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터캣 Jun 25. 2022

#5 한 마디 말

북카페 피터캣, 8년의 기록

#5 한 마디 말


자영업이라고 하자. 처음 자영업을 시작했을 때 당연히 걱정되는 게 많았다. 처음 해보는 행정적인 업무나 다른 것들은 어차피 잘 모르니까 여기저기 물어가며 두 세번 발걸음 할 각오로 열심히 뛰면 되겠지만, 문제는 타고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지금껏 다른 종류의 사회 생활을 해오면서 나도 모르게 배여 있을 태도라던지, 친절과는 거리가 먼 타고난 성격 같은 것들은 노력한다고 해서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영업자의 태도가 법률로 정해진 것은 아니니까 그런 면도 일종의 개성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게를 선택하고 말고 하는 건 손님의 몫이라고 쿨 하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자신의 미천한 경험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은 한 인간의 부조리한 태도였다. 직설화법으로 표현하자면 커피 관련 일을 처음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초보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하나 둘 씩 손님들이 찾기 시작했다. 주로 동네 분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한 어머니나 근처 게스트 하우스의 젊은 사장 등 몇몇 분은 매일 마주치다 보니 금새 편하게 대화 하는 사이가 되었다. 동네 분들은 골목에 새로 생긴 북카페에 대해, 나 역시 그동네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 대해 서로 호기심이 많은 시기였다.


그분들은 고무장갑에 빨간색 말고 다른 색깔도 있다는 사실과 주변 커피숍들에 대한 자세한 세평 등 중요한 정보들을 알려주기도 했고, 가게가 예쁘고 커피가 맛있으니 봄이 오면 잘 될 거라는 응원과 격려도 빼놓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런 소소한 말들 덕분에 불안과 기대가 교차했던 시기를 무탈하게 보낼수 있었던 것 같다.


여느 때처럼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 받던 어느 날, 문득 손님이 꾸준히 늘고 있는데 주인이 너무 초보 같아 보여서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그 중 한 분이 했던 얘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과테말라에서 10년 동안 커피 농사 짓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보이니까 걱정 말라는 얘기였다. 심지어 외모만 보면 전설 속 커피 명인 같다는 둥, 실수 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더 인상을 쓰라고, 그러면 마치 손님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걸로 생각할거라는 등의 주옥 같은 말들이었다.


그렇게 생기긴 했다. 친구들에게 이끌려 억지로 당구장에 들어설 때면 당구장 내부가 한순간 정적에 잠기기도 했고, 학교에서 모르는 친구들과 농구 시합을 할 때는 상대방 친구들이 나만 막으면 되겠구나 판단했고, 10분쯤 지나 진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극복할 수 없는 점수차에 눈물을 삼켜야 했다. 참고로 나는 당구장에서 겜돌이를 하며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 같은 책들을 읽곤 했다.


아마도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르기 시작한 수염이 결정적이었던  같다. 장사 시작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온전히 적응하고 싶은 마음에 친구나 타인과의 술자리를 스스로 금지했는데, 당사자가 너무 억울해 하는  같아 수염 기르는  정도는 괜찮겠다 싶어 허락했더니, 타고난 인상에 수염이 더해지면서 효과가 배가 되었나보다.  그래도 평소 검객형 외모라는 말을 들어왔는데, 거기에 짙은 수염이 더해지니,  위에 앉아 사막  편을 말없이 바라보는 훈족의 두목 같은 결과가 나왔던  같다. 물론 주어진 인간조건을  활용하는 것도 전사의 덕목일테니.


한마디 말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다. 평소 실수가 적은 편이지만 대신 손이 느려서 걱정이었는데, 그조차도 대가의 신중한 손놀림으로 봐준다면 더는 걱정할 게 없다. 외모도 최적화 되어 있고, 게다가 이론이라면 커피 서적 십 여권을 외우다시피 하니까 질문에 막힐 일도 없을 것이다. 어떤 분야에 호기심이 생기던 일단 몇 권의 책으로 시작하는 습관은 쓸모가 있다.


손님의 농담 섞인 한마디의 말로 걱정을 떨쳐버린 지 8년이 지났다. 지금은 여러 명의 손님도 여유 있게 대하지만, 생각해보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도 많았다. 그때마다 차분하자고, 손님들은 기다려 줄 것이라 주문을 외우며 한 잔 한 잔에 집중했다. 다행히 별 사고 없이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데 이런 얘기들과 상관없이 지금도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8년 동안 진상 손님이 한 명도 없었던 진짜 이유는 뭘 까? 하는.






경의선 책거리 문학 카페/책방 피터캣의  8년을 기록합니다

업데이트는 비정기적입니다

.

경의선 책거리 문학 카페/책방 피터캣의 브런치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로21 2F 피터캣 (070-4106-3467, 12:00~20:00, 월요일 휴무)

인스타그램 : @petercat1212

유튜브 : 채널 피터캣



매거진의 이전글 #3 땡땡거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