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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크 Feb 12. 2024

오해와 이해  

시어머니 편 : 그녀와 나는 같은 세대의 사람이었다. 



그녀와 나는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시어머니는 1940년대생, 나는 1970년대생으로 우리는 같은 세대의 사람은 아니다. 시어머니는 한국 해방해에 태어나셨고 어릴 때 한국전쟁을 경험한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이 일군 이 땅에서 혜택을 받으며 자란 세대가 바로 70년 대생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 딴따라 노래라고 놀림을 받았던 댄스곡인 ‘난 알아요’가 우리 십 대를 반영하는 센세이션을 불러왔고 우리는 그렇게 x세대이자 신세대, 다가오는 밀레니엄시대에 당당히 맞서는 세기말세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전쟁당시에 태어난 어머니가 어찌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


사실 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엄청 많다. 어릴 때부터 자라온 환경이 남과 좀 유달리 다르게 느껴졌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고통 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보는가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가 남다르게 있었다. 


가난한 집의 실력이라고는 내 손재주 하나였고 어찌 어찌 과cc로 만난 시어머니의 귀한 황태자와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가장 빠른 결혼으로 내 삶의 안착역에 도착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했다.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연애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완전히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렸고 상당히 순종적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상을 모르는 겁 많은 산속 짐승이 아직은 발톱을 숨기고 세상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풋냥이었을 뿐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어머니의 첫말은 “너도 아들 낳아봐라, 아들 장가보내니 걱정이 엄청 많다. 

아들을 위해 내조를 해야 하고 여자가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나는 어머니의 아들과 같은 교육을 받으며 나이차이도 꽤 나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 말이 좀 시대에 안 맞아서 웃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르신들의 말씀이니까 참고 넘기면 그만이었다. 


명절이 되면 남편은 서둘러 어머니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퇴근을 하고 부랴 부랴 짐을 챙기는 나는 왜 서둘러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울 엄마가 힘드니까 빨리 며느리를 데리고 가려고 하지” 하는 대답이었다. 


웃고는 말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이 남편과 살면서 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같이 맞벌이를 하니까 신혼 때는 밥을 차려주고 나는 남편에게 설거지를 하기를 부탁했다.


남편은 황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설거지는 죽어도 하기 싫다고 했다. 그래서 설거지를 시킬 거면 영원히 밥을 차리지 말라고 했다. 

다섯 살이나 많은 남편이 하는 이야기가 상당히 코믹스러웠다. 신혼 초라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되었다. 

나는 알았다 하고 더 이상 설거지를 시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결혼하고 알았지만 누구보다 가부장적인 특혜와 권위를 내려놓지 않기 위해 안감힘을 쓰는 사람이 남편이었다.  본인의 의무와 역할은 외면한 채 오직 권력을 누리기 위해 순종적인 나를 한참 꼬시는 중이었고 

참으로 어리석게도 남편을 순종하며 믿고 따르는 것이 아내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점점 시집살이의 수위가 세질 즈음에 얼마 지나지 않아 

동서가 새로 시집오면서 나와 동서와 끊임없는 비교질이 시작되었다.

동서는 나와 동갑이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인사를 잘 안 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더라도 나를 외면하고 모른 체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일이 년을 서로 말을 안 했지만 시가식구들은 내가 성격이 고집스러워서 저런다고 흉을 보고 남편도 급기야

“넌 쌈닭이다, 너는 누구나와 싸우지 않고서는 못 배기지”하는 것이다.


사실 싸움을 싫어하는 내가 누구와 싸움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의 특기는 침묵이니까. 물론 동서와의 사이에 보이지 않은 신경전이 있다고 한들

당시에 동서나 나나 어렸고 그걸 중재해 줄 어른들이 없었고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서로 말을 안 하나 솔직히 내가 더 궁금해 지경이었다. 


물론 형님인 내가 동서에게 말을 붙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당시에 동서가 공무원 며느리로 들어왔다고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 었고

우리 집은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에 가정교육도 못 받은 집이라고 실제로 시아버지께서 말씀하셨으니 당시  내 처지는 그들에게 부끄러운 존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단코 내 집안은 내가 부끄러워한 적은 없다. 시가의 평가로 내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란 소리를 들어봤어도 결코 남의 집을 이러쿵저러쿵 판단한 적은 없다. )



또 큰 시누 남편이 의사인데 약국 하는 여자를 내 남편의 아내로 소개를 시켰어야 했는데 나 때문에 이 계획도 망쳤다고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나누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몇 년간 지독한 암흑기를 걸어왔다. 

