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웠던 학창 시절의 기억
13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의 일상은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렇듯 단순했다. 6교시, 대략 3시 정도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잠깐 쉬고 5시 반까지 언어, 외국어, 수리, 사회 등 전부 가르치는 종합학원에 가서 10시 즘에 끝나고 집에 오는 거다. 저녁은 거의 컵라면으로 때웠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6학년 때까지 나는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고 그냥 놀기만 좋아했지만, 곧 중학생이 된다는 생각에 교복도 입고 공부가 훨씬 더 중요해지긴 하겠구나 생각은 했던 것 같다. 실제로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안 하면 뭔가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 곧 고등학생이 되는 형이 중학교 때 다녔던 학원을 그냥 자연스럽게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잘 때까지 계속 무언가를 한 거니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숨 막히는 일정이긴 하다.
증상은 갑자기 찾아왔다. 뭐랄까. 머리가 상당히 멍하고 내가 나를 조종하지 않는 듯한 기분,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불가마에 오래 있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하는 느낌? 그 무엇도 집중할 수 없었다. 첫날은 그러려니 했는데, 이게 자고 일어난 다음날도 지속되었고, 자고 일어났는데 다음날도 지속되었다.
"... 이거 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뭔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계속될 수 도 있을 것 같다..."
불안과 공포가 나를 휘감았다. 학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초등학교 운동장을 늘 가로질렀는데, 밤 10시를 넘었으니 사람은 물론 그 어떤 불빛도 없었다. 운동장의 중간즘 왔을까. 결국 난 답답함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눈물이 터졌고, 그 울음은 집에 도착해도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은 물론 난리가 났다. 갑자기 애가 집에 울면서 왔으니. 이유를 물어보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이상하다. 머리가 뭔가 이상하다." 정도가 전부였다.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만 같다.
나는 의사가 아니기에 정확히 이때의 증상이 어떤 이유로 이랬던 건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다만 위에서 말한 머리가 멍 하다는 것 외에 몇 가지 정신상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혹시 무슨 실수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일단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게 극도로 무서워진다. 사람을 만난다는 건 나에게 상당히 큰 변수이니까. 그런데 당시는 내가 학생이고 매일 아침부터 저녁시간까지 학교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이 증상이 오면 난 등교해 그저 엎드려만 있었고 이 순간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이 늘 함께했다. 불안으로부터 해소되는 지점은 조퇴하고 집에 오는 길 그리고 자는 시간이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거의 하루 종일 산송장처럼 침대로 도피해 있었다.
극도의 무력감도 같이 찾아온다. 침대 위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고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건 나에게는 독배를 마시는 것과 같은 형벌이었다. 평소에 의지가 필요하지 않은 식사, 씻기 그리고 옷 입는 것이 당시의 나에게 상당한 과업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가지 않는 날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처박혀 있는데, 그때마다 '이러니까 내가 더 망가지는 거지'라는 자책감도 함께해 하루하루 더 침몰하고 있었다. 당시 나에게 이상향이란 내가 해야 할 건 단 한 개도 없고, 그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그런 외딴섬이었다.
나는 그 누구도 나를 공감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상당히 외로웠다.
머리가 멍하다고?
좀 어지러울 수도 있지.
불안한 거?
좀 그러다 나아지겠지.
무기력해? 밥 먹는 게 힘들다고? 씻는 게 힘들어?
뭔 미친 소리지...? 그게 뭐가 힘들어 정신 차려 미친놈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기에 내 증상을 되도록 말하지 않았다. 나 조차도 스스로에게 저런 대답을 했으니까. 넘어져 다리에 피가 고이는 게 나에겐 병이었지 마음의 병이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증상은 중학생인 나에게 너무 이른 개념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꾀병을 부리는 건가? 스스로 구분도 가질 않았다.
