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힘들게 했던 것 들, 명절
'추석'의 ㅊ만 들어도 웃음이 나는 요즘, '추석'의 ㅊ만 들어도 예민해지고, 내 주변 사람들이 명절을 금지어로 명명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5년간 잃어버렸던 명절을 되찾았다. 공휴일을 기다리는 그 행복한 마음을 되찾았다. 빨간 날을 기다리는 짜릿함을 되찾았다. 아, 이건 진짜 진심으로 너무 행복하다!!!!!!!!!!!!!!!!!!!!!!!!!!!!!!!!!
이성적이기
힘들었던
글.
처음 이혼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며 나는 내 전 남편을 욕먹게 하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지금도 그는 동물의 왕국 같은 인생을 살며 나를 온갖 구설수에 오르게 하여 끔찍이도 싫지만, 그럼에도 이 글은 누군가를 고발하고 나의 분노를 풀겠다는 목적의 글이 아니니까. 누군가와의 관계를 떠나 이 공간은 그저 홍유리라는 사람이 겪어온 시간을 이야기로 쓰는 것뿐이니까.
그래서 실제로 욕이 너무 달린 글 하나는 나중에 지우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도 악플과 욕설은 사람을 힘들게 하니까. 그렇게 그동안 아주 열심히 감정을 다스리며 이성적으로 글을 써왔는데, 아. 이번 편은 좀 힘들었다. 맞춤법 검사기를 돌렸더니 비속어라고 알려주는 단어를 30개나 수정해야 했던, 추석 이야기. 아마 1편의 집안일, 2편의 2세 계획, 그리고 3편 명절을 끝으로 아마도 '우리를 힘들게 했던 것 들'의 시리즈는 마무리될 것 같은데 이 글이 그런 존재였다. 내게 힘듦의 끝판왕 같은 그런 이야기.
그렇게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이 마음을 너무 소리치고 싶었다.
결혼을 하고 가장 싫은 날은 명절이었다고! 나는 시부모님들과 '페친'이라서 며느라기 페이지도 팔로우 못하고 매 번 검색해서 들어간다고!
어디서 이런 공감하는 글이 SNS에 올라와봤자 나는 공유도 못한다고! 그러니까 부디 미혼자라서 마음껏 목소리를 내도 되는 누군가가 할 수 있을 때 이런 것 좀 같이 공유 좀 해달라고! 부디 이 답 없는 명절 좀 같이 해결해보자고!!!!!!!!!!
(네, 지금 공유해주세요!!!!!!!!!!)
며느라기 페이지 바로가기 :
https://www.facebook.com/min4rin
엄마,
왜 더 이상 명절이
내 것이 아님을 알려주지 않았어?
스물다섯, 결혼하자마자 엄마한테 했던 말이란다. 왜 결혼 전에 더 이상 설날과 추석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지 않았냐고. 나도 조카가 너무 보고 싶다고. 큰 집 식구들도 보고 싶다고. 왜 공휴일을 싫어하게 되는거냐고. 명절은 좋은게 아니었다고.
이따금 나의 명절 후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이 내게 '그럴 줄 몰랐냐'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게 더 충격적이었다. 세상에 '늘 그래 왔기 때문에' 당연한 것은 없다. 부디 이상한 것에 익숙해지지 말아라. 엄마에게 저 말을 뱉은 나는 철이 없었지만, 명절이 그런줄 몰랐던 나는 절대 철이 없었던게 아니다. 명절이 잘못했고, 풍습이 틀렸다. 그것은 철이 없음과 전혀 다른 이야기다.
왜 명절을 싫어했냐고 물으면
나는 아주 타당하고 정확하고 완벽하게
사유를 설명할 수 있다.
* 최대한 다수가 공감할 수 있을만한 글을 쓰고자 노력했지만, 물론 모든 가정에 적용하도록 일반화할 수 있는 글은 절대 아님을 미리 밝힌다. 결코 친절하지 않은 글이오니 불편하다면 뒤로 가는 것을 추천한다.
1) 나는 더 이상
명절에 나의 친척들을
만날 수가 없어졌다.
명절 연휴의 첫날은 시댁에 가서 상차림 준비를 했다. 명절 당일에는 시댁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다녀왔다. 그렇게 성묘까지 다녀오면 밤이 되었다. 그렇게 둘째 날 오후-저녁이 되어 우리 집으로 돌아오면 나의 가족들은 마찬가지로 첫째 날-둘째 날 가족 모임을 갖은 후였고, 나는 결국 결혼한 뒤로 큰집 식구들이나 사촌들, 조카들을 볼 수 없어졌다.