시어머니는 동서가 임신했다고 명절에 오지 말라고 쉬라 하고

내가 아이를 낳고 한 달 만에 지방에서 서울로 명절 쇠로 온다고 쳐들어오신 분들이시다. 시누이들은 밉쌀스럽게도 며느리인 내가 꾀를 부리다가 된통 당했다는 우스개를 하니 어찌 헛웃음만 나오겠는가. 


나는 상당히 아리송했다. 무엇 때문에 어머니는 나를 집착하시는가?

손위시누들도, 동서도 다 편의를 봐주면서 나는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신가?



더구나 시어머니가 한참 나를 미워할 때 또 한 가지 걸고넘어지는 게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표준키에 표준몸무게 표준형 표준인간인데 우리 집 오빠와 아빠가 거구이기 때문에 시가에서는 언젠가 우리 아버지, 오빠는 당뇨와 성인병으로 빨리 죽을 것이고  너도 곧 저렇게 살찌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솔직히 속으로 많이 웃었다. 아직 나는 여전히 세상을 몰랐나 보다. 울 친정어머니가 다행히 나에게 가르쳐주신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내심이었다. 잡초를 밟는다고 죽나? 끈질기게 콘크리트 균열사이로 비집고 자라는 게 잡초다. 그리고 질긴 생명력이 있다. 


엄마가 나에게 돈을 안 주셨지 무한한 사랑은 넘치도록 주셨다. 그런 내가 결혼하고 10년은 우울증에 시달렸으니까 엄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명절에  어머니와 내가 둘이서 명절음식을 다 마련한 뒤에 동서네 부부가 왔다. 그때는 어린아이들 돌보며 음식장만하느라 나 또한 한참 이해심이 부족한 며느리 었을 것이다. 


남편은 가부장제의 가장 큰 특혜를 받은 사람이었고 명절만 되면 약속을 잡아 훌훌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기저귀 갈랴 밥먹이랴 시어른 밥 챙기랴 명절 음식 상다리 휘어지게 준비하랴 그렇게 다 끝난 오후 탈진하기 무섭게 털썩 바닥에 앉아 있었다.


동서는 어머니가 혼자 고생하셨다고 하길래 정말 아무런 감정 없이 "나랑 둘이 했거든?"이라고 응수를 했다. 


동서의 표정을 나는 읽지는 못했지만 사실 나도 너무 힘들었으니까 동서가 고생했네요 하면 위안을 받을 수 있었을까? 물론 대답을 듣지 못했다. 우린 대화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곧 또 명절이 다가오기에 며느리로서 도리를 해야 하는 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휴대폰 소리가 요란하게 들여왔다.

“Mother in law” 울어머니의 휴대폰에  입력된 네임이다.  


네 어머니, 전화를 받았다. 음식은 뭐 하며, 뭐 사갈 거며 이런저런 명절 음식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였으니까 나도 전화를 마침 하려던 참이었다. 



"네가 뭔데 시집살이하냐?"

어머니에게 대뜸 들려온 말이었다.

익스큐즈미? 아이 베그 유어 파든? ( I beg your pardon?) 다시 말씀해 주실래요? 머릿속에 붕붕 이상한 말들이 떠올랐다. 침착하게 마음을 추스르고 나도 다시 묻는다.


"네, 어머니, 뭐라고요?"


침묵이 이어지다가 어머니가 다시 말씀을 하신다.


“네가 뭔데 시집살이를 하냐?”


심장이 쿵쿵 크게 들려왔다. 귓구멍에까지 심장박동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침착하게..


“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을 이어하신다.


"네가 동서한테 무슨 자격으로 네가 시집살이를 시키냐고?, 동서가 그러더라.

형님에게 미안해죽겠다고. 작년 명절에 네가 나랑 둘이 해서 미안해 죽겠다는데

데 명절음식을 누가 하든 무슨 상관이냐? 다 우리 식구들 먹을게 아니냐?

그런데 네가 뭔데 명절음식을 했니 안 했니 시집살이를 시키는데? “


아하.. 듣고 보니 요 맹랑한 동서가 이쁜 며느리 컨셉으로 나에게 미안해 죽을 것 같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나 보구나. 하. 



어머니는 또 그걸 고깝게 들으시고. 


진정하자 진정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는 어머니께 천천히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 어머니는 제가 동서에게 시집살이를 시켰다고 말씀하신 거지요?

그럼 하나씩 풀어서 누가 시집살이를 시키는지 함 들어보실래요?


동서와 저는 서로 인사를 한 번도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말을 걸어야 받아주더군요.

그리고 저희 집에 오면 저는 밥을 꼬박 다 해먹이고 챙겨주고 그렇게 보냈습니다.


동서집 문 앞에 가면요 들어오란 소리도 없지만 인사도 안 해요. 

그렇게 우리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요? 


