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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캣 Jul 02. 2022

#6 전용 북카페

북카페 피터캣, 8년의 기록

#6 전용 북카페 


오픈 준비와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어수선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습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한편으론 앞으로 내게 주어질 무한정의 시간과 대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토록 기다려온 순간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계절이 깊어질수록 골목은 눈에 띄게 한산해져 갔다. 두툼한 옷으로 온몸을 감싼 채 바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에게 새로 문을 연 북카페는 더이상 호기심의 대상은 아닌 듯 했다. 어제는 열 잔의 커피를 팔았으니까 오늘은 스무 잔쯤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출근했다가 다섯 잔도 팔지 못하고 울고불고 할 때는 아닌 것 같았다. 아직은. 


그렇게 새로운 시간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궁리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쓸 것인가, 시간을.  


먼저 하고 싶지 않거나 하면 안되는 목록을 작성해보기로 했다. 일단 엎드려 자는 건 안될 것 같고, 어렵게 얻은 시간을 스마트폰에 낭비하지는 않기로. 게임도 안되고, 포털 기사를 읽고 또 읽고 하는 것도 금지. SNS도 한가지만. 심심하다는 핑계로 지인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당연히 금지.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당분간 금주. 금주? 


이쯤에서 금주는 조금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겠지만, 그때는 과거의 습관과 분명히 이별하는 의미에서 술 마시는 습관을 확 바꿀 필요도 있었기때문에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딱 365일 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는데, 효과는 더할 나위 없었다.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의 문제라기 보다는, 새로운 것을 얻고자 한다면 그 가치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내놓고 싶었고, 그때는 그것이 술이었다. 정확한 판단이었다. 술 얘기는 다시 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책은 얼마든지 읽어도 좋았다. 눈치 보며 점심 시간에 슬쩍 펼치는 것에서도, 아저씨가 왜 소설 같은 걸 읽느냐는 잔소리에서도 해방이었다. 그럼 아저씨는 뭘 읽어야 하니? 라고 되묻고 싶은 걸 참고 견뎌온 시간은 이제 지났다.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하니까 텅 빈 공간이 지금까지 와는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불빛은 환했고, 공들여 맞춘 자작나무 가구들 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책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방금 내린 커피 향기가 공간을 채웠다. 그 사이로 어디선가 쇼팽의 폴로네즈가 흘러나오는 이곳은, 맞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당분간 내 전용 북카페가 될 예정이었다. 



장사 하다 보니 깨닫게 된 것이지만 1년 중 맑고 신선한 날은 생각처럼 많지 않았다. 외출하기에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너무 습하거나, 혹은 미세먼지농도가 높거나, 비가 오거나 눈 때문에 교통이 막히는 불편한 날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게다가 북카페는 인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공간은 아니다 보니 이런저런 분위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가게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한가한 순간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오늘은 내전용 북카페’라고 생각하는 것은 늘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혼자만의 공간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사소한 역발상이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데 꽤 도움이 된다는 걸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하자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작은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책 몇 권을 연이어 보겠다는 계획이었는데, 그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마주치기에는 부담스러운 작가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 몇 권을 물리지 않고 볼수 있는 공간이라면 책과 함께 하는 공간의 자격을 갖춘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며칠에 걸쳐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리고 <악령> 이렇게 네 권을, 어디까지나 공간과 내 마음 상태에 대한 실험이니까 너무 과몰입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차분하게 읽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 넣은 라스콜니코프의 한심한 선택에 따른 결과와 이반 카라마조프의 길고 긴 독백 속에 담긴 진심, 그리고 그런 이반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스메르자코프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갇혀버린 스타브로긴의 존재론적 갈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죄와 벌>을 처음 접했던 중학생 시절 이후로 언젠가 이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느껴보고 싶다는 갈증이 사라지는 순간들이었다.  


누군가를 붙잡고 신나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만한 상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책에 빠져들 수 있는 공간이라면 머지않아 다른 누군가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나처럼 방금 읽은 문장의 전율을 애타게 나누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니까.




경의선 책거리 문학 카페/책방 피터캣의  8년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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