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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필 Jul 12. 2019

알베르 카뮈-이방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른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른다.'


대학교 3학년 문학시간에 배웠던 이방인의 첫 문장은 쉽게 잊히지가 않는다.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흰머리의 교수님께서는 첫 문장을 읽으며 '뫼르쏘(주인공)는 참 패륜적이죠?.'라는 농담을 하셨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여학생들 사이에 앉아 있던 나는 실소했다.

명확히 말하자면 나만 실소했다.


24살, 이방인을 접할 즈음 그때 나는 참으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살았다.

'이 놈의 학교는 입학할 때부터 참 다니기 싫었는데.. 여전하구먼..'이라고 혼잣말하며 한 숨을 푹 쉬고 등하굣길을 오갔다.


2학기 첫 수업,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는 프랑스어로 된 이방인의 일부 챕터를 번역해오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준비해 가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의 줄거리와 해석본을 가져간 두 번째 수업, 교수님은 내게 부조리가 무엇인지 물어보셨다.

'부조리가 뭘까요? 부조리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늘 답을 알고 있었으나 학생들에게 생각을 물어보는 교수님의 수업스타일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학생들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비웃음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셨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교수님의 모습은 마치 초등학생 때 보았던 건장한 선생님처럼 느껴졌다.

수업을 거듭해 나갈수록, 이방인을 알게 될수록 수업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책이 끝나가는 무렵, 나는 대학생활 3년 만에 늦었지만 프랑스어문학을 공부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카뮈와 이방인, 실존주의 철학을 접하며 나는 의심해보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태어나 처음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은 내게 가장 가치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은 첫 문장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인 뫼르쏘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와 함께 책은 시작된다.

뫼르쏘는 집에서 80km나 떨어진 회사에서 근무를 했던 탓에 노쇠한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고 혼자 살아갔다.

어느 날,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그에게 들려왔고 고향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뫼르쏘는 사장에게 이틀간 휴가를 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장은 탐탁지 않은 반응을 하였다.

그 날이 마침 토요일이었는데 사장 입장에서는 토~화요일까지 나흘 연속으로 쉬겠다는 속셈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어제 치른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여러 이웃들이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였지만 뫼르쏘는 슬퍼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이라는 것은 반드시 죽는 존재인데 왜 이리 슬퍼하는가?

장례식장에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것도 불필요하다고 느낀 뫼르쏘는 철차를 최소화했다.


우연히 바람 쐬러 떠났던 도시 근처 해변에서 옛 직장동료 마리를 만나게 된다.

물속에서 함께 수영을 하며 스킨십을 하게 되고, 뫼르쏘는 자연스레 욕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 둘은 방으로 들어와 한 침대에서 뒹굴게 된다.


다음 날, 뫼르쏘와 한 건물에 살았던 레몽이라는 친구가 함께 바닷가로 놀러 가자고 제안한다.

레몽은 여성들의 성매매를 알선하는 포주 짓을 하며 살았는데, 여성을 함부로 하고 폭력을 휘두르다 아랍인 패거리에게 뒤를 밟히게 되고 한 남성과 싸우다 칼에 팔과 입을 찔리게 된다.

그는 도망가는 아랍인에게 권총을 사용하려고 하지만, 뫼르쏘는 '총은 비겁한 무기야, 일단 진정해.'라고 말하며 레몽의 손에 쥐어졌던 권총을 뺐는다.


부상을 당한 레몽에게 휴식을 권한 뫼르쏘는 바람을 쐬러 해변으로 나간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그는 레몽에게 상처를 입힌 아랍인 중 한 명을 만난다.

뫼르쏘는 그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아랍인은 앙갚음할 것이라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고 칼을 쥔 채로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왔다.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내리쏟아 붓는 듯했다.

빛이 단도를 위에서 반사되자, 강한 불빛이 긴 칼날이 되어 이마를 찌르는 것 같았다.

뫼르쏘는 자신도 모르게 피스톨의 부드러운 배부분을 만졌고, 총알은 날아갔다.

그리고 굳어진 몸뚱이에 네 발의 총알을 더 박았다.

지옥에 네 번의 문을 두드린 셈이었다.


뫼르쏘는 체포되었고 변호사가 그를 만나러 왔다.

그는 자기소개를 한 뒤 어렵긴 하지만, 믿어만 준다면 재판에서 이길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엄마의 장례식 날 '주인공이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라는 사실을 조사원들이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매우 피곤해서 졸음이 왔었다고 대답하였지만 그는 '이건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며 슬픈 감정을 억제했다고 말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뫼르쏘는 '어머니를 사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날 감정을 억제했다고 답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니 그렇게 대답할 수 없다.'라고 말했고 변호사는 화가 난 얼굴로 나가버렸다.


