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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캣 Aug 31. 2024

01. 10년 뒤

삼단변신 피터캣

10년 뒤 


온갖 불가피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피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인 것 같다. 시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뿐만 아니라 가장 소중한 기억들도 조금씩 마모 시켜서 끝내 희미한 덩어리만 남겨놓는다. 지난 10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특별했던 순간들 모두 조용히 사라져갈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일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국 다 지난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만큼은 다른 선택을 해보기로 했다. 


북카페 피터캣은 2014년 12월 문을 열었고, 2024년 6월 닫았다.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책 세 권을 내리 읽은 첫 겨울이 지나고, 갑자기 몰려든 손님들 때문에 식은땀 흘리던 봄이 찾아왔다. 눈 앞에 커피 전문가의 길이 활짝 열린 듯 싶었지만, 정작 내가 선택한 길은 독서 모임이었다. 독서는 혼자 할 수 있지만 대화는 상대가 필요했고, 조심스럽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누군가를 볼 때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들을 닮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유학생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때까지 우리 대화는 '라떼 한 잔 주세요'를 벗어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매우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커피잔 하나를 살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유학 기간이 끝나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자신이 사는 마을은 미국에서도 시골이라 2층에서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먼지 날리는 거리 뿐이라서 창가에 커피잔 하나 놓여있으면 신촌 북카페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커피잔을 팔았는지 아니면 선물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손님과 포옹을 나눴고, 다른 사람들이 그저 타인이 아니라 각각의 사연이 담긴 한 권의 책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화장실이 깨끗하면 장사가 잘 될까? 카페를 드나들 때마다 가졌던 의문이었다. 화장실이 깨끗하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모든 것이 청결하다는 의미일 텐데, 그리고 그런 곳이라면 신선하지 않거나 검증되지 않은 재료를 사용하지도 않을 텐데, 그렇다면 당연히 손님들이 그것을 알아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피터캣을 시작할 때 화장실을 기준으로 삼아 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유일한 방법은 쉬지 않고 신경 쓰고 관리하는 것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굳이 자영업에 오랜 노하우가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화장실을 통한 손님들과의 비언어적 대화가 시작되었고, 손님들 또한 몰라보지 않았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70년대에 도쿄에서 운영했던 피터캣은 재즈바였다. 하루키는 어린 시절부터 내심 작가가 되기를 소망했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도저히 더 잘 쓸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스물 두 살에 재즈바 피터캣을 오픈한 후 음악을 듣고, 칵테일을 만들고, 위스키를 마시고, 하루에 세갑씩 담배를 피우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7년이 지났고, 그리고 작가가 되었다. 피터캣을 운영하는 7년 동안 하루키가 깨달은 것은, 중요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더 잘 쓰는 것이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와는 다르게 쓰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마치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완전히 다른 요리를 창조해내는 셰프들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것을 깨달은 하루키 역시 같은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르게 풀어내는 방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사연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재미있기도 해서 꼼꼼히 읽고, 한참이나 생각하다 보니 하루키가 창조했던 피터캣이라는 공간은 새삼 참 대단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되기를 포기했던 사람을 작가로 태어나게 해준 공간이 아닌가. 공간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심 원했던 바로 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줄  수 있다니! 중요한 수학공식 하나를 이해했으니 이제 문제를 풀어볼 차례였다. 내가 하게 될 가게 이름으로 피터캣이 아닌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루키가 운영했던 피터캣은 재즈바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는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재즈바 사장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해보면 언제나 취한 채로 귀가하는 장면들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른 대안이 필요했는데, 그렇게 고민을 계속하다 보니 기왕이면 1970년대 도쿄에 어울리는 피터캣이 아닌 21세기 서울을 위한 피터캣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아니라 낮에 열리고, 벽에는 책이 가득하고, 책장에는 커피향이 배어 있는 공간이면 될 것 같았다. 물론 하루키의 피터캣과 서울의 피터캣을 이어줄 교집합도 필요했는데, 그것은 벽에 하루키 사진을 잔뜩 걸어놓는 방식이 아니라 조금 더 간접적인 방식이면 좋을 것 같았다. 마치 공기처럼 보이지 않게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음악 같은? 


재즈에 관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는데, 문득 책 속에서 재즈 피아니스트인 듀크 엘링턴(입바른 말 하는 걸로 볼 때 아마도 듀크 엘링턴일 것이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사람들이 클래식 연주회에 갈 때는 정장을 입고, 숨소리까지 죽여가면서 집중하는데 반해, 재즈 클럽에 올 때는 음악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싸우고 하다가 연주자에게 술잔이나 집어 던진다는 것이었다. 클래식이나 재즈나 같은 음악인데 왜 클래식은 진지하게 감상 하고, 재즈는 옆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소음이나 차단해주는 주는 용도로만 생각하느냐는 불만이었다. 마치 재즈가 컨버세이션 뮤직(Conversation music)에 불과하다는 듯이. 잠깐만, 컨버세이션 뮤직? 공기처럼 공간을 채워서 각 테이블의 사적인 대화를 어느 정도 지켜주는 용도로 사용되는 음악이라는 뜻일 텐데,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멋진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작은 북카페가 있고, 내부에는 책을 펼친 사람들이 각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데, 그 한쪽 구석에서 빌 에반스나 키스 자렛이 조용히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아니면 에릭 크랩튼이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었다. 그 대단한 뮤지션들이 단지 책 읽는 사람들의 사적인 공간을 지켜주겠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컨버세이션 뮤직이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10년 동안의 피터캣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최초 땡땡거리에 있던 5년 동안인데, 그 시기의 피터캣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책 읽고, 커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하고 다시 일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 장소였고, 거기에 일주일에 몇 차례쯤 독서모임이 열리는 오프라인 공간이었다. 두번째 시기는 땡땡거리에서 동교동 삼거리로 옮겨온 이후인데, 마침 시작된 팬데믹 때문에 대안으로 온라인 피터캣을 모색했던 시기였다. 온오프라인이 공존했던 시기였는데, 생각해보면 팬데믹 때문에 잃은 것도 많지만, 대신 경계가 없는 공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덕분에 피터캣이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지막 세번째 시기, 이것은 아직 미지의 세계다. 오프라인은 사라지고 온라인만 남은 피터캣이 무엇을 해볼 수 있을지 방향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난 10년 동안 늘 '이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어떤 것을 새롭게 시도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왔고,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빠르던 늦던 해답은 늘 주어졌다. 그러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삼단 변신에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공통된 묘사가 딱 하나 등장한다. 그것은 알약만큼이나 작은 종이공에 관한 것인데, 그 종이공을 물그릇에 풀어 놓으면, 그때까지 공모양에 불과했던 종이 조각들이 물에 젖어 점차 펼쳐지면서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또 지금까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모습으로 변해간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어쩌면 정답은 지나온 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피터캣 10년 살기를 기록합니다

유튜브 : 채널 피터캣

인스타그램 : #피터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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