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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 Dec 04. 2023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급) 자기소개

내일모레 마흔을 앞두고 문득 되돌아보게 된 '나'는 어떤 길을 걸어왔나

엄마가 말해주길 그때도 흔치 않아 보였다고 그랬다.

그 작은 영도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당시의 인턴 및 레지던트들, 그리고 간호사들까지 모두 퇴근하지 않고 쌍둥이 자연분만을 보겠다고 밤새 남아 와글와글 엄마를 둘러쌓고 우리가 나오는 것을 지켜봤다는 이야길 들어보면.


그렇게 내가 포동포동한 3킬로 초반대로 머리가 새까맣게 자란 채 먼저 세상에 나왔고, 

동생은 거꾸로 돌아 나와야 되는 상황인데 시간이 많이 걸리면 산모와 아기 둘 다 위험하다고 판단,

담당 주치의 선생님이 삐쩍 마른 2킬로대의 내 동생을 다리로 잡아 빼셨다고 하셨다.

이 쌍둥이 자연분만 레전드로 남은 것 같은 썰을 자라오는 내내 몇 번이고 들어왔지만, 

그래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 갓난아기로 태어나던 그 찰나의 이야기는 매번 들을 때마다 항상 재미있다.


쌍둥이 여동생과 나.



그렇게 8년을 첫째로, 쌍둥이 언니로 살다가, 남동생 둘이가 연달아 늦둥이로 태어나게 되면서 나는 4남매 중 K-장녀로 발탁된다. 만약 K-장녀에도 국가대표가 있었다면 아마 내가 선발되어 금메달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메달은 받지 않았을까 싶다. 해봤자 1-2학년이었는데, 이때 남동생들 육아를 밤낮으로 도우면서 육아포비아가 생겨 지금까지도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이래서 어릴 때 경험이 참 중요하다)


잠깐 아버지의 전근으로 밀레니엄 전후로 네덜란드에서 2년 정도 살다오게 된다.

이때 배운 영어로 지금까지도 참 잘 써먹게 된다. (이래서 어릴 때 경험이 참 중요하다 22)


그렇지만 한국에 다시 들어오면서 마치 대학생처럼 활기차고 자유로웠던 학교생활은 갑자기 저 멀리 미드처럼 사라지고, 갑자기 칙칙하고 감옥 같은 중학생의 삶이 시작됨과 동시에 갑자기 기울어버린 가세에 사춘기 청소년이었던 나는 참 말이 없고 음침하고 또 어두웠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끌려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시 하나만 철석같이 믿다가 덜컥 국립대 간호학과에 붙어버렸다. 그리고는 또 똑같이 아무 생각 없이, 하지만 술자리를 전전하며 시끄럽게 학교생활을 하다가 겨우내 졸업하고 간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중환자실에서 바보신규로 불리며 눈물 콧물 다 쏟기도 하고, 그만두면 배신자라는 말과 갖가지 협박을 들어가며 퇴사, 여러 지역의 병원과 과를 전전해가며 다양한 경력과 흔치 않은 경험들을 쌓아보았지만, 나의 진로변경(?)에 대한 갈망과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무한상사 같은 일이 내게도 일어날까?

특히 '마케팅', '마케터'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마치 진정한 이 시대의 멋진 커리어 우먼의 키워드 같이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시작된 메디컬에이전시에서의 막내 직원. 즉 구르라면 구르고 철야를 해야 하면 철야를 하고 그게 당연한 현대인의 낭만이라 생각했던 어수룩했던 신입사원의 삶.

그 후 또 다른 여러 의료기기회사에서 영업마케팅, 수입인허가 업무 외 교육, 임상지원 등 다양한 업무를 정신없이 하다 보니 30대 중반까지 흘렀고, 어느새 나는 눈빛이 매섭고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과장님이 되어있었다.


연애도 여러 번 시도해 보았다.

술도 좋아해서 핫하다는 곳들과 클럽도 다녀보았다.

다만 잠깐 만나던, 몇 개월을 만나던, 몇 년을 만나던 항상 끝은 정해져 있었다.

내 삶에 결혼은 없었으니까.

결혼이나 결혼식에 대한 로망도 없었고, 육아는 더더욱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그냥 혼자 조용히 즐겁게 살려고 했었다. 

비혼은 아니었지만 그냥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 두 분 다 유독 나에게만 엄격하셨던 것 같고, 30대가 넘었는데도 계속 내 삶에 개입하시려고 하시는 것 같아 책도 많이 보고 정말 아등바등 많이 노력했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어느새 적당히 아름다운 거리를 두며 즐거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직장도 크게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적당히 오라는데도 몇 군데 있었고, 20대 때 축냈던 건강은 운동과 식단을 신경 쓰며 건강히 살려고 부지런히 남들 한다는 건 한 번씩 다 해봤다.

그렇게 혼자 살 수 있는 깨끗하고 아늑한 오피스텔도 매입해 버리고, 운전에도 자신 있어 내 눈에 한없이 귀여운 소형 SUV도 하나 옆에 끼고, 혼자여도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다 안정적이고 즐거워졌다.


내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내 삶.

완벽하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던 달빛이 어린 공간




그러다 갑작스럽게 한 남자를 만나버렸다.

이렇게 만나다가 결혼하겠는데..? 를 속으로 생각한 적 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상견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게 6개월 만에 혼인신고, 4개월 후 결혼식을 올리며 내가 정성스레 쌓아 올린 삶을 내 두 손으로 즐겁게 직접 무너뜨리고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지방으로 냉큼 모든 걸 정리하고 내려가게 되었다.

무려 시부모님 집과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신혼집으로.


시부모님 회사에 자연스레 합류하여 1년을 다니고 퇴사하였고, 도중에 예상하지 못한 남편의 병시중도 들게 되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건강에 빅이슈들이 뻥뻥 터지면서 지금은 우리 부부의 건강을 1순위로 두고 살아가고 있다.


사실 가끔은 아직도 내가 내 삶의 중심이 아닌 것 같다.

(무교였던 나는 크리스천이 되었고, 물론 나의 주인은 예수님이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고 배려하는 것에 비해 나를 등한시하는 것 같다는 의미다.


나는 바뀌고 싶고,

또 털어놓고 싶고,

함께 나누고 싶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이런저런 슬프고 분통이 터지는 일들도 있었지만,

즐겁고 유쾌한 순간들이 많았으며,

깔깔대며 웃을 수 있는 재미난 썰들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다.


그 숨겨져 있는 눈물과 웃음들을 하나씩 더 늦기 전에 세상에 천천히 내놓고 싶다.

속으로 되감기 해보면서 혼자 웃기 아까울 때가 가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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