얼마 뒤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는 뫼르쏘에게 왜 아랍인을 죽였는지, 처음에 한 방을 쏘고 몇 초 후 다시 네 방을 쏘았는지 물었다.

단도에 반사된 햇빛이 이마를 찌르는 듯했고 뜨거운 공기나 나를 감싸며 총을 쏘게 만들었지만, 이렇게 대답 한다한들 결국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과 일종의 귀찮음 때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판사는 서랍에 있던 십자가를 꺼내 휘두르며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으며 훈계했다.

어머니를 사랑하냐는 물음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그 날 이후의 심문에서도 비슷한 질문은 계속 이어졌고 11개월 동안의 예심을 치르고 나서는 판사에게 '이제 끝났소. 반 기독교 양반.'이라고 다정한 이야기를 들었다.


몇 달 뒤, 여러 건의 사건 중 내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라고 보이지 않아 재판정에서 판결을 서두를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재판이 시작되었고 익숙한 이름의 증인들이 주의를 끌었다.

양로원 원장, 레몽, 해변의 레스토랑에 있던 한 여성 등이 증인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재판장은 아랍인을 죽일 속셈으로 권총을 들고 다녔냐고 물었고 뫼르쏘는 아니라고 답했다.

아랍인을 왜 죽였는지, 우연인지 아니면 목적이 있었는지 하는 질문들이 오전 심문 내내 이어졌다.

오후에는 증인 심문이 이어졌다.

뫼르쏘는 마리의 표정을 보고 좋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고, 그 느낌은 적중했다.

양로원 원장은 뫼르쏘가 장례식 날 담담한 얼굴로 찾아와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했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같이 일하는 장의사의 일꾼은 그가 어머니의 나이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마리가 들어왔다.

재판장은 마리에게 뫼르쏘와 무슨 관계인지 물었고 그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언제부터 둘의 관계가 시작되었냐고 다시 물었다.

마리는 그 날짜는 말했고 검사는 그 날이 바로 어머니 장례식 다음 날이라고 지적했다.

검사의 강권에 못 이겨 마리는 그날 해수욕장을 갔던 일, 영화를 보러 간 일, 집에서 함께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러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곧 마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이후 있었던 나를 위한 변호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듯했다.

변호사만이 오직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인지, 살인을 해서 기소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소리칠 뿐이었다.

재판장은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라는 이상한 표현을 빌리며 사형선고를 선언했다.

그리고는 뫼르쏘에게 무엇이든지 덧붙여 말할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없습니다."


뫼르쏘는 한동안 상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이건 20년 후건 여전히, 죽게 될 사람은 본인임을 생각하며 살기 위해 떠오르는 상상들을 거둔다.

형무소에 들어와 뫼르쏘는 침상 위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았다.

밤과 흙과 소금 냄새가 땅 위에서 올라와 희한한 평화로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는 듯했다.

어머니가 왜 인생이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생을 다시 시작해보는 놀음을 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이 비극이 아닌 해방감으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밤하늘에 떠오른 많은 별들은 보며 그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뫼르쏘는 마음을 열었고 행복을 느꼈다.

그가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많은 구경꾼들이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이 와주어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이해주는 것뿐이었다.




알베르 카뮈.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해 누군가를 죽이고 자신도 죽음으로써 이야기가 끝났다.

작품 이방인은 카뮈가 쓴 책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찬사는 끊이지 않고 있는데 철학을 긴 글로 풀어써놓은 듯한 이 소설을 통해 카뮈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카뮈의 이방인을 명작으로 꼽을까?



'뫼르쏘는 죽어야만 마땅한가?'



이름도 모를 한 아랍인을 죽이며 뫼르쏘의 삶은 꼬여만 간다.

죄목은 '살인', 살인은 예나 지금이나 용서받지 못할 범죄다.

하지만 한 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그에게 사형선고라는 형벌은 과연 적합하다고 봐야 하는가?

아랍인은 친구인 레몽의 팔과 얼굴을 단도로 찌른 범죄자였기에 뫼르쏘는 그에게 경계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물론 범죄자에게 총을 쏘는 행위는 잘못되었지만 뫼르쏘가 권총을 갖게 된, 쏘게 된 이유에는 어느 정도의 우연성이 작용했다.

레몽이 살인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권총을 빼앗았을 뿐이며, 마침 홀로 나간 산책길에서 아랍인을 만났고 단도에 햇빛이 반사되어 아랍인이 덤벼드는지 도망가는지 가늠할 수 없을 상황에 직면했었기 때문이다.


과연 뫼르쏘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  해변에서 마리를 만나지 못했었다면?

아니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렸고 그녀의 생년월일을 어렴풋하게라도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그것도 아니라면 법정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그녀를 잊지 못한다고 대답했더라면,

하나님을 믿는 시늉이라고 했었다면 재판장과 배심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을까.


