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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캣 Sep 14. 2018

노르웨이의 숲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노르웨이의 숲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문학을 테마로 유럽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해보자.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있는 러시아를 들린 다음, 체코에 가면 카프카를 만날 수 있다. 이탈리아는 단테와 움베르토 에코, 스페인에는 세르반테스가 있다. 그리스의 호메로스와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빼 놓을 수 없다. 헤르만 헤세와 토마스 만의 나라 독일을 찾으면, 아마도 슈바르츠 발트에 가장 깊게 새겨진 괴테의 이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나라 아일랜드를 거쳐 영국에 도착하면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여러 작가들을 지나 그 목적지는 세익스피어가 될 것이다. 


프랑스 일정은 꽤 길게 잡아야 할 것 같다. 카뮈와 사르트르만으로도 벅찬데, 플로베르와 발자크,  파스칼, 몽테뉴, 에밀 졸라, 미셸 투르니에, 아르튀르 랭보, 샤를 보들레르, 로맹 가리, 파트릭 모디아노, 파스칼 키냐르까지 셀 수 없을 만큼의 일정을 소화해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피곤한 여행이라도 책임감에 불타는 우리 가이드가 프랑스 여행의 마지막을 파리 근교의 콩브레 마을로 안내하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프랑스 문학 평론가인 르네 지라르는 그의 책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프루스트에 대해 한 마디로 결론 짓고 있다. ‘유일한 작가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71년 생이다. 1871년이지만 끝 두 자리만 생각하면 편한 경우가 많다. 버지니아 울프는 김지영씨처럼 82년 생이고, 카프카는 한 살 어린 83년 생이다. 백년 전은 삼사십대였던 그들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상상해보자, 내년 공쿠르 상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이고, 그 다음 해 프루스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예정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편 ‘스완네 집 쪽으로’부터 마지막 ‘되찾은 시간’까지 총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루스트는 이 방대한 작품을 서른 아홉에 시작해 10여년에 걸쳐 완성 했다. 열살 무렵부터 30여년간 한 사람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어느덧 30대 후반에 이른 마르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그가 성년이 되어서도 건강을 찾지 못하고 불면에 시달리던 밤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얼핏 잠 들기도 하지만 멀리서 들리는 기차 소리에 선잠마저 방해 받고 잠자리에 어울릴만한 상념들이 어지럽게 나타나고 또 사라지고 있다. 우연히 이 작품에 관심 갖은 독자들을 첫 장부터 좌절하게 하는 (악명 높은) 잠자리에서 뒤척거리는, 무려 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불면에 시달려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때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맥락 없이 뒤섞이는 상념이 훨씬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윽고 어린 시절 이모 할머니가 주시던 마들렌의 추억이 문득 떠오르며 열 살 무렵, 테이블과 키가 비슷했던 그 때로 돌아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한 인간의 삶의 완벽한 복원이다. 삼십대 후반의 작가는 마들렌 한 조각을 통해 열 살 무렵으로 돌아간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30여년 삶을 완벽하게 되살려 낸다.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그 때의 눈높이와 감정 등을 전부 다시 느끼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갈증이나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감정 등 마르셀이 자라면서 겪게 되는 경험은 그대로 우리 것이기도 하다. 이 방대한 작품을 읽는 것은 작가의 삶과 함께 내 삶도 돌아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제목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작가는 지나온 삶을 시간을 잃어버리는 과정으로 보았다. 겉보기 화려한 삶을 추구하는데 급급해 정작 자신만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르셀의 욕망은 파리 최고급 사교계였다. 프랑스 혁명이 끝난 지도 벌써 백여년이 지났지만 귀족들은 아직도 상징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최고급 사교계는 마르셀처럼 부르주와 계급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 우연히 사교계에 대한 환상을 품고 점차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마르셀의 노력과 성취, 그리고 가까이 가면 갈수록 경탄 보다는 환멸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최고급 사교계의 실체에 대한 실망과 이후 자기만의 삶을 되찾으려 하는 마르셀의 노력이 담겨 있다. 마지막 편 제목이 ‘되찾은 시간’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비 오는 저녁, 함부르크 공항에 비행기 한 대가 막 도착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30대 후반의 와타나베는 기내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며 스무 살로 돌아간다. 간단하다. 잠자리에서 뒤척거리지도 않고 길지도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스무 살로 돌아가는데 몇 페이지면 충분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또한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안내자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가 프루스트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그의 작품에는 심심치 않게 프루스트가 등장하곤 한다. 그래서 재미 삼아 하루키 작품 속 프루스트 찾기 놀이를 하곤 하는데, 내가 찾은 시작은 1980년 발표된 ‘1973년의 핀볼’이었고, 마지막은 ‘1Q84’였다. (1Q84를 본 사람이라면 아오마메가 은신할 때 다마루가 챙겨주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프루스트 작품을 모방 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역시 스콧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틀을 가져온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표한 후 인터뷰에서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은 그야말로 제 골격의 일부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을 나름대로 환골탈태할 수 있다는 건 무척 익사이팅한 일이죠. 거꾸로 말해, 재사용이라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작품의 구조와 장치의 이행, 전용이 가능하다는 것도 문학 명작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 같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클래식이라 부를 수 있는 거죠.’ 명작의 틀을 이용해 현재 또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 그것도 소설의 중요한 작법 중 하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건 존경하는 작가에 대한 일종의 ‘트리뷰트’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마르셀의 30년을 되살려 낸다면, ‘노르웨이의 숲’은 와타나베의 스무 살 1년을 복원한다.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으며 내가 살아온 시간을 거슬러 본다면, 하루키를 통해서는 ‘맞아 내 스무 살도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지’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1965년 발표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은 뭔가 짜릿한 일이 생길 것 같았지만 별 일 없이 끝나는 두 남녀의 하룻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하루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스무 살, 누구나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는 그 시기를 정면으로 돌아보면, 실은 가슴 아픈 일들과 그 사이를 비추는 잠깐의 행복이 어지럽게 뒤섞인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한숨 짓게 된다. 하지만 비틀즈의 노래는 이렇게 마무리 된다. ‘Isn’t it good?’ 그래도 좋지 않나요?


프루스트와 하루키를 단순 비교할 생각은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노르웨이의 숲’은 모두 각각의 성취와 개성이 완성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의 깊이나 세계 문학사에 끼친 영향을 기준으로 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위대함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쫓기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프루스트는 너무 벅찬 것도 사실이다. 아쉽지만 주로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가볍게 읽는 현실을 수긍한다면, 선택은 주저 없이 하루키다. 






https://youtu.be/VIEnXhqe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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