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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May 16. 2022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책 속의 사람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오래전 도올 김용옥 선생은 한 매체를 통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난 이야기를 준해 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바닥을 치고 있을 때였다. 도올의 전언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늘 도덕적 잣대로 국정의 방향을 판단하는 지도자고, 그래서 그 누구의 현실적 주문에도 설득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도올의 평가 속에는 전통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담겨있다. 개인적 도덕성과 정치적 현실 사이의 딜레마. 즉,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신학자 라인홀더 니버가 심도 있게 제기한 문제와 같은 것이다. 니버는 일찍이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라는 제목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적 윤리가 사회적 조건들 사이에서 어떻게 작동되고 또 변질되는지 살펴보았다.     


니버의 ‘기독교적 윤리’는 신학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오늘날 여러 가지 이름으로 번역될 수 있다. ‘정의’ 나 ‘공정’과 같은 낡은 단어들도 그중 하나이다. 개인과 사회적 인간 사이의 도덕적 괴리에 대한 니버의 오래된 질문은 그래서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가 결코 하나의 연결고리 속에 들어있지 않다는 것에 대한 불편한 성찰이기도 하다.     


지난 수년간 대한민국은 조국 전 장관의 가족들이 연루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 딜레마를 심도 있게 경험했다. 그러나 그 호된 경험에도 불구하고 검찰 개혁이라는 사회적 맥락과 개인의 도덕성이라는 개별 사안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과제로 남아있다.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나(자기)의 도덕성과 조국(타자)의 도덕성 사이 괴리는 건너기 힘들 정도로 깊다는 것이다.     


공정과 정의를 외치던 윤석열 대통령의 멀고 가까운 주변이 불공정한 인물들로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이다. 법망을 교묘히 피한 불공정의 흔적들이 자신의 발자국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고위 공직자 후보들은 여전히 “나는 조국과는 다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 역시 자신의 도덕성과 사회적 윤리 사이의 괴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 불평등의 기원이 노동 수익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자본수익이라는 피케티의 이론에 동조하던 진보적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주식이나 부동산이라는 자산을 통해 돈을 모았다. 한때 독재정권과 싸우며, 젊음을 바쳤던 일부 운동권 출신의 인사들도 크고 작은 부정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건들도 목격했다. 


도덕과 정의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논쟁 과정을 겪으면서 몇 가지 의문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개인적 도덕성과 사회적 정의 사이에는 어떤 인과 관계가 있는가? 둘째, 도덕적 삶이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이루기 위한 개인적 도덕성의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것들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매우 복잡할 수도,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의와 도덕에 관한 판단은 현실 세계에서는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하고 정량하기 힘든 논쟁으로 쉽게 이어진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 논쟁의 틈을 어설프게 파고들어 아전인수격의 주장하곤 한다.     


리 호이나키

이 책의 저자 리 호이나키는 위의 질문에 대해 매우 단순하고도 명쾌한 답을 가진 사림이다. 그는 철저한 도덕성의 기준 위에 살며 시종일관 자본주의에 맞서 도덕적 가치를 지키고자 했다. 자본에서 해방된 삶을 살기 위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 살면서 인간을 소외시키고 종속시킨다는 이유로 교육, 의료, 복지와 같은 현대적 복지제도도 거부했다.     


불행히도 이러한 저자의 실험적 삶이 위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정답일 수는 없다. 그가 이 책에서 써 내려간 삶의 행적이 과연 정의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인지에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도덕적 완벽주의자라는 칭송과 보수적 생태주의자라는 비난이 교차한다.      


도덕과 정의의 교차점에는 모든 것을 정리해주는 신호등이 없다. 그것은 비단 저자만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인생과 삶의 여정은 단순치 않고 대체로 호불호가 갈린다. 복잡한 삶의 여정은 개인과 집단 사이에 희미하게 연결되는 사잇길이며, 그것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욱 모호해지는 좁은 공간이다.     


저자 리 호이나키는 미국인이다. 일리노이주 링컨에서 태어났고, 해병대원으로 중국에서 근무했으며, 제대 후에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다. 이후, 맨해튼에서 사목활동을 하면서 남미 푸에르토리코에서 스페인어 공부를 했고, 1967년에 결혼과 함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중, 베트남 전쟁이 맞이했다.     


저자는 부당한 전쟁에 대한 반발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때 베네수엘라로 자진 망명하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대학교수로 강단에 섰으며, 노년에는 종신 교수직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 농부의 신분으로 살았다. 말년까지 경제주의/화폐 주위 사회에서 벗어난 실험적 삶이 그를 이끌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저자 역시도 인생의 노정에 수많은 의사결정의 굴곡이 있었으며, 그때마다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 책에서 그의 ’ 도덕‘은 ’ 정의’로 표현되었고, ‘벗어나지 않기’는 ‘비틀거림’으로 기술되었다.      