다행인 건,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과 아프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곧바로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시작했다. 축농증 진단을 받았을 때, 원인을 찾았다는 생각에 나의 불안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런데, 축농증은 사라졌지만 증상이 다시 찾아왔다. 불길한 직감은 다시 나를 휘감았다. 이때부터 나는 대학병원에 있는 다양한 과를 옮겨 다녔다. 그중에 하나가 정신과, 내가 정신과를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대학병원은 내가 검사를 받고 싶다고 바로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 증상이 오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기에 증상이 생겨서 정신과를 갔지만, 검사를 받을 때는 증상이 사라진 다음이었다.
삽화(Episode)는 증상이 나타날 때와 나타나지 않을 때가 뚜렷하게 구분되며, 자연적으로도 증상이 소멸될 수 있음을 미합니다. 또한 삽화 기간 중에는 증상이 거의 매일, 하루 종일 나타난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입니다. 따라서 하루 중 잠깐 또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 우울하거나 기분이 들뜬 경우를 우울 삽화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울증이란 무엇인가? 유한익(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교수)-
검사 결과는 삽화가 지나간 뒤였으니 물론 이상 없음으로 나왔고, 이 때문에 나는 성인이 되는 그 순간까지 부모님에게 정신과를 다시 가고 싶다고 그토록 억울함을 토로하는 계기가 되었다. MRI, CT, 뇌 혈류 등 원인을 찾기 위해 받지 않는 검사가 없었다. 신경과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증상에 따른 약을 처방이 아니라, 약을 써보고 어떤 약이 효과가 있는지 실험을 해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1년가량 대학병원을 다녔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고, 부모님은 '얘가 힘들긴 하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시 좋아지니까 그 증상이 오면 좀 쉬는 방향으로 해보는 게 좋겠다'라는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게 가장 무서운 결론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증상이 다시 오는 게 죽기보다 싫었고, 병원 조차 가지 않는 건 나에게 일말의 희망도 없는 지옥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러던 내가 스스로 정말 미쳐버린 건가라고 느꼈던 순간이 있다.
학교를 빠지는 날이 너무 많아지면서 학년 진급이 위태로울 지경이 찾아왔다. 결석 한 번이 조퇴 세 번과 같았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 가는 게 고통스러웠지만, 꾸역꾸역 1교시 정도만 의미 없이 자리를 채웠다. 교무실에 가 담임선생님의 걱정 어린 시선과 토닥임을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 학교 앞 5m가량의 횡단보도에 도달했다. 열세 살부터 시작된 이 증상으로 나는 이미 지쳐버릴 대로 지쳐버렸다. 멍 때리는 나의 눈앞에 빠르게 지나가는 차가 보였다.
그냥 저 차에 치어 죽어버리면 이 지옥 같은 삶이 싹 다 사라지지 않을까?
죽음이 무섭다기보다는 자유로움? 해방감? 정도로 어렵지 않게, 아니 오히려 달콤하게 보였다.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나는 지금 내가 정상이 아닌 건 확실하다고 느꼈다. 열여섯,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고등학생이 되자 한번 증상이 오면 더 오래가기도 했는데, 고1 때는 거의 한 학기의 절반을 날려버렸다. 그러자 머리에는 오백 원짜리 구멍이 나있었다. 그때 나는 원형탈모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고, 정신이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하루는 조퇴를 하고 집에 와 멍하니 티비를 바라봤다. 일지매라는 드라마가 재방송됐는데, 기억나는 거라곤 이준기와 이문식이 나왔다는 정도였다. 눈은 티비를 향했지만, 머리는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했다. 주부인 어머니는 점심을 차리셨고, 미역국을 만드셨다. 나를 불렀고 나는 미역국을 먹는데,
혹시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닐까? 미역국에 뭔가를 탄 게 아닐까?
망상을 했다. 당시 나는 정신과를 계속 데려가 달라고 했고, 어머니는 극구 반대하셨다.
'그래도 그렇지... 이게 무슨...'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나는 지금 내가 정상이 아닌 건 확실하다고 느꼈다. 열여덟,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제정신과 제정신 아님 그 어딘가를 표류하며 나는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당신에게 우울증 친구가 없는 이유,
세 번째 에피소드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