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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Dec 16. 2021

'휴먼카인드' 신뢰하는 인간

책 속의 사람들

휴먼카인드

2020년 5월, 영국의 대표적 정론지 ‘더 가디안’은 네덜란드의 저널리스트인 32살 뤼트하르 브래그만을 “다보스를 뒤흔들고 ‘파리 대왕’의 진면모를 들어낸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브래그만이 다보스 회의를 향해 ‘아무도 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은 소방관 회의’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이 책 ‘휴먼카인드’에서는 그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왔던 인간 본성에 대한 통념 뒤집어엎기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 책 ‘휴먼카인드(Humankind)’는 브래그만의 전작인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과 일종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 미래를 위한 과격한 제안이라면, ‘휴먼카인드’는 그러한 제안에 인간의 본성적 이유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애덤 스미스가  자신의 사상적 포석에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대치시켜 놓은 것과 같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거나 게으르거나 나쁘지 않다는 것, 이것이 이 책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이며, 이 논쟁에 두 명의 철학자를 등장시킨다. 강력한 통치자가 없는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와 문명 자체를 부패를 향한 힘으로 간주했던 계몽주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바로 그들이다.     


“어느 철학자가 옳았는가? 우리는 과거의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감사해야 하는가? 아니면 과거에 우리는 고결한 야만인이었나? 그 대답에 엄청나게 많은 것이 달려 있다.”


저자는 1954년에 출판된 윌리엄 골딩의 오래된 고전, ‘파리 대왕 (Lord of the Flies)’로부터 홉스와 루소를 오가는 지적 논쟁의 주제를 추출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파리 대왕’은 섬에 좌초된 후 야만인으로 변해가는 영국 남학생들의 행동을 극화한 소설이다. 다분히 디스토피아적인 관점이 반영된 이 소설은 홉스의 편에 서서 많은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바 있다.     


저자는 이러한 대중의 공감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진다. 그리고 집요한 연구 끝에 쾌 쾌 묶은 ‘파리 대왕’의 실제 버전을 찾아내는데, 그것은 바로 1965년 남태평양 군도 왕국 통가에서 온 6명의 소년이 외딴 무인도인 아타 섬에서 난파되었을 때, 15개월 동안 벌어진 실화이다. 이 실제 사건은 소설 ‘파리 대왕’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었다.      