이 책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저자가 가지고 있는 ‘정의’에 대한 개념이다. 그의 정의는 철저히 개인적 차원에서 재단되었기에 그의 답 역시도 매우 단순해졌다. 도덕적으로 살면 그것이 바로 정의의 길이며, 도덕적인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단순한 결론은 의도치 않는 왜곡을 낳는다.     

”일자리 때문에 자신의 경쟁자를 파괴해야 할 필요성은 고용구조 그 자체보다는 그 사람 자신의 성격이나 야심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위계질서의 아랫부분으로 내려가게 되면, 투견의 이미지가 현실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상대를 공격하도록 싸움판으로 던져지기 전에 이 동물들은 이러한 과업을 잘 수행하도록 이미 사육되어 왔다. “     


시골로 내려가 대학에 일자리를 구하면서 얻은 사유를 정리한 호이나키의 이 말을 요약하자면 일단의 사람들 사이 경쟁으로부터 좌초되는 비극은 구조가 아닌 개인의 덕성의 문제이며, 덕성의 결핍은 사육의 구조가 아닌, 사육된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의 성찰 어디에도 구조에 대한 문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리 호이나키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가 경험한 세계에서의 투견들은 오히려 위계질서의 아랫부분이 아니라 윗부분에서 더 많이 발견되곤 한다. 또한, 투견과는 달리 인간은 싸움판에 던져지기 전에 사육된 것이 아니라, 싸움을 통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저자는 소위 ‘판’을 빼놓은 인간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덕에 대한 저자의 이런 태도는 매우 기형적인 정의관으로 이어진다. 베트남 전쟁에 반발하여 자진 망명을 결심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이러한 그의 기형적 정의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무렵 나는 미국이 아시아 땅에서 하고 있던 행동 때문에 내 나라에 대하여 깊은 혐오감을 느꼈다. 내가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계속해서 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두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미국의 부패가 그 당시의 정치지도자들보다도 더 뿌리 깊고, 더욱 광범위하게 만연해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는 국민을 반영하고, 국민의 덕성 또한 악덕을 공유하는 것이다. 워싱턴의 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안이하고, 그릇된 것이었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파괴 행위는 바로 미국인들 자신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나라에 충성하고, 건국의 아버지들의 고결한 이상에 충실하기 위해서 이러한 미국인들을 거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     


호이나키는 베트남 전쟁의 원인을 위정자들이 아닌 부패한 미국인 전체라고 보았다. 또한 전쟁을 포함한 국가의 정책은 국민들의 도덕성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을 중단하고 미국의 도덕성을 되찾는 동력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베트남의 비극을 멈추게 한 것은 바로 그가 그렇게 미워했던 ‘악덕을 공유한’ 미국인들이었다. 거리의 미국인들은 치열한 싸움으로 정부와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압박하여 결국 베트남에서 손을 떼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제3 국으로의 망명을 통해 ‘도피적 정의’에 도취해 있었다,     


기독교 성직자 출신답게, 호이나키의 삶은 17세기의 존 윈스럽이 미국을 향해 떠나기 직전 했던 ‘언덕 위의 도시’나 19세기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통해 주창했던 찰스 셀던의 ‘국가 언약 주의’, 그리고 ‘One man revolution’이라는 소로우의 꿈을 이어놓은 것과 같은 지극히 보수의 반석 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한편, 그렇다면 리 호이나키의 도덕적 삶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없는 것일까?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정치인들의 도덕적 타락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일침은 날카롭고 강렬하다.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하나의 기억을 더듬는다.     


“어느 날 밤 몇몇 학생들은 건물 신축에 필요한 굴착공사를 시작하려고 세워둔 불도저를 심하게 망가뜨려 놓았다. (...) 굴착공사를 하려던 사람의 불도저는 자기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빌려서 사용했다. 그는 그 기계를 수리할 돈도 없고, 다른 불도저를 마련할 여유도 없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는 이제 그의 유일한 소득원을 빼앗겨 버렸다.”     


개인의 도덕성이 배제된 정의의 위험성을 지적한 말이다. 개인적으로 유사한 경험이 있다. 1980년대 다니던 대학의 교정에서 목격한 사건이다. 민주주의와 정의의 실현을 위한 시위가 밤새 진행되었고, 지친 학생들은 새벽에 술을 마셨다. 늦은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깬 그들은 커피 자판기를 부숴버렸다.     


자판기 안의 커피들이 동이 나 있었고, 동전을 넣어도 커피가 나오지 않자 화가 난 총학생회 소속 학생 몇 명이 한 행동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 자판기는 퇴직한 한 노인이 노후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투자한 것이었다. 그날 아침 그 노인의 생계 인프라는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며칠 후, 힘없이 부서진 자판기를 치우던 노인의 모습에서 일종의 분노가 느껴졌다.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개인적 도덕성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당시 커피 자판기를 부수는 부도덕한 행위로 인해 나는 그들과 결별을 해야 했을까? 그것은 잘 모르겠다. 정의에 삶의 지표를 맞추어 놓은 사람들은 집단적 정체성을 해체할 수 있어야 한다.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적 집단, 심지어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의로 가는 길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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