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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캣 Oct 11. 2018

하루키 소설 속 술 이야기

5.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 – 조승원



 

흔히 말 하는 하루키 소설 3대 요소가 있다. 요리와 음악, 야한 장면이 그것이다. 그 세가지 요소는 때로는 글의 재미를 위해 또 때로는 이야기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소설을 이끌어간다. 주인공이 무를 갈아 무즙을 내거나 미역무침을 만들기 시작하면, 읽는 이는 또 뭔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기대감에 슬슬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호시노는 나카타 영감이 잠든 사이 우연히 들린 카페에서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를 들으며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장면이 너무 인상 깊어 한동안 ‘대공 트리오’를 계속 들었지만, 아쉽게도 내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튼 하루키 소설에서 음악의 역할을 처음 느낀 작품이었다. 그 뒤로 음악 이야기가 등장하면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가장 좋았던 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서 주인공 하지메가 좋아하는 듀크 엘링턴의 ‘Star Crossed Lovers’가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지금도 그 곡을 들을 때마다 시마모토와 하지메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가 떠올라 먹먹해지고는 한다. 마지막으로 야한 장면은, 그렇다. 각자 보면 되겠다.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술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었다. 1Q84를 보던 중이었는데, 업무를 마친 아오마메가 긴장을 풀기 위해 찾은 바에서 커티삭 하이볼을 주문하는 중년 남자를 만나는 장면이었다.


‘그러더니 남자는 문득 생각난 듯 커티삭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바텐더는 말했다. 나쁘지 않아,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게 시바스 리갈이나 까다로운 싱글 몰트가 아닌 점은 마음에 들었다. 바에서 필요 이상으로 술의 종류에 집착하는 인간은 대개의 경우 성적으로 덤덤하다는 게 아오마메의 개인적인 견해였다.’


이 문장을 본 순간 여러 명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들이 성적으로 덤덤했는지 어땠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곤혹스러운 기억이 있는데, 하루키처럼 직접 바를, 그것도 7년이나 운영했던 사람이라면 그런 경우를 얼마나 많이 겪었을까. 꽤나 통쾌한 한 방이었다.



그 뒤로 하루키 작품을 읽을 때 유심히 보는 요소가 하나 더 생겼다. 술이다. 쥐와 둘이서 25미터 풀장을 가득 채울 만큼의 맥주를 마셔대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위스키 온더록스잔을 가만히 흔들며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은 작품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낮부터 보드카 토닉을 다섯 잔이나 마셔대던 미도리의 답답한 마음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술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말한 사람은 MBC 조승원 기자였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아저씨라는 점 때문에 쉽게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조주기능사 자격증 보유에 MBC 창사 50주년 다큐멘터리 ‘술에 대하여’를 연출한 술에 관한 이 시대 참 지식인이었다. 그런 분이 쓰는 하루키 작품 속 술 이야기라면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저자에게 직접 사인본을 선물 받았다. 저자의 성의도 고맙지만 내게도 꼭 필요한 책이라 생각되어 꼭 천천히 정독해봐야겠다 생각했다. 1Q84에서 커티삭의 매력에 빠진 이후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간단한 칵테일 몇 가지를 만들어 팔며 손님들과 하루키와 술에 대한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인데,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 거리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책에는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거나 혹은 하루키 자신이 좋아하는 술이 맥주, 와인, 위스키, 칵테일 순서로 정리되어 있다. 그를 위해 장편, 단편, 에세이를 합쳐 무려 47권을 샅샅이 조사했다고 한다. 하루키 작품 전부를 데이터 베이스화 해서 특수한 알고리즘을 이용한 프로그램으로 정리했다 느껴질 만큼 완벽한 정보였다. 예를 들면, ‘댄스 댄스 댄스’에서 유미요시가 블러드 메리 마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그 블러드 메리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을 조사한 후, 블러드 메리라는 칵테일의 레시피와 성격, 그리고 탄생 배경까지 추적하는 식이다. 사실 고맙게도 출간 전 원고 검토를 요청 받고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진짜 기자구나, 했다. 하루키 책이라면 꽤 읽었다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런 나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글이었다.


이 책의 또 한가지 매력은 하루키의 관점뿐 아니라 술의 시각에서 읽어도 좋다는 것이다. 읽는 동안, 학창 시절 ‘부어라 마셔라’가 주도의 전부인 줄 알았던 나 같은 사람에게 뒤늦게나마 삶의 긴장을 풀고, 좋은 이들과 유쾌한 분위기를 즐기기 위한 술의 (아마도) 본래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 시간이기도 했다.


뒷부분에 깜짝 선물이 있었다. 가볼 만한 곳으로 피터캣을 자세하게 소개해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






신촌과 홍대사이 땡땡거리에서 북카페 피터캣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과 피터캣의 서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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