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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캣 Nov 14. 2018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무라카미 하루키

12.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 무라카미 하루키


위험한 모험에서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건 그다지 즐거운 소식이 아니었다. 카세트 플레이어에서는 레이 찰스의 Georgia On My Mind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두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다음 온더록스 잔에 든 얼음을 빙글빙글 돌리듯 머릿속에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았다.


‘결국 빙글빙글 돌아서 언제나 똑 같은 곳에 다다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회전목마를 타고 영원히 승부가 나지 않는 경주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누구도 추월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추월당하지 않으며, 똑 같은 곳밖에 도달하지 못한다.’


1985년 발표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흔히 쥐 3부작이라 불리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에 이은 하루키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친구인 쥐(네즈미)와의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이제 소설은 하드보일드한 현실 세계와 자신만의 고요한 무의식 세계인 세계의 끝을 탐구한다. 아직까지 하루키는 일본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신인작가 중 한 명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글을 계속 써야 했고, 게다가 문단과 언론의 관심도 부담스러웠던 시절이라 유난히 어렵게 쓴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 이후 해외로 떠날 결심을 한 그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을 오가며 다음 작품 ‘노르웨이의 숲’을 썼다.


가장 좋아하는 하루키 작품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잠시 망설이다가, 그래도 언제나 이 작품을 말하게 된다. 이유를 물으면, 아마도 인간조건에 관한 작품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대답한다. 큰 욕심 없이 조용히 살고 싶어도 운명은 그런 작은 소망조차 들어주지 않고 제멋대로 결정해 버린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결정되는 운명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인간은 그냥 유죄라는 인간조건은 이성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카프카의 ‘소송’이 떠오르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요제프 K와는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요제프 K보다는 조금 더 납득할만한 방식으로 운명을 마주한다. 세계의 끝에 머무는 방식을 통해.


주인공은 계산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정보 보안을 위한 암호화 작업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보안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다. 보호해야 할 정보를 인간의 무의식 속에 집어넣은 후 이리저리 뒤섞어서 보관하는 것이다. 꺼낼 때는 역방향으로 하면 되는데, 이를 위해 계산사의 두뇌에는 특별한 장치를 심게 된다. 작가의 설명은 훨씬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그렇게 말해도 될 것 같다. 마치 잘 만들어진 80년대 SF영화 스토리를 보는 것 같다. 그 때문에 주인공은 ‘세계의 끝’이라 불리는 자신만의 세계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하드보일드는 본래 바싹 익힌 달걀을 말할 때 쓰는 용어다. 글자 그대로 팔팔 끓였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가 헤밍웨이의 작품을 만나며 비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문학 장르로 자리잡았다. 어린 시절 하루키가 좋아했던 레이먼드 챈들러등이 이 장르를 대표하는 작가인데, 아마도 중절모를 쓴 사내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기관총을 난사하는 영화 한 토막을 생각하면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비정한 현실에 루이스 캐럴의 원더랜드가 더해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득한 비정한 세계, 이것이 하루키가 생각하는 현실이다. 


소설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모를 정도로 기묘한 엘리베이터는 마치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안내하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깊은 우물처럼 느껴진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이상하고 비정한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주인공은 세계의 끝에 입장한다. 이 곳은 높고 두터운 담으로 둘러싸인 폐쇄되고 또 고요한 곳이다. 스스로 힘이 세다고 소개하는 문지기의 말은 카프카의 ‘소송’에 일화로 등장하는 성벽의 문지기 말과 같다. 문지기에 의해 자신의 그림자와 이별한 주인공이 이 곳에서 할 일은 오래된 꿈을 읽는 것이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이 물리적으로 분리된 세계가 아닌 만큼 두 장소는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양쪽에서 종이클립과 도서관이 등장하고 도서관 사서와 깊은 교감을 맺는 식이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무의식 속에서 조용히 소화되고 있는 것만 같다. 한쪽에서 원인을 제공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카프카의 인간조건이 떠오르는 건 이런 구조 때문이다. 주인공은 소박한 미래를 꿈꾸며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나 잘못에 관계 없이 몹쓸 상황에 던져지고, 게다가 그 결과마저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된다. 마치 요제프 K처럼. 하지만 카프카가 요제프 K의 겉모습만을 묘사해 나머지를 독자의 상상에 맡긴 반면, 하루키는 그런 상황에 던져진 요제프 K의 무의식 속에서는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설명에 도전한다. 하루키 나름의 방식으로 요제프 K의 마지막 대사를 증명하는 것이다.


사실 ‘소송’에서의 카프카는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냉혹한 인간조건이라는 점은 납득이 가지만, 그래도 요제프 K가 너무 무기력하게 당한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상대가 맞서 싸울 수 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의 분신이 된 주인공에게 따뜻한 위로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Danny Boy를 들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비정한 세상이지만, 그만큼 작은 온기가 소중해지는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홍대와 신촌사이 경의선 책거리 근처에서 북카페 피터캣을 운영중입니다. 피터캣은 문학, 인문을 좋아하는 분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북카페 운영기와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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