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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캣 Nov 07. 2018

노르웨이의 숲

11.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2017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30주년 기념판이 출간되었을 때 조금 놀랐다. 물론 좋아하는 작품이 30년 동안이나 사랑 받고 있다는 건 몹시 기쁜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의 소설 한 권이 불러 일으켰던 열풍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 작품이 사랑 받아온 30년은 열 일곱 이후 내 30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삶은 기쁨과 행복뿐 아니라 슬픔과 고통, 그리고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 별 일 없음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될 때가 있다. 빨강과 초록의 대비가 선명한 30주년 기념판을 바라보는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방황하거나 망설일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성장하며 살아왔다고 느끼는 건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는 계속해서 뭔가를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만큼 계속 잃으며 살아간다는, 평범하지만 그래도 똑바로 쳐다보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말이다.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하기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래도 이 문장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두 개의 문장이 문득 떠오르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작품을 펼치게 된다.


‘나는 고개를 들고 북해 상공을 덮은 검은 구름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거나 떠나간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


‘그러나 그 풍경 속에 사람 모습은 없다. 아무도 없다. 나오코도 없고 나도 없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나는 생각해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나 소중해 보인 것들이, 그녀와 그때의 나, 나의 세계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그래, 나는 지금 나오코의 얼굴조차 곧바로 떠올릴 수 없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아무도 없는 풍경뿐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1969년이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고,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무 살, 그의 분신 와타나베는 열 아홉이었다. 와타나베에게 1969년은 재즈 뮤지션 존 콜트레인이 세상을 떠나고, 더스틴 호프만의 영화 ‘졸업’이 개봉한 해로 기억된다. 


교토 출신의 와타나베는 도쿄에 있는 모 사립 대학에 합격해 도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문학부 학생이 되었지만 당시 학교가 시끄럽기도 했고 또 전공에 흥미가 크지도 않아서 학교 생활보다는 주로 책을 읽거나 레코드 숍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 탓에 10대 시절에도, 대학에 와서도 친구를 사귀는 데는 별 관심 없는 것 같다. 


그런 성향은 고등학교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더 깊어진 것 같다. 평범하게 자란 와타나베에게는 아마도 첫 번째 상실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가 전철에서 우연히 기즈키의 여자 친구였던 나오코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오코 역시 고향을 떠나 아무도 알아볼 사람이 없을 법한 도쿄의 조용한 대학에 다니는 중이다. 첫 만남에서 끊임없이 걷기만 하는 나오코를 보면 그녀 역시 과거에 잃어버린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미도리는 나오코와는 많이 다른 성격이다. 조용하고 차분한 나오코와는 달리 과감하고 적극적이다. 대낮부터 보드카 토닉을 다섯 잔씩 마셔대는 걸 보면 그녀의 짐 역시 무겁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견뎌내려 하는 것 같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다. 죽어버린 채 존재하는 기즈키나 시스템에 순응하는 돌격대, 그 시스템 위에 올라서 넘어가려는 나가사와, 그리고 상처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 채 살아가는 레이코가 등장하지만, 그래도 나오코와 미도리, 와타나베의 이야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스무 살 무렵의 주인공들이 각자 상실과 아픔을 받아들이는 방식, 흔들리고 힘들어하면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다. 


좋은 소설은 보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감상이 모두 다른 작품일 것이다. 심지어는 모두가 ‘이건 내 이야기잖아’ 하고 놀라게 만드는 작품이라면 말 할 것도 없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건 작가가 독자를 위한 공간을 비워놓았기 때문이다. 작가 마음대로 이야기를 끌고 가기보다 최대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하면, 작품 속에 독자가 들어갈 공간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 안에서 독자는 나오코와 정처 없이 걷기도 하고, 와타나베와 몇 주 동안이나 무전여행을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누게 된다. 네 스무 살은 어떤 모습이었냐고, 계속해서 물어오는 그들과 함께.


이 작품이 30년 넘게 사랑 받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읽다 보면 어느새 지금은 잊혀진 얼굴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누군지 분명히 알아볼 것 같은 그들의 모습은 각자 약간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에는 스무 살 무렵 내 얼굴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도 같다. 


이것이 아마도 내가 ‘노르웨이의 숲’을 좋아하고 하루키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인 것 같다. 작품마다 그는 매번 다른 거울을 하나씩 꺼내어 보여주는 것 같다. ‘이번에는 네 스무 살 무렵의 모습을 보여줄게’ 라거나 ‘네 안 깊은 곳, 오직 너만 머물 수 있는 기억의 도서관을 보여줄게’ 같은 식이다. 빈 공간이 넉넉한 만큼 읽을 때마다 느낌과 감상이 달라진다. 게다가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읽다 보니, 그 때마다의 기억들도 함께 녹아 있다. 


작품 제목이 왜 하필 ‘노르웨이의 숲’이냐는 질문에 대해 하루키는 그 어떤 것도 아닌 그저 노르웨이의 숲일 뿐이다, 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이제는 그가 그렇게 대답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모두가 경험했지만,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은 그 시간에 대해 ‘우리는 그걸 노르웨의 숲’이라 부르자, 작가가 먼저 제안했고 독자는 동의했다. 




홍대와 신촌사이 경의선 책거리 근처에서 북카페 피터캣을 운영중입니다. 피터캣은 문학, 인문을 좋아하는 분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북카페 운영기와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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