를 시작하게 된다.
이 와중에 결국 살아남아 있음을 감사하는 팡글로스는 '모든 것은 최선으로 되어 있다.'라고 강연을 하지만,
'모든 것은 최선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많은 고난과 역경의 끝에 우리는 살아남았다.'라며 자신의 철학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온갖 비극적인 일들과 마주한 캉디드의 머릿속에는 낙천주의에 대한 의문부호가 생기게 되었고 책의 마지막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래도 우리는 밭을 갈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소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는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살자.'는 말보다는 '이런 식으로는 살지 말자.'라는 메시지를 던져 준다.
르네상스 시대가 저물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깨우치려는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주자 볼테르는
라이프니치의 낙관주의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팡글로스를 소설에 등장시켜 우회적으로 비판하였다.
당시 라이프니치는 근거율을 주장하였다.
사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과 사물은 신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교를 가지고 있으신 분들께는 죄송스러운 질문이지만..
모든 것이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태어나는지 묻고 싶다.
과연 얼굴이 튀어나온 코는 안경을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다리가 예쁘게 만들어진 이유는 양말을 신기 위해서일까?
화강암은? 성벽을 쌓기 위해 그 쓰임새를 세상에서 모두 정해놓은 것일까?
사람과 사물은 저마다 사용되기 위한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것일까?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본질이라는 것은 어떠한 목적이 주어진 사물을 말하는 것이며,
실존은 본질이 정해져 있지 않은 '자유롭게 스스로의 존재를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용하는 핸드폰은 '인간이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었는가?.' 혹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진다.
하나 인간 역시도 누군가에게 사용되고 목적이 정의된 기계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신이 존재해서 우리에게 운명을 부여했다면 긍정의 쳇바퀴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품이라면
인간도 본질이겠지만, 실제로 우리는 개인의 삶의 방식을 결정지을 수 있고 그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팡글로스처럼 '우리는 모든 것이 최선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라고 생각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모든 것이 최선인지는 끊임없이 의심해보아야 한다.
팡글로스처럼 매독에 걸리기 전에, 파케트처럼 교황의 딸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강간과 멸시를 당하기 전에, 퀴네공드처럼 더 흉측해지기 전에 보다 나은 최선의 선택이 있는지 결정할 수 있는 현명한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나는 모든 것은 최선으로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Tout n'est pas pour les mieux)'
최선의 방향으로 세상이 항해하고 있다고 말하기엔 선과 악의 싸움에서 악이 승리하는 추악한 경우가 꽤나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캉디드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험하였기에 모진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진정한 깨달음과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룬 그가 자신만의 정원을 소설의 막바지에서라도 가꾸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볼테르가 말하는 캉디드(우리)의 미래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소설의 내용처럼 밭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아름답게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답게 가꾸려는 의지와 실행력임을 소설의 마지막 대사와 함께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우리는 밭을 갈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