그렇게 1년에 두세 번 명절에나 만날 수 있었던 조카들을 5년 동안 딱 두 번, 할머니의 장례식장과 아빠의 환갑잔치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챙겨서 보려면 봤었겠지만, 처음엔 이렇게 못 만나게 될 거라는 인지 조차 없어서 정신 차리고 보니 그랬다. 워낙 어릴때였다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고모가 최고라며 따르고, 명절마다 고모에게 영상통화를 해달라던 조카들은 어느날 문득 다 커서는 갑자기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서러워지곤 했었다.
그 사이 나는 전 남편의 조카들에게 인기왕이 되었는데 당장 이번 추석만 해도, 그의 모든 친척들은 그의 이혼 소식을 접하게 될 것이다. 늘 함께 오던 내가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그냥 집에서 쉬면 내 친척들에게 내 입으로 직접 커밍아웃하지 않고는 이야기할 일이 없어진다. 원래 명절엔 만날 수 없는 가족들이었으니까. 이것부터가 그동안 경험해온 명절이 얼마나 불공평했는지를 정확하게 대변해주지 않나.
2) 설은 처가에
추석은 시댁 가는 세상이면
어떨까?
전 남편의 여동생은 나보다 늦게 결혼을 했다. 나는 제목처럼 언젠가 설은 처가댁, 추석은 시댁에 가는 세상이 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번 상황을 통해 좀 더 딥한 대화를 해볼까 했다.
나 : 이제 언니도 더 이상 명절에 못 보게 되겠다.
남 : 왜?
나 : 결혼하니까. 언니도 시댁에 가야 할 거 아니야.
남 : 아닌데? 우린 볼 건데?
나 : 그치만 시댁에 가면 못 볼 거 아니야.
남 : 아니 왜 못 보냐니까?
나 : 아니 그러니까 너의 집에 있는 동안 여자인 네 동생은 이제 시댁에 가야 하고 네 동생이 지금처럼 친정이 된 너희 집에 돌아오는 둘째 날 밤에는 우리는 너의 친정집인 우리 집에 가고 없잖아.
그런 게 어디 있냔다. 그는 끝까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조상을 위해 매 년 혼자 종일 집안일을 한 내가, 옆에서 5년 동안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실제로 상황이 맞닥드려져 경험해본다면 동생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명절을 보면서 '내 아내도 이런 게 힘들었나 보구나' 생각하길 바랬지만, 마치 5살 아이처럼 그런 게 어딨냐고 생떼만 부리다 끝났다. 결국 그는 이 사태에 대한 인지를 끝까지 하지 못하고 이혼을 하게 되었다. 제목 같은 순간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그거 비슷한 언저리, 아니 그냥 그가 이런 내게 미안해하거나 나의 감정을 공감하고 고마워해 준다면 나는 사실 그걸로도 충분했는데.
3) 나로
효도하는 거야?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옆에 앉아있는 아주머니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장을 담궜냐는 주제의 내용이었는데 몇 년 쉬었지만 올해부터 담근단다. 사유는 바로, 며느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 내용은 전 남편과 무관하다)
그는 결혼 전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명절에 꼬박꼬박 집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연애 시절에는 명절에도 나와 데이트를 했다. 그러나 결혼을 한 뒤로는 전 날에도, 당일에도 매우 일찍 집으로 가서 매우 늦게 퇴장하는 행태를 보였다. 나를 그 부엌에 두고 방에서 잠을 자는 네가, 며느리가 생겨 지금부터 김장을 담그겠다는 아주머니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시어머니는 당신께 전화를 자주 하라고 말씀하셨었는데, 결혼 초반에 마음먹고 다이어리에 일정까지 체크해가며 종종 하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나만 이렇게 해야 하는 것들이 싫어져서 하지 않았다. 전 남편은 그런 내게 뭐라고 했고, 당신도 하지 않는 걸 왜 내게 강요하냐고 묻자 "너는 원래 그런 거 잘하잖아"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4) 아 혹시
내 조상님 이던가?
