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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정 Jun 23. 2021

반짝이던 그 아이는 어디에 갔을까?

자발성은 힘이 세다


물속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자갈들 - 한국 원주,뮤지엄산


 “선생님, 저 예전에 초등학교 때는 공부 진짜 잘 했었어요.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한번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본격적인 입시의 시간을 앞두고 만난 담임교사와의 첫 상담에서 A는 아쉬움이 남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대학입시까지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덩달아 나까지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늘 그런 것 같다.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한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기도 하고 변화한 자신을 대견해하기도 하고. 미성숙한 과거의 모습을 떨치고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기도 하고 놀기만 좋아하던 장난꾸러기 같은 사람이 어느 순간 목표가 생기자 진지하게 진로를 탐색하며 학업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혹은 어린 시절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배우던 아이가 모든 것을 귀찮아하며 게임에만 몰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영아기, 유아동기를 거쳐 청소년기에 진입한 아이를 키우는 주양육자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 하고 또 그 시기를 그리워한다. 


배우는 것에 기쁨을 느끼던 반짝이던 그 아이, 모든 것을 내가 해보겠다며 손을 쭉 내밀었던 의욕이 넘치는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갔을까? 



 교육 현장의 문제, 경쟁 중심의 시스템 등 흔히 언급되는 이유를 차치하고라도 5세, 10세, 15세, 20세, 30세, 40세 실제로 점점 반짝이는 눈빛들은, 눈빛이 반짝이는 시간들은 줄어든다. 세상의 자극과 경험에 익숙해져서 일수도 있고 배우는 일이 더 이상 신기하거나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라고 생각하는 심드렁한 마음이 자리를 잡았을 수도 있고 삶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가?


열여덟살. 고등학생. 대한민국 국민, 청소년.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그들.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다. 미디어에서는 교실이 붕괴되었다며 엎드려 잠만 자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많은 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원래 어렸을 때는 똑똑했었는데 지금은 너무 이상하다면서 더 달릴 것을 채근하고 다그친다. 

한 다큐멘터리에서 1학년 교실과 고등학교 교실의 풍경을 대조적으로 비춰준 적이 있다. 너나없이 손을 들고 발표를 하려는 1학년 학생들과 달리 방송에 비춰진 고등학교 학생들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졸려하고 대답도 하기 싫어하는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태였다. 그 다큐멘터리의 결론은 학생들이 질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 문제가 있으니 교육의 장을 바꿔야 한다는 것. 좋은 다큐멘터리였고 실제로 그 다큐멘터리를 통해 교육의 장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말 고등학교 2학년 교실은 초등학교 1학년 교실과 다를까?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점점 모든 것이 시들해지고 재미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할까? 반짝이던 그 아이는 정말 사라진 것일까?

 매일 교실에 들어간다. 대부분의 수업은 생기가 있다. 어떤 날은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기도 하다. 월요일 1교시는 특히 그렇다. 피곤함에 지친 표정. 그래도 재미있는 활동을 할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기가 돈다. 동아리 활동을 한다. 어떤 날은 우리끼리 짠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너무 신이 난다. 어떤 날은 그럭저럭 그냥 그렇다. 

 원래 그렇다. 누구나 그렇다. 어떤 날은 재미있고 어떤 날은 신이 나고 어떤 날은 힘이 없고 어떤 날은 우울하다. 

 반짝이던 그 아이는 정말 사라졌을까? 정말 그는 모든 일에 무기력할까? 하루 종일 엎드려 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삶의 성찰이 담긴 글을 써내기도 하는 것이 그들이다. 지금 그것이 그 아이에게 재미없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순간 빛을 잃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우리가 그 빛을 가리고 있을 뿐, 또 놓치고 있을 뿐. 

그들은 어떤 순간에서는 여전히 빛나고 있다. 우리가 할 것은 그 빛을 봐주는 것. 그리고 어떤 순간에 빛나는지 알아차려주는 것. 또 빛을 더 뿜을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것.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다짐한다. 기준을 하나로 정해놓고 그들을 바라보지 말자고, 스스로의 빛을 뿜을 수 있도록 힘껏 돕는 조력자로 서 있자고. 그런 교사이자 부모가 되자고. 

이 글은 어쩌면 순간순간 내가 원하는 모양이 아니라고 빛을 잃었다고 단정 짓는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들의 빛을 흐리게 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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