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단변신 피터캣
아마 유행 때문이었겠지만 어린 시절 거실에는 꽤 크고 텅 빈 서재가 있었다. 서재 앞에는 묵직한 소파도 있어서 동생과 총싸움 놀이를 하기는 좋았지만, 우리가 주로 시간을 보냈던 장소는 TV가 있는 안방이었다.
'서재가 비어 있다'라는 것을 언제 인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전화번호부나 어머니가 쓰시던 가계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퇴근길에 간혹 가져오는 정부홍보책자 같은 걸 텅 빈 책장에 진열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친구 집에서 문화충격을 받은 어느 날, 120권짜리 계몽사문고를 사달라고 어머니를 조르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악을 쓰면서 울기도 하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던 것 같다. 어린 아이가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깐 앉아 보시죠' 할 수는 없었을 테니 나름 합리적인 의사 소통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매우 우호적인 과정을 거쳐 마침내 커다란 박스들이 배달되었다. 책을 사면 냄새부터 맡아보는 습관은 그때 시작된 것 같은데,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것은 아마 접착제 냄새였겠지만 그때는 당연히 그 모든 것이 책 냄새라고 생각하면서 책 속에 코를 박곤 했다.
한가지 아쉬운 건 120권으로는 책장의 몇 칸 정도밖에 채울 수 없다는 점이었는데, 빈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허전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열 살도 안된 아이에게는 사실 백이라는 숫자 자체가 비현실적이라서 뭘 더 해볼 엄두 같은 건 나지도 않았다. 그냥 이렇게 꽂아 보기도 하고 저렇게 꽂아 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뿐.
계몽사문고에서 가장 좋아했던 책은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의 '홍당무'였다. 엄마가 형만 사랑한다고 믿는 소년의 이야기였는데, 마음 상한 일이 있으면 마당에 있는 토끼장에 들어가 앉아있는 장면이 몹시 감동적이어서 남 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외아들이 할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평생 계속된 고독 추구 성향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 같다.
커질 일은 커지게 마련. 그렇게 좋아했던 계몽사문고 또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고 내 호기심은 아동용 말고 어른들이 읽는 책을 향하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읽는 책 속에는 평소 자기들끼리만 수근거리는 진짜 어른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 기회가 찾아왔는데, 여름방학을 맞아 외가댁에 머물고 있을 무렵, 당시 대학과 고등학교에 다니던 외삼촌들이 각자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 순간이었다. 그렇게 어른들이 각자의 일상을 시작한 순간 나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집안을 조금 돌아다니다가 삼촌들의 방에 잠입하는데 성공했고, 이어서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난 책 '데미안'.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다.
당시 내가 '데미안'을 이해했을까? 그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내 대답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합니다'이다. 다만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에밀 싱클레어가 친구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그 거짓말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내게도 그런 순간들이 다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이라는 친구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단번에 문제를 해결한다거나, 이마에 표지가 있다거나 하는 것들은 부차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았고, 당시의 내게 중요했던 것은 누구에게나 그런 문제가 일어난다는 사실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피터팬처럼 평생 어린아이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떤 좋은 어른이 나타나 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면 좋겠지만, 훨씬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사실 어른들 자신도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 하지만 책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헤세를 읽었다. 조지 오웰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카뮈 같은 작가들의 소설도 조금씩 읽기 시작했지만 너무 어려운 얘기들을 만날 때마다 다시 헤세로 돌아가곤 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흔히 말하는 두 자아의 갈등이 시작되었는데, 조이스 식으로 표현하면 내 내부의 성스러운 자아와 속된 자아의 충돌이었다. 밝은 길을 추구하는 척 하면서 어둠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밤잠을 설치고 있었고, 그렇게 불결한 자신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시기였다. 그때 그 문제를 해결해준 책이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였는데, 주인공 하리 할러는 인간의 내부에는 두 개의 자아만 있는 게 아니라 수십, 수천개의 자아가 있으며, 그 어떤 길을 가는 것도 내 선택에 달려 있으니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구분에 얽매이지 말고 넓은 눈으로 내 안에 숨겨진 다른 자아들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고민은 사라졌고, 책이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하겠지만, 헤세를 읽다 보면 니체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면 될까? 그렇게 니체라는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슬쩍 살펴보는 니체는 도저히 고등학생이 읽을 수준이 아니었다. 다음이 있겠지.