이 집에는 시어머니, 시아버지, 내 전 남편인 집안의 아들과 그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처음 들어간 낯선 주방에서 음식을 하고 있는 건 시어머니와 나뿐이었다. 내가 음식을 할 동안, 그는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거나 TV를 봤고 그의 여동생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해가 지날수록 이 상황에 납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분노하는 나로 인하여 이듬해부터는 잠깐 등장해서 전을 부치는 작은 선의를 고-맙 게도 베풀었지만, 그래 놓고 최선을 다했다는 듯한 뉘앙스의 대화를 뱉어 그럴 거면 크게 도움도 안 되는 거 차라리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을 부쳤으니 나는 깨어있는 남자고, 내 나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게 싫었다. 이 음식을 드시는 조상님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내가 손주들도 안 하는 음식을 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5) 노동보다 힘든 건
삼 시 새 끼는 육해공이 모두 올라간 집밥이었다. 차리면 먹었고 먹으면 치웠고 치우면 차렸고 차리면 먹었고 먹으면 치웠다. 밥상과 찻상 과일상을 번갈아가며 하루에도 너덧번씩 차렸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노동보다 힘든 건, 내 집에서 늘 내가 돕던 엄마는 나를 시집보내고 혼자 이 많은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 / 일면식 없는 조상님들을 위해 노력하는 내 근처에 이 노동의 사유인 전 남편이 없다는 것 / 둘 만 종일 있어야 하는 주방이 숨 막힌다는 것.
6) 제가 다 할게요.
근데 혹시 성묘는 다른 날 가면
어떨까요?
꼼짝없이 차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는 멀미 왕인 나는 뒷좌석에서 어머님과 동행 시간 내리 손을 잡고 있었고 성경말씀을 들어야 했다. 거리도 멀거니와 명절의 교통체증, 성묘가 여러 곳 인 사유로 명절 전 날과 당일을 모두 시댁에서 꼬박 보내고도 성묘가 끝나고 만약 엄마 아빠와 저녁을 같이 먹으려면 우리 부모님이 식사시간보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정도의 시간에 일정이 끝났다.
성묘를 다른 날 가면 어떻겠냐는 제안에, 가야 하는 두 곳 중 한 곳은 명절 당일에 가되, 또 다른 한 곳은 명절 전 주 주말에 나가서 따로 가기 시작했고 나는 덕분에 3시쯤 내 친정집으로 출발할 수 있는 타이밍을 찾은 날이었다. 그리고 그 날 시댁 식구들은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끼리 성묘가 일찍 끝난 김에 바닷바람을 쐬러 가자고 (갔다. 바다)
7) 제가
무교입니다만.
무교도 맞지만, 특히나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종교가 있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반대하는 그 종교를 시댁 식구들은 내게 끊임없이 강요하셨다. 찬송가를 부르지 않으면 성경책은 점점 내 코앞으로 다가왔다. 글자가 읽을 수 없을 정도의 각도까지 들이밀어졌다. 잘 보라는 배려가 아니라 빨리 소리 내어 부르라는 압박이었다.
그리고 나는 집에서 평생 제사를 지내왔는데, 여기서는 기도를 했다. 기도 내용은 며느리의 사업장을 하나님이 잘 되게 해 주셨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아니 제가 노력해서 만든 건데요? 아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다 생각하면 이쯤이야, 결국 나를 향한 응원과 기도였으니까 넘어가 보자.
그래도 그에게 가서 내가 교회 가고 싶다 했다고 말하진 말았어야 했다. 점심 먹자고 하시며 교회 이름을 알려주거나, 찬송가는 음이 있어 못 부르더라도 주기도문은 따라할 수 있지 않냐고 말한것도. 아무리 노력해도, 도통 이해하려 해도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
8) 그래도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 모든 게 불만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 물론 호락호락한 성격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스물다섯의 나는 사랑이 넘쳤고 노력하고 싶었다. 부당하다 판단되는 일들 앞에서 고작 결혼이라는게 가부장제의 질서 안에 편입하겠다는 약속이었나 수도 없이 생각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나를 아껴주셨고 나의 언행이 나의 전 남편과 내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만큼 아프게 할 것 같아 버티고 참았다.
눈앞에 일찍이 1억이 넘는 큰 빚을 대신 해결해야 해서 늘 숨이 턱 끝까지 막힐때에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용돈을 챙겼다. 돈이야 뭐 별거 아니라고 할 수 도 있겠지만 늘 여러가지 마음 담아 손편지부터 꽃, 선물은 당연히 내 몫이었고, 조카들의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까지 거르지 않고 잘 챙겼다.