그런데 동서가 저에게 너무 미안했다면 작년 명절에 저에게 수고했다고 말 한마디 할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걸 싹 다 잊고 왜 하필 제가 아니고 어머니께 전화해서는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걸까요? 곧 명절을 두고 있는데요? 미안하다면 저에게 전화를 해야 하지 않나요?


시집살이를 누가 시킨다고요? 사람이 가든지 오든지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데 제가 왜 동서 입장을 생각해야 합니까? 본인이 미안하다고 하면 제게 당장 전화하라고 하세요.


그리고요 제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말 안 하면 평화롭게 보이죠? 그렇죠? 

제가 말을 안 하니 불만이 없어 보이시죠? "




다다다 다다 한참 본격적으로 스토리를 풀 생각으로 열심히 이야기를 하던 중에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야. 잠깐만, 전화를 끊어봐라.."


아니..  왜 벌써? 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내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라고..라고 생각했지만

어르신이니까 참고 일단 네 하고 조신하게 끊었다.


이때 얻은 깨달음은 침묵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 의견은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이 맞는구나. 나만 바른 생각 한다고 주변인들이 나를 무대 위에 세워두고 쟤는 욕심쟁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배역을 주면 그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함께 관람하는 남편마저 관람객입장으로 돌변하여 무대 위의 배우에게 손가락질을 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도의적인 행동은 하지만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내 생각도 그때그때 알려야겠구나 깨달음을 얻었다. 어차피 우리는 자주 봐야 하는 법적인 가족이니까. 


그렇게 잠시 후 어머니께 전화가 다시 왔다.


"아야. 네가 오해를 한 거다. 동서는 원래 인사를 안 한단다. 원래 성격이 그렇단다. 

그러니 네가 오해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나 같았으면 한다. 엄마처럼 있어주면 좋겠구나.

너의 큰 형님, 작은 형님, 남편, 시동생을 모두 네가 나처럼 엄마 같은 마음으로 받아주면 좋겠구나."


이것이었다. 바로 이거.

나이가 젤 어린 나에게 왜 모질게 대했는지를.. 나는 어머니의 한 몸이었다. 

시누들은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딸이었고 남편과 시동생은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동서는 막내의 아내이니까 자식으로 보인 게다.


그런데 나는 만만한 집구석에 시집온 모자라고 능력 없고 그리고 어머니집에 감히 비빌 수 없는 사람인데 시집와서 천 복을 누리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어머니는 자신과 빙의하신 거다.



너도 1940년대에 태어난 여자이므로 나처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신기하게도 나만 잡아먹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당신처럼 

모든 시가식구들을 어루만져주시길 바라셨구나. 그들보다 젤 어린 나인데도 어머니는 내게 그걸 바라셨어. 참으로 씁쓸하다 못해 쓴웃음만 나왔다. 



"네, 어머니, 그래요. 어머니 바라시는 대로 좋은 맘으로 그렇게 살게요. 걱정 마세요"

어머니는 무척 안심하신 듯하였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으니까.


인생은 오래 살고 침묵하고 볼일이다. 결혼 21년 차에 내가 느낀 것은 사람은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고 본인의 확고한 신념은 달라지며 한번 뱉은 실수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실감 나게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나의 결혼생활은 여전히 성숙으로 가는 과정 속에 있으며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걸려 황태자 남편이 나와 동등한 관계로 서로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간 지도 얼마 안 되었다. 시어머니의 혹독한 오해로 십여 년을 시달렸으나 결국에 모두들 나를 인정한 것도 세월이 흘러 증명해 낸 것이지만 말이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어머니와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다. 결단코 나는 어머니와 다른 사람이다. 나는 온전히 나이기 때문에 누굴 대신할 수 없다. 

다만 어머니가 맘이 편하시게끔 그냥 두는 편이다. 지금이야 어머니는 예전에 이런 대화를 나눴다는 걸 잊어버렸을 수도 있고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녀가 보기에 나는 당신과 같은 시대의 사람인 것이다. 

내가 받은 삶의 혜택, 교육, 시가문화, 결혼생활, 생활환경 모두 그녀는 나와 비교를 하며

상당히 부러웠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이해한다. 그러나 부디 나는 그런 어른으로 늙지 말아야지 그리고 나로서 오직 존재하고자 결심을 한다.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며  결혼생활 21년 차 많은 오해와 이해 속에서 사람들을 탐구하며 

서로를 절충하고 나를 이해하고 또한 나를 존중하게 되어 용기 있게 이 글을 써보았습니다. 

사람마다 옳고 그름이 없고 서로의 가치관의 차이로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세월은 그 모든걸 포용하게 만들더군요. 지금은 무엇보다 인정받으며 살고 있지만 그 과정 속에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글을 마치며 모든 가정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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