뫼르쏘는 범죄를 저질렀고 그래서 심판을 받는 자리에 왔는데,

왜 사람들은 그가 장례식장에서 슬퍼하지 않았고 다음 날 마리와 욕정을 나누었기에 마치

'뫼르쏘는 나쁜 사람이고 그래서 살인을 저질렀다.'라고 여긴 것인가?


풀어말하면 뫼르쏘가 체포된 것은 아랍인을 죽였기 때문인데, 

왜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슬퍼하지 않았고 다음 날 마리에게 정욕을 느꼈다는 사실들이 그의 죄목처럼 받아들여져 사형선고로 이어지게 만들었는가? 가 의문이라는 것이다.


카뮈의 관점으로 볼 때,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부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기로는 부조리란 '사물이나 사실을 직시할 때, 발견되는 우연한 사실성'을 말한다.

아랍인 살인사건을 다루는 재판이 사실에 대한 직시라면,

장례식 전후에 일어난 사실들은 기묘하게 연관된 듯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우연한 사실성'이다.

카뮈는 이 부조리한 세계에 대하여 좌절을 각오하고 인간적인 노력을 거듭하여 가치를 복원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 말하였다.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반항적인 인간'이 되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뫼르쏘처럼 말이다.


어떻게 보면 뫼르쏘는 이 소설에서 가장 진실된 사람이다.

소설 초입부, 파리 지사로 전근을 보내겠다는 사장의 권유에 출세욕을 느낄만한데 큰 야망을 갖고 있지 않은 탓에 요청을 거부한다.

정욕은 느꼈으나 누군가에게 집착하거나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리가 뫼르쏘에게 결혼하자고 어느 날 묻자 그는 '네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라고 답한다.

다른 여자가 같은 질문 해도 그렇게 답할 것이냐는 물음에도 '그렇다.'라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상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솔직한 진실함이 묻어난다. 

사람에 대한 선입견도 없다.

레몽의 직업은 포주인데 어느 날 그가 창녀를 때리다 경찰에게 잡힌다.

그는 자신의 변호를 위한 증인이 필요했는데, 모두가 그 자리에 서길 거부했으나 뫼르쏘는 유일하게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 진실을 고한다.

자신의 재판에서도 그랬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픔을 느꼈냐는 재판장에 물음에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대할 때처럼 같은 슬픔을 가졌다.'라고 답하였다.

아랍인을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죽었냐는 물음에는 전후 사정에 대한 변명 없이 '아닙니다.'라고만 대답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변호나 감정 호소는 일절 하지 않았으며, 늘 자신이 생각하는 바 이상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마도 뫼르쏘는 자신이 세계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고 느꼈는 것이다. 

카뮈의 철학대로라면 뫼르쏘는 합리주의라는 이름의 위증을 강요하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한 치의 거짓 없이 꿋꿋이 살아가는 반항적 인간이었다.



세 번의 죽음과 사건의 개연성


해변가에서 아랍인에게 총을 쏘는 뫼르쏘


뫼르쏘는 세 번의 죽음을 경험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해 아랍인을 죽이고 자기 자신도 사형선고를 받는다.

사회는 세 번의 죽음에 인과관계를 만들어 뫼르쏘에게 어떠한 반응을 강요한다.

변호인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슬퍼하지 않은 이유를 '피곤해서'가 아닌 '감정을 억제했다.'라고 반론하라고 요구했으나 예심판사와 사제는 재판장에서 그를 개종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뫼르쏘는 일체 거부한다.

세계의 가치보다 개인의 존재 가치가 더욱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 것이 바로 20세기 전반 합리주의나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프랑스와 독일에서 등장한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이다.



실존주의란 무엇일까?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이 있다.(장 폴 사르트르)


사물은 본디 사람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용된다.

대부분이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을 필요로 하는, 인터넷과 전화를 사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생산되며, 여러분이 앉고 있는 의자는 '올바른 자세로 사무업무 및 기타 다른 용무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도구'라는 목적을 가지고 제작되었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양파를 썰고 국자로 사용한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사물은 저마다의 목적에 의해 탄생된다.  

이것이 바로 본질(本質: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이다.


실존(實存)이란 구체적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뜻하며 본질(本質)과 상반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본질이 정해져 있지 않은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로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사물과는 다르다.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실존(實存) 이기 때문에 인간은 사물과는 다르며 본질에 선행한다고 볼 수 있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실존주의에 대한 견해는 조금 다르다.


