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주한 두 개의 벽
내 인생 마지막 학기는 꽤나 잔인했다. 그동안 준비했던 진로에 대한 의구심이 든 뒤로 두 자아가 틈만 나면 서로 싸웠다.
A : 너 정말 이 길이 좋아서 가는 게 맞아? 새로운 단추를 끼는 게 두려운 건 아니고?
B : 낭만적이네. 이제 와서 그럼 뭐 어쩌라는 거야. 뭐 대안은 있어? 없잖아!
뾰족한 대안은 없었다. B가 이길 뻔했다.
그렇게 나는 절망과 함께 졸업을 맞았다.
몇 안 되는 동네 친구가 자기 회사 설명회에 연예인이 온다고 단톡 방에 올렸다. 나는 연예인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2018년 8월, 하트시그널 시즌2가 시즌1에 이어 초대박을 친 직후였다. 하트시그널의 8명은 연예인이 이야기하는 연예인이었다. 그중에서도 정재호, 예상과 너무 다른 이미지였다. 모델 같은 비주얼, UC Berkeley 출신, 20대인데 이미 판교 IT스타트업의 CEO. 태어나길 나와 애초에 다른 느낌. 그래서 뭔가 친밀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모습이 많았다. 실없는 말장난도 치고, 같은 방을 쓰는 김현우와 오영주 사이 오해가 생겼을 때 센스 있게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도 놀라웠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앞으로도 못할 것 같은 위너의 일상을 엿볼 생각이었는데, 그에게서 인간미를 보게 된 것이다. 이 스마트한 연예인이 비즈니스를 실제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고 '진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간 것이다.
정재호는 실제로 얼굴이 주먹만 했다. 피부가 좋다...는 걸로는 부족하다. 비옥하다. 그래 이 정도의 표현이 적당하다. 피부에서 윤기가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 속엔 김태원이라는 사람이 남았다.
달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망원경 성능을 높이는 대신 달에 갈 수 있는 탐사선을 제작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 같은 혁신적인 발상을 말한다. 10%의 개선이 아닌 10배의 혁신에 도전하는 구글의 급진적 업무 방식이다. 자율주행 자동차, 구글글라스 등을 개발한 비밀연구소인 구글 X랩은 문샷 싱킹을 실천하는 핵심 조직으로 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샷 싱킹 [moonshot thinking] (한경 경제용어사전)
구글 상무인 그는 달변가였다. 사람들이 언제 웃고, 언제 몰입하는지 꿰뚫고 있었다. 설민석 이후 이런 재밌는 강연은 처음이었다. 재미만 있지는 않았다. 출시를 예정 중인 테슬라 차를 꼭 타고 싶다던 그는 문샷씽킹 등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이 맞나 싶은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나의 상상력도 미치지 못한 미래에, 그는 이미 걷고 있었다. 유튜브에 그의 이름을 치며 한동안 그를 상상했다. 동시에 그 설명회가 유도한 4차 산업혁명 국비지원교육 안내서를 만지작거렸다.
빅데이터, 미래지향적인 단어가 주는 안도감. 그런데 이건 내가 이 기술을 활용할 수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보다는 괴리감. "뭔가 좋아는 보이는데... 저기에 내가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불안정한 미래에 만능열쇠처럼 보이는 저 화려한 모습과 달리 나는 상당히 아날로그 한 일상 속에 살았다. 지난 학기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노장사상을 가르치는 윤리과목 교생이었고, 관심이 많았던 장애인의 교육현실을 보며 대책 없이 한숨만 쉬고 있었다.
사람이 자존감이 낮아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데, 당시에 나는 내가 얼마나 한심한지 그 이유를 찾아내고 있었다. 나는 이미 남들보다 1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고, 전과를 하며 1년을 지웠다. 졸업을 했을 때 2년이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학기에 도전했던 스타트업 생활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도망치듯 나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뜬금없이 빅데이터? 나에게 한번 더 속아줘야 하나.. 아니 스스로를 한번 더 믿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과연 작성자는 이걸 보고 사람들이 혹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싶은 빅데이터 관련 광고들 사이에서 한글이지만 한글이 아닌 몇몇 설명을 보며 방황했다. 소모적인 갈등을 줄여 정말 필요한 논쟁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내가 빅데이터에 매력을 느낀 지점은 그다지 4차산업스럽지 않았다. 두려운 일을 해봐야 한다느니, 세상을 바꿔야 한다느니 듣기 좋게 말들 하지만, 그 말이 누구 입에서 나오던가. 엘론머스크, 스티브잡스, 아인슈타인... 자존감이 더 낮아지다가도, "내가 디자인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개발 역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잃을 게 있냐?" 저지르듯 신청했다.
A는 가까스로 B를 물리쳤지만, 나의 정신상태는 불안과 걱정으로 침몰 중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즐거움이란 일본에 있는 여자친구와 나누는 영상통화 정도였다. 빅데이터 수강까지는 두어 달이 남아있었고, 나는 자주 보기 힘든 여자친구를 보러 비행기를 탔다. TV에서나 몇 번 들어본 나고야를 처음으로 가봤다.
사람의 직감은 참으로 놀랍다. 어느 순간 공기가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으니 말이다.
역사를 좋아해 사학과까지 갔던 내게 일본은 달갑지 않은 나라, 그 일본을 떠올릴 때 나를 웃음 짓게 만든 친구였다. 친구들이 결혼 언제 할 거냐고 물어보면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고 마흔에 하겠다'며 호기롭게 대답하던 나에게 '일찍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심어준 친구였다. 일본어를 1도 모르지만, 이 친구만 있으면 해외취업도 해볼 수 있겠다는 포부를 품게 해 준 친구였다. 그런 그 친구는 우리의 관계에 물음표를 찍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음표는 마침표가 됐다. 나는 충분히 위태로웠는데, 기어이 낭떠러지로 내몰렸다. 즐거움과 사랑을 꿈꾸며 비행기를 탔던 나는 절망과 외로움을 안고 돌아왔다.
일본 도서관에서 혼자 간간히 공부하던 프로그래밍도 다 그만두었다. 지금 예습이랍시고 파이썬을 할 기력,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나는 하루하루 살아지고 있었다. 나는 점점 멍청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빅데이터 수업을 듣는 순간, 수업 준비도 제대로 해오지 않는 강사를 보며 결국 90˚, 침몰하게 됐다. 살다 보면 내 잘못이 아니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게 참 엿같이 돌아갈 때가 있다. 2018년 10월, 그때가 나에겐 딱 그런 때였다.
언제부터, 뭐가 그리 힘들었던 걸까?
당신에게 우울증 친구가 없는 이유,
두 번째 에피소드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