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독서 10일. 루틴의 재설계
새벽독서 모임을 위해 새벽 5시에 줌 접속을 한지 열흘째다.
간신히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며 줌을 켜면 잠은 한순간에 달아난다. 이미 줌에서 엄숙하게 독서를 하고 있는 글벗님들의 광채가 화면을 뚫고 나오기 때문이다. ‘잠이 안 깬다. 아직 일어나는 게 어렵다.’라는 말은 입도 뻥끗할 수 없는 분위기다. 눈치 챙기고 책으로 머리를 조아린다.
- 좋은 책이 자신에게 제때 와야 양서가 된다. 잘못 오면 악서가 될 수도 있다.
- 책을 읽는 이유는 낯선 자극에 깨지고 굳어지기를 반복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상대가 주로 읽지 않았던 책을 추천한다.
- 지적 허영이나 감정의 위안을 받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읽어라.
누가 너에게 강요하는 대로, 또는 누가 네게 원하는 대로 어떤 것을 보지 말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
똑바로 서 있으라. 그렇지 않으면 우주의 본성이 나서서 너를 강제로 똑바로 세우려고 할 것이다.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중에서
내 경험상 보는 것 중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장 어렵다. 내가 뭔가를 있는 그대로 본 적이 있는가? 내가 본 대로 가감 없이 표현한 적은 있는가? 두 질문 모두에 그렇다고 답을 하기가 어렵다.
솔직히 내가 무난하게 사회생활을 해온 비결은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남들이 보는 대로 맞춰서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난하게 살기’는 내 사회생활의 피상적 목표이기도 했다. 자랑스러워서 하는 말은 아니다. 자랑스럽지가 않아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안쓰럽기는 하다. 자랑스럽지 않은 피상적 목표를 위해 나는 매 순간 성실했고, 많은 것을 인내했다.
그렇다면 자랑스러운 목표가 생겼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나는 아직 덜떨어진 채 맹한 모습이다. 그런데 책에서 ‘똑바로 서 있으라.’고 한다. 안 그러면 강제로 똑바로 세울 거라고. 똑바로 세우는 게 맞다는 확신만 든다면 나는 그 ‘강제’에 군말 없이 순응할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한 선택을 위해서는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도 필요합니다.’
지난 열흘 동안의 새벽독서는 세상을,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자기 자신을 키웠던 위대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그 목소리는 잘 안 들리기도 했고, 또는 잘못 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줌 화면 속의 글벗들의 대화가 나의 무딘 감각을 깨워 주었다. 그래서 나에게 뚜렷한 바람이 생겼다.
새벽독서 열흘이 365일이 되는 그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꽉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 1년을 채운 날에 나는 또 어떤 바람을 갖게 되겠지? 그 바람이 무엇일지 나는 몹시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