그렇게 하나를 알면 두가지 질문이 생겨나는 시기가 지나가고, 학력고사를 보던 날, 모의 고사에서 수학 문제가 쉽게 출제되면 높은 점수를 받고, 어렵게 출제되면 낮은 점수를 받는 순수한 편에 속했던 나는, 학력고사 수학 문제가 어렵게 출제되었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시험이 끝난 후 책방에 들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샀다. 보나마나 부모님이 재수를 허락할 리 없고, 나 또한 당사자에 대한 신뢰라고는 없었으니 기왕 엎질러진 물, 책이나 읽자, 그런 심정이었다.
지금의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습관이다. 열 권의 책을 접하면 그 중에 다시 읽고 싶은 책 한 권이 있고, 그 한 권이 모여 열 권이 되면 그 중에 또 다시 읽고 싶은 책 한두 권이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이 발현된다'고 했는데, 좋은 책 한 권을 여러 번 읽고 깊게 이해하는 습관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책을 접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습관을 갖게 해 준 책이 바로 차라투스트라였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억울해서 한 번 더 읽고, 또 한 번 더 읽고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문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대학 졸업 전까지 다섯 번을 읽게 되었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차라투스트라의 문장들은 거의 기억이 난다. 취했을 때, 특히.
첫번째 학기가 시작될 무렵에 세운 목표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 그래서 학생증을 받자마자 대학생의 수준을 고려하면서도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가장 두툼해 보이는 책 두 권을 대출했는데, 허먼 멜빌의 '모비딕'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대학생이니까. 그렇게 잠을 아껴가며 두 작품을 완독하고 정해진 날짜에 정확히 반납했고, 다시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문해력이 좋아지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고3 시절에 비해 단지 한 살 더 먹었을 뿐. 그렇게 불가능의 영역을 포기하고 다시 가능성의 영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하지만 '모비딕'도 '악령'도 몹시 좋아하게 된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단지 무모한 도전에 불과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삶에서 중요한 날갯짓 하나가 시작된 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스타벅이나 스타브로긴 같은 이름들이 남았으니 말이다.
부대 도서관에는 2,500권 정도의 책이 있었다. 청소할 때 슬쩍 알게 된 사실인데, 여기저기에서 기증 받은 것이 대부분이라 크게 읽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사막 같은 군대 안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어디선가 여우의 목소리도 들려오는 듯 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그 안에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월 말 군번이라서 월 초에 제대하게 되는, 그런 특정 집단에게만 관심인 주제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1월 30일 군번이었던 나는 결과적으로 병장을 10개월이나 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입지도 않는 휴가용 군복을 매일 다림질하기도 하고, 또 주말이면 부대 앞산에서 자라는 어린 소나무를 뒷산으로 옮겨 심기도 해봤지만 시간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맛있던 PX 닭발도 막상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시큰둥하기만 했을 무렵 도서관의 책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일과를 마친 저녁이나 주말이면 행정반 빈 책상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시간도 죽일 겸 재미삼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곧 투쟁 비슷한 것이 되었고, 제대 전에 저 책들을 다 읽지 못하면 평생동안 재수가 없을 것 같은 이상한 강박에 사로잡혔다. 결과적으로 사는 동안 가장 많이 읽은 시기였지만 신기하게도 단 한 권의 책 내용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김홍신의 '인간시장'을 홀수권만 읽어서 그런 건지.
남들만큼 술을 마시진 못했지만 남들보다 많은 책을 읽었더니 그나마 써먹을 데가 있다는 평가를 받던 사회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때는 성공이라는 걸 꿈꾸기도 했다. 친구들보다 빨리 승진해서 거들먹거리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개츠비처럼 성공이라는 술에 마음껏 취해보고 싶었다. 성공에는 역시 책이 필요하겠지. 경제 경영 분야의 필독서들을 부지런히 읽고 다음에는 인물로 넘어갔다. 성공한 인물들에게는 자기만의 분명한 성공방정식이 있을 것이고, 내게는 그것을 이해할 문해력이 있으니 아마도 그들의 후계자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었다.
