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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KTUS Apr 16. 2024

삿포로에 수프카레 먹으러 갈래요?

삿포로 1일 1 수프카레 기행

어느 날, 혼자 삿포로에 가기로 했다.


서른다섯, 나에게 주는 퇴사 선물이었다.


잠시 인생의 쉼표를 찍고 가기로 했다. 나에겐 휴식과 회복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대한 망각과 무계획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잠시 게을러도 되며, 머릿속을 비우고, 다음 챕터를 구상할 시간.


왜 하필 삿포로였을까?


그건 아마도 오래전, 첫 회사 선배가 혼자서 삿포로 여행을 다녀와서 풀어놓은 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선배의 삿포로 여행 사진과 후기가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하늘이 맑고 공기가 깨끗해 살기 좋다는 삿포로가 계속 머리에 맴돌았고, 일본의 부엌이라는 별명답게 식재료가 신선하고 맛있는 삿포로의 음식을 맛보고 싶었다.


겨울의 눈 축제 외에는 도쿄, 오사카, 교토보다는 관광도시로 덜 알려져 있어서인지, 이미 완결된 정보의 홍수에서 조금 벗어나 나만의 삿포로 여행기를 그려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나는 4월 초입, 삿포로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서 휴대폰 메모를 켜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를 적었다.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은 단연, 수프카레였다.


수프카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


매콤하고 따뜻한 국물에 닭다리와 채소를 적셔 먹는맛을 나는 사랑했다.


삿포로 여행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수프카레.


많은 이들이 삿포로 비행기 티켓을 끊는 이유의 1번은 수프카레라고 하지 않던가.


삿포로 현지, 여러 식당에서 다양한 스타일과 맛의 수프카레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수프카레의 고향에서 먹는 오리지널 수프카레는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이었다.


삿포로에 도착했다.


4월 초의 삿포르는 쌀쌀하고 찬 바람이 불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은 날씨였다.


봄과 겨울이 오락가락 반복되는 겨울 끝, 봄의 시작 시즌이라고 했다.


첫째 날 저녁의 수프카레

여행 첫날 숙소에서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친 후에 근처 수프카레집을 향했다.


수프카레의 도시답게 구글 지도에 스프카레를 검색하면 수십 개의 수프카레 식당이 나왔다.


그중에 첫 식당으로 선택한 곳은 카나코의 스프카레집.


수프카레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치킨 수프카레를 주문했다.


뚝배기 같은 우직한 그릇에 나왔다.


쌀쌀한 첫째 날 저녁에 알맞은 따뜻한 음식이었다.


깊고 진한 카레 스프에 신선한 홋카이도의 구운 채소와 닭고기. 스프의 농도와 묽기가 딱 알맞았다. 커리의 풍미도 예술이었다. 극찬이 이어졌다.


카나코의 스프카레집은 닭다리, 채소 외에 닭껍질을 기본 토핑으로 올려주는 것이 특징이었다. 보드라운 닭껍질이 정말 맛있었다.


튀긴 닭다리 치킨이 아닌 국물에 익힌 닭다리가 나오는 것이 특징.


버섯, 브로콜리, 그린빈, 당근, 감자 등 스프에 적셔 먹는 구운 채소도 하나 같이 다 맛있었다.


"이걸 먹기 위해 삿포로에 왔지." 입안에 감미로운 만족감이 퍼졌다.


여행의 이유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커리 스프 속 은은히 배어 나오는 조화로운 맛의 향신료의 향.


스프카레는 따뜻하고 매콤한 국물과 토핑이 어우러진 음식이라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매력이 있다. 삿포로의 소울 푸드라고 불릴만하다. 재료의 맛을 온전히 느끼기에 음미하는 매력도 있다.


치킨, 채소를 하나씩 정성껏 배치한 정갈한 담음새 또한 스프카레만의 근사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식당마다 스프의 농도, 커리의 맛, 향신료의 배합, 토핑 재료, 담음새가 다르기 때문에 삿포로 곳곳을 찾아다니며 맛 탐방을 하는 재미도 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스프카레를 만든다. 자신만의 상징과 방식으로.


또 스프카레는 완벽한 맥주 안주가 된다. 스프카레와 곁들이는 맥주 한 병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 그만한 행복도 없다.


둘째날의 스프카레

둘째 날에는 조금 늦게 스프카레를 먹으러 갔다.


밤 9시가 지나니 문연 곳이 많이 없었다.


타츠키 스프카레는 젊은 남자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어두운 분위기의 실내, 흡연이 가능한 펍 같은 느낌이었다.


타츠키의 스프카레는 또 어떤 맛일까? 치킨 스프카레와 맥주 한 병을 시켰다.