물론 준 건 내 진심이니까 괜찮다. 후회 없다. 그러나 주는 것도 불공평이 오래되니 버티기가 어려워지더라. 그는 당신의 가족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우리 가족의 선물 같은 건 챙겨본 적이 없었고 내가 늘 선물을 사서 그의 손에 쥐어주며 직접 전하라고 하거나 그의 핸드폰을 달라고 해서 직접 우리 가족에게 축하 인사를 보냈다.
그렇게까지 하며, 이미 결혼을 했으니 버텨보고 싶었다. 우리 엄마도 곱게 키운 딸 나가서 바가지 새지 말라며 2일 동안 사과 깎는 연습을 시켰는데. 그랬듯 시부모님들도 그저 시대 배경적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한 번 버텨보자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많은 7가지 이유들이 아니라
너였다.
이미 열심히 차려놓은 밥상, 그래 맛있게 먹자. 근데 그냥 나와 어머니가 다 먹을 때까지 옆에만 있었어도. (다 먹으면 남자들은 모두 TV를 보러 가버렸고 시어머니와 나는 서로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또 한번, 숨이 막혀왔다)
나를 그 집에 두고 혼자 머리를 깎으러 가거나, 그 가족들 많은 곳에서 다 같이 목욕탕 가잔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이건 정말 조금의 배려라도 있었다면 할 수 없었던 이야기 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이미 한거 그래, 그럼 우리 집에 와서 내가 한 노동의 1/10 정도의 성의만 보였어도. (우리집 에서도 앉아서 밥을 더 달라고만 했고, 당연히 그 외에는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집에서도 TV를 보며 밥을 먹어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절대 밥 먹으며 TV를 틀지 않는 우리 집안에 오면 당황해하며 핸드폰만 했다)
아니 그래 다 내려놓을게. 그럼 집에 가는 길에 이렇게 열심히 집안일 해준 걸 고맙다 표현만 했어도. (나는 단순하니까, 그런 너라면 알아서 피로를 잊고 다음 명절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이러다 옆에서 숨만 쉬었어도 괜찮았을 거라고 말하는 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나도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명절마다 집에 와인을 2병씩 사다 놓는 습관이 생겼고 우리는 명절 동안 대화를 하지 않았다. 백화점에서는 파운데이션 밖에 안 사본 내가 명절이 끝나고 첫 명품을 사기도 했다. TV에서나 봤던 그 행위는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아!
다행히도
다 옛날이야기 :D
명절이 그저 '용돈 받는 긴 연휴'였던 어린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데. 이제는 용돈을 줘야 할 나이가 되었지만, 그러면 어떠하리. 추석, 날이 좋았고 구름이 예뻤다. 친구들과 새벽 5시까지 연트럴 파크에서 와인을 마셨고 데이트를 하며 영화를 봤다. 청소기를 돌렸고 커피를 마셨다. 이 얼마나 더할 나위 없는 명절일까.
이번 명절을 진심으로 행복하게 보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이번 명절, 이런 나와 하이파이브를 해줬다. 그런 엄마 밑에서 자존감 높은 돌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말이지 복 받았다 생각한다. 그렇게 신나게 놀고 있는데 하루 종일 연락이 없던 유부녀 친구들이 잠깐 카톡에 등장해서는 쏟아내듯 무용담을 뱉어놓고 일하러 다시 없어지는 상황들을 보며, 나는 이제라도 내 인생을 되찾은 것에 안도했고 또 서둘러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이렇게 답 없는 명절에 대해 나는 이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 글 덕분에 세상 며느리들이 '이혼'이 아닌 방법으로 딱 밥 한 숟가락 정도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명절 증후군 해소법? 그런 거 세상에 없습니다. 송편은 사 먹는 게 제일 맛있고요. 설날과 추석엔 한 번 씩 돌아가며 집에 갑시다. (물론 집에서 둘 다 쉬면 더 좋겠네요) 각자의 집에 가면 각자의 집안일을 하자고요.
사실 이건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에요. 본인 입으로 넘긴 게 있다면, 그건 직접 치웁시다. 아, 혹시 당신도 대답하기 싫은 질문 같은 건 어디 가서 누구에게도 묻지도 마시고요!
이런 얘기를 하면 기혼 여성들이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말이나 되냐"며 놀라던데, 미혼(?) 여성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 얼마나 일반화된 그저 정상적 문항인지 새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