골딩의 소설에 등장하는 랠프, 잭, 피기와 같은 학교 친구들과는 달리, 실제로 아타 섬에 난파된 아이들은 구조될 때까지 생존을 위해 함께 일하고 협력하며, 고립된 상태에서 식량을 재배하고 빗물을 모으며, 운동과 불을 보존하기 위한 시스템 체계를 구축하는 등 매우 사회적이고 긍정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이 실화를 근거로 저자는 소설이라는 의도된 허구와는 달리 실제 인간은 선하고, 인류는 긍정적이며,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하게 된 핵심 동력 속에 경쟁과 이기심이 아닌 선함과 친화력과 우호성이라는 본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길든 유인원이다. 가장 친화적이고 성품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자식을 갖는 현상이 수만 년 동안 지속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종의 진화는 ‘가장 우호적인 자의 생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대중은 왜 그동안 인간의 본성에 대해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키워왔던 걸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심리를 정치화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자극적인 내용을 소재로 한 뉴스나 리얼리티 쇼가 대중의 ‘부정 편향성’과 ‘가용성 편향’을 자극하여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거짓에 스스로 동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1964년 퀸즈의 한 거주자가 이웃들의 방관 속에서 살해당한 사건에서부터 이스터섬의 살인자,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인지하게 만든 비극적인 사건 뒤에 숨겨진 전모를 살펴보면, 그 사건 자체가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의 동기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치 조직원은 나치 이데올로기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준칙을 위반하거나 동료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악의 편에서 싸웠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역사의 재해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는 많은 논란이 따라붙는다. 미국의 각종 잡지에 기고된 서평에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저자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 그 자체는 여전히 역사적 자리에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고 서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저자의 주장을 잘 못 해석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 ‘우정, 충성, 결속이 수백만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역사상 최악의 학살을 자행하도록 고무시킨 영웅적 투쟁’으로 정의돼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1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유대인을 가까이서 살해한 이동 학살 부대 아인자츠그루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에 있는 인종 살해와 그 협력자들을 볼 때, 우호와 협력으로 대변되는 ’ 우리‘에 대한 공감은 언제든지 ’ 우리가 아닌 ‘ 것에 대한 살인적인 적대감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며, 이는 저자의 주장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으로 인해 저자가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놓치게 되면 그건 독자들의 손해다. 저자의 진정한 관심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통계나 이스터섬의 살인자에 대한 이해를 넘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밀그램의 실험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사람들의 선함을 옹호하는 책을 쓰려고 하면 몇 가지 큰 도전 과제가 목록으로 주어진다. 윌리엄 골딩과 그의 어두운 상상력, 리처드 도킨스와 ‘이기적 유전자’, 재러드 다이아몬드와 사기를 꺾는 이스터섬 이야기, 그리고 살아있는 심리학자 중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짐바르도 등, 하지만 내 목록 맨 위에는 스탠리 밀그램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밀그램의 실험이란, 실험자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눈 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도록 강요한 유명한 심리 실험이다. 스탠리 밀그램은 자신의 실험에서 가해자 역할을 맡은 대다수 참여자가 피해자 역할을 한 참여자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상태에서도 가해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밀그램은 실험 결과를 토대로 인간 깊은 곳에 악의 속성을 지목한 바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실험의 과정과 결론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실험에서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이 실제 고통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하얀 가운을 입고 실험을 주도하는 주최 측의 의도를 사전에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의 실험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일종의 연출을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험에서 가해자들이 보여준 행동은 복종이 아니라 순종이었다는 것이다.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과 거의 동시에 아이히만의 재판 선고가 이루어졌는데, 저자는 이 선고를 기록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밀그램의 실험과 비교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우리가 무지의 복종을 통해 받아들이는 평범성이 아니라, 저항과 성찰의 전쟁터를 규정하는 경고라고 정의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가학적 본성을 언급한 밀그램의 시각을 비판한다.     


네덜란드어로 된 이 책의 원제목은 ’De Meeste Mensen Deugen’으로 '대부분 사람은 Deugen이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Deugen’이란 단어는 딱히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 책의 제목을 억지로 번역하자면 '깊은 곳에 있는 꽤 괜찮은 것'이나 '결국 좋은 것' 정도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억지로 번역될 수밖에 없는 ’Deugen‘이란 단어가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오히려 적절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 선’이라는 단적인 명사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우리 인간의 깊숙한 곳에는 ‘분명히 좋은 것’, ‘괜찮은 것’ 등등의 형용사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우리 자신의 죄 많은 본성을 믿는 것은 위로가 된다. 그것은 일종의 사면을 제공한다. 만일 대부분 사람이 나쁘다면 참여와 저항은 노력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 많은 본성에 대한 믿음은 또한 악의 존재를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증오나 이기심에 직면했을 때 당신은 ‘아! 그건 그냥 인간의 본성이야’라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본질에서 선하다고 믿는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는 참여와 저항에 가치가 있음을 의미하며, 행동할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한다.”     