카뮈는 '세계는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사회이며,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반항하는 인간)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예컨대 지구가 자전함으로써 태양이 동쪽에서 뜨거나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늙고 썩어가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부조리한 사회에 몸을 던지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를테면 '자! 한번 세계야 덤벼봐라. 내 뭐 하나 바꿀 수는 없지만 이 고난 받아들여주마. ' 하는 뉘앙스와 비슷하다.


반면 사르트르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 지어져 있다.'는 무신론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인간은 자신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으며 언젠가는 커다란 세계라는 사회도 바꾸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카뮈보다 조금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우리는 훗날 이러한 지향성을 'engagement'라고 부른다.




작품의 배경


알제리 민중 봉기 1958년


20세기 초반 알제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과거 사람들의 어떤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을까?

첫 번째는 현대사회의 가족의 의미가 조금씩 퇴색되어가는 현실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어제인지 오늘인지 모르는 삶 속에서 뫼르쏘는 살아왔다.

노인들은 장례식장에서 본 뫼르쏘의 냉정한 반응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마리와 레옹 등의 젊은 이들은 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장례식 때문에 휴가를 쓰게 된 뫼르쏘를 바라보는 사장의 차가운 시선을 통해 우리는 서로 무관심해지고 소외되어가는 인간 사회도 엿볼 수 있다.


간접적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카뮈의 메시지도 읽을 수 있다.

2부에서는 십자가를 휘두르며 개종을 청하는 예심판사와 사형을 당하기 전, 뫼르쏘에게 설교를 하는 사제가 등장한다.

종교를 믿으면 구원을 해준다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카뮈는 이전에도 지금도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버려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잃어가고 있는 서양 기독교의 현실을 보여준다. 


첫 재판이 열리기 전, 변호사는 '아주 중대한 사안이 아니기에 재판은 금방 끝날 것이다.'라고 뫼르쏘에게 말한다.

프랑스는 1830년 무력으로 알제리를 침공하였고 이후 알제리의 국토를 프랑스 하에 편입시켰다.

알제리는 계속 독립을 외쳤고 크고 작은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식민지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알제리 아랍인의 목숨의 가치는 프랑스인의 그것보다 적었을 것이다.

어쩌면 카뮈는 죽임을 당하는 인종을 아랍인으로 그려넣음으로써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를 간접적으로 제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뮈가 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배경은 그 역시도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태생에 집안 사정으로 대학을 중퇴한 그는 학계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은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가 명문대를 나온 프랑스인이 아닌 대학 중퇴의 알제리인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학계에서뿐만 아니라 정치계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독립을 원하는 알제리와 이를 막으려는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나 프랑스인과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입장에서도, 알제리 입장에서도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의견이었다.

결국 그는 양쪽 진영에서 수많은 비난과 지탄을 받게 된다.


카뮈는 1960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유작으로는 '최초의 인간'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세상을 떠날 당시 유품에 이 원고가 있었다고 한다.

미완성임에도 카뮈의 마지막 소설은 완성되지 못한 채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정식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이쯤 되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이해하는데 나의 글이 조그마한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파악하기 쉽지만 카뮈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사르트르가 이방인을 썼더라면 결론은 달라질 것이다.

부조리는 존재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의 개인의지와 노력으로 세상은 바꿔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아마도 사르트르의 소설에 등장한 뫼르쏘는 불합리한 현실에 이를 갈았겠지만 목소리를 높여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함과 현실의 부조리를 재판장에서 역설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세상은 바꿀 수 있다, '는 사르트르의 관점에 더 호감을 두며 살아왔지만,

그 사실을 믿는다기보다는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세상은 바꾸는 것이 아닌 반항함으로써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다면 한 번뿐인 나의 삶이 수동적이고 조금 덜 희망적으로 느껴질 것 같아서이다.


누군가가 개인에게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면,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데카르트 철학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사르트르의 철학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나는 선택하기 위해 살아간다.(B와 D사이의 C)"라고 답하겠지만,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난 뒤라면 "나는 부조리한 삶에 반항하기위해 살아간다."라고 답변해야 할 것이다.


이방인 속의 뫼르쏘가 살았던 세계는 부조리했지만 생각해보면 개인의 삶의 시작과 끝도 부조리하기에 

이 책을 읽은 나는 더욱 더 반항하고 선택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다.

나의 탄생은 내가 결정한 선택이 아니며 죽음 역시도 서른살 초반의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시기에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을 시작과 살아감, 죽음 3마디로 나눌 수 있다면 내가 반항하고 선택할 수 있는 시기는 실존하는 지금뿐이다.


프랑스 문학수업을 들은지 7년이 지난 오늘, 나는 다시 이방인을 꺼내보았다.  

이 책을 바르게 이해한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 날의 나는 예전보다 더 바르게 생각하고 반항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나 자신은 존재하고 있다고 그 때보다 조금 더 확신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나도 앞으로 더..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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