평전이라는 형식은 꽤나 흥미로웠는데, 어떤 역사적 인물의 삶을 극적으로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 자체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장점과 단점, 원칙과 아집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비스마르크와 덩샤오핑, 글렌 굴드, 나폴레옹, 호치민과 리콴유. 그렇게 평소 관심있던 인물들을 한 명씩 접하다 보니 영웅들의 천재성과 용기에 감탄하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한편으론 그들 또한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유배지 엘바섬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는데, '내가 한때 천재였던 것은 맞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천재의 시기는 곧 끝나버렸고,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평전은 결국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모든 인간에게는 반짝하는 시기가 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결국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인해 몰락한다는 것. 그리고 나도 역시 인간이라는 것.
30대 중반을 지나고 있을 때 청계천에 들렸다가 우연히 헌책방에서 '상실의 시대'를 발견했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에는 하루키 광풍이 불고 있었고, 좋아했던 선배의 권유로 영혼 없이 읽었던 그 책이었다. 그런데 진열대 위에 놓인 '상실의 시대'를 발견한 순간 문득 내 삶이 저 책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입생이었던 그 날 이후로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해왔으며, 앞으로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쩌면 아무런 계획도 없던 그 날이야 말로 인생 최고의 날이었고, 그 이후로 삶이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날 이후로 하루키가 발표한 모든 작품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내 주변에는 유난히 늙기 전에 남들 하는 것은 다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월드컵을 광화문 광장에서 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거라는 둥, 나중에 자식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거라는 둥, 지금 골프를 시작하지 않으면 인간관계에서 고립될 거라는 둥 하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다 맞는 말들이라 나도 한번 동참해 보기로 했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일부러 카메라를 들고 산에 오르기도 하고, 춘천 닭갈비는 역시 자전거를 타고 가서 먹어야 하는 것이니까 퇴근 후 부지런히 한강 하트코스를 달리기도 했다. 골프는 처음부터 별 흥미가 없어서 그랬는지 1년 남짓 하고 말았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은 모든 순간이 해방의 기쁨이었다. 하지만 자주 즐기기에는 가끔씩 찾아오는 고독감이 너무 컸다.
어울리는 옷과 입고 싶은 옷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어울리는 옷은 지겨우니까 누구나 탐나는 옷을 입고 싶어하고, 또 실제로 사보기도 하지만 결국 며칠이 지나면 늘 입어서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스타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싶다는 욕망, 그 자체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인간의 삶이 죽을 때까지 역동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새로움에 대한 욕망 덕분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울리는 것은 어울리는 것이다. 이런저런 분야를 맛보고 난 후,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독서야 말로 죽을 때까지 질리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설고 새로운 것들 또한 처음의 호기심이 사라지고 나면 길고 지루한 자기와의 싸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제 자기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회사에서 태블릿PC가 지급되었을 무렵, 처음에는 신나게 농장경영게임 같은 것도 하고 그랬는데, 어쩐 일인지 곧 흥미가 사라지고 갑자기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밀려왔다. 그렇게 저렴한 만년필 한자루를 구했고, 한동안 쓱싹쓱싹 하는 필기감에 빠져 지냈다. 회의실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소리 사이로 쓱쓱쓱쓱 하고 있으면 혼자서만 금지 되지 않은 금지된 장난을 즐기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종이에 남겨진 잉크블루 파란색을 보며 드디어 내 색깔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음은 만년필에 어울리는 수첩을 찾을 차례. 주로 분위기 좋은 카페 같은 곳에서 사용할 거니까 서랍에 다섯개쯤 남아있는 양지 다이어리 같은 건 생각해서도 안되고,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우선 손때가 묻어가는 과정을 감상하기 위해 필수적인 가죽 장정, 그리고 색깔은 갈색, 고동색 이런 칙칙한 것 말고 기왕이면 톤 다운 된 파스텔 컬러 같은 산뜻하면서도 지적인 느낌을 주는 것, 그리고 한 손에 착 감기는 컴팩트한 사이즈여야 했다. 활동적인 인상 또한 놓칠 수 없으니까.
토요일 연극은 3시에 시작된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서면 12시 대학로 도착. 연극 시작 전까지 3시간쯤 카페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책도 읽고 수첩에 뭔가를 끄적거리기도 하면서 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른 일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런 생각을 하며 어느 날 펼쳐 든 하루키의 '잡문집'에는 '그냥 아침부터 밤까지 재즈를 듣고 싶어서 피터캣을 시작했습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피터캣 10년 살기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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