이곳의 스프카레의 국물 농도는 다소 묽었다. 코코넛 밀크를 섞지 않은 본래의 스프카레의 묽기.


국물 색깔도 브라운이기 보다는 레드에 가까웠다. 향신료의 건더기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생각보다 묽고 맹탕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예상치 못한 맛이었다.


그런데 한 입 두 입 먹다보니 카레의 맛과 매콤한 맛, 향실료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타츠키 스프카레만의 독자적인 스타일과 맛인 것 같았다.


이곳의 키 포인트는 바로 치킨. 그 어느 곳보다 큼지막한 닭다리 치킨을 맛있게 튀겨 내놓았다. 고소하고 담백하고 크리스피한 치킨이 웬만한 치킨집보다 맛있었다.


국물도 점차 적응이 되니 퍼먹는 숟가락 속도가 빨라졌다. 은근히 중독되는 맛이었다.


카나코의 스프카레집과는 또다른 맛. 온전히 스프카레에 집중했다.


스프카레는 확실히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국물의 농도에 커리가 약간만 더 들어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스프카레를 맛보며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품평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며 돌아섰다.


셋째날의 스프카레


여행 셋째날에도 스프카레를 먹으러 갔다.


오늘은 또 어떤 맛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셋째날의 스프카레는 스아게4였다.


오타루에 갔다 오는 길에 삿포로역에서 가장 가까운 스아게를 찾아갔다.


중독성이 짙은 마약 수프카레로 유명한 곳으로 삿포로에서도 여러 지점을 둔 곳이었다.


서울에도 진출해 여의도 스아게가 있다.


스아게4에서는 치킨 스프카레와 홋카이도식 닭튀김인 장기를 시켰다.


스아게의 스프카레는 확실히 대중화된 맛이었다.


해산물 국물 베이스를 내는지 스프를 떠먹는데 작은 오징어 조각이 씹혔다. 그만큼 국물은 깊고 시원했다.


누구도 호불호 없이 맛있게 먹을 스탠다드한 맛.


스프의 농도도 적절했고, 재료 담음새 역시 훌륭했다. 꼬치를 사용해 토핑이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했다. 루꼴라가 들어간 것이 특징이었다.


조금 아쉬웠던 건, 국물이 그리 깔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선 두 곳과 다르게 스프 국물에서 미세한 건더기들이 씹혔다. 마치 토마토 수프를 먹을 때 씹히는 토마토의 과육처럼 말이다.


전체적으로 맛있게 먹었지만 그점이 하나 걸렸다. 깔끔하고 진한 풍미의 스프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마이너스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대중적인 맛 역시 먹고난 후에 감동이 덜했다. 특색이 없었다고나 할까.


오히려 장기가 맛있었다. 장기는 가라아게보다 더 진한 양념을 해서 튀긴다는데, 짭조름한 풍미가 남달랐다.


스아게4는 장기 맛집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렇게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 모두 1일 1스프카레에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 김치찌개 맛집마다 손맛과 비결이 다르듯이 세 곳의 스프카레집이 모두 달랐다.


각기 다른 시그니처와 특성으로 만족감과 행복감을 전해주었다.


아무 걱정 없이 생각을 비우고 내 앞에 놓인 스프카레 한 그릇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각자에게 여행은 다른 기억,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몰랐는데 나는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의 맛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다.


현지의 식재료의 맛. 현지의 문화를 담은 음식을 음미하는 일이 나의 여행의 대부분이다.


그 음식을 먹으며 때로는 눈이 번쩍 뜨이고, 때로는 입에 맞지 않아 실망을 하면서 그곳에 느긋하게 있어도 된다는 안도감이 나에겐 여행이다.


삿포로에 3박 4일 머무르면서 3그릇의 스프카레를 먹었다.


나와 스프카레만의 시간이었다. 스프카레를 먹으며 나의 삿포로 여행기를 적어 나갔다.


대단치는 않아도 늘 마음 속에 품어왔던 여행의 풍경을 삿포로에서 실현해서 더욱 의미가 깊었다.


"그래, 이걸 먹기 위해 이곳에 왔지."


스프카레를 먹으러 삿포로에 가는 일.


그것이 나의 낭만이었으며, 기쁨의 사치였다.


참 해볼만한 일이었다. 삿포로에 다녀와서 다행이다.


나의 인생, 그 다음 챕터는 구상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스프카레는 맛있었고, 나는 스프카레를 먹으며 안도했다. 그 점이 스프카레에게 고맙다.


'그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될까' 어렴풋 생각했지만 당분간은 더 무계획에 맡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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