마음을 가진 인간 윌과 악당 로봇 두외로

넷플릭스가 내놓은 공존의 히트작 중 하나인 ‘로스트 인 스페이스’에는 인간 윌과 악당 로봇 두외로가 대면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외로는 존재를 움직이는 마음의 실체에 대해 묻고, 윌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얻는다. 윌은 마음은 일종의 프로그램이지만 그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이미 죽었기에 스스로 어떤 마음을 가질지 선택하면 된다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두외로가 갑자기 윌의 심장을 찌른다. 그리고 마음이 죽었으니 너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말한다. 두외로의 입장에서 마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몸을 통제하는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본성의 문제인가? 아니면 선택의 문제인가? 이 영화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죄 많은 본성을 믿는 것이 결코 위로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죄의식이 전부 사면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먼 과거 속에는 죄의 본성으로 인해 평생을 괴로워했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우리의 가까운 역사 속에는 두외로 처럼 광주의 심장을 찌르고도 자유롭게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백신과 마스크와 두 얼굴

수년 전,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 결혼한 김소연 씨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 독일의 한 방송에 출연했다. 당시, 독일의 한 언론인은 한국민들의 높은 마스크 쓰기 동참률의 이유에 대해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김소연 씨는 한국인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마스크를 쓴다고 대답했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COVID-19로부터 지역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집에 머물렀다. 우리가 마스크를 쓰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에 의한 선택은 한 가지 현상으로 수렴된다. 정치란 바로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를 둘 다 만족시키는 어려운 작업이다.     


지젝은 “우리는 민얼굴이 아닌 마스크를 한 얼굴에 더 많은 인간성이 있다는 사실을 엄중한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지젝이 말한 ‘인간성’이라는 단어에는 인간 본성의 선함에 대한 근본적 믿음이 깔려 있다.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말할 때에는 바로 인간의 ‘분명히 좋은 것’, 또는 ‘괜찮은 것’이 전제되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 속에도 그러한 것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집단 지성과 자기 충족적 예언

내년에 한국에서 실시될 대선에 나서는 한 정치인은 기본소득을 자신의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이의 실행은 절대적으로 국민들의 집단 지성에 의존한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집단 지성이 언제나 올바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에 대한 믿음은 민주주의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폴 우드러프는 ‘최초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불신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한편, 도쿄대학의 법학 정치학 교수이자 일본의 대표적인 헌법학자인 하세베 야스오 역시도 헌법은 국민들의 이기주의를 견뎌낼 수 있는 일종의 안전장치, 즉 개헌의 난이성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보면 민주주의는 단순히 시민에 대한 불신과 이기주의에 대한 안전장치로만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란 인간의 ‘부정적 측면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제도’이다. 이를 인간 본성의 문제로 번역하자면 민주주의는 악에 복종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선으로 가장한 악의 유혹이 두려운 것이다.     


저자 브래그만은 1999년 벨기에에서 있었던 코카콜라 사건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작동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코카콜라를 마신 천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식중독에 걸린 것으로 오인되어 107년 역사상 최악의 재정적 위기를 안겨준 이 사건은 마침내 코카콜라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전형적인 노시보 효과가 작동된 부작용이었던 것이다.     


“코카콜라 사건은 오래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진실이란 무엇일까? 당신이 그것을 믿든 믿지 않든 어떤 것은 진실이다.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흡연은 건강을 해친다. (...) 또 다른 것들은 당신이 그것을 믿는다면 진실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믿음은 사회학자들이 일컫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된다. 만약 당신이 은행이 파산하리라 예측하고 많은 사람에게 계좌를 해지하도록 설득한다면 해당 은행은 파산할 것이 분명하다.”     


이를 민주주의 체제에 적용해 보자. 오래전 한 공무원이 국민은 다 개돼지라고 말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물론 국민을 개돼지로 간주하고 국가 정책을 펼 수도 있다. 반면 국민의 집단 지성에 대한 믿음을 중심으로 제도를 조정해 나갈 수도 있다. 헌법은 일부 시민들의 이기심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지만 변해가는 정의와 공정, 자유와 권리의 개념에 따라 수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많은 권력자가 모든 사람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이기심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권력자는 내심 코로나로 인한 지원금을 받아 챙기는 시민도, 516의 광주 시민도, 세월호의 가족도 모두 이기적인 사람들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받은 인상에 따르면 엘리트가 공황에 빠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권력을 가진 자들이 모두의 인성이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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