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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없는 책방 Mar 10. 2019

베일 너머의 두려움

#개님의 책읽기 9

<출처 알라딘>

<인생의 베일>, 서머싯 몸, 황소연 옮김, 민음사

키티의 불륜 현장을 급습하며 시작하는 이 소설은 그녀의 두려움을 비춘다. 과연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알지 못함에서 온다. 베일 너머에 어른거리지만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제목과 일맥상통한다. 베일을 헤쳐가며 살기엔 키티나 월터뿐만 아니라 우리조차 쉽지 않다. 이에 앞서간 이들이 걷어놓은 베일을 좇아 그 뒤를 따른다. 한 길인 줄 알았던 길을 걷다 보면 수많은 갈래를 만난다. 남녀의 다른 길, 나이마다 다른 길 등등. 저 베일 너머를 향한 호기심은 이내 두려움에 굴복하고, 발자국이 남아있는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결혼과 출산이 인생의 목표이자 의무로 설정되어 있는 그 시대의 여성은 대부분 금욕과 함께 내조, 헌신, 희생으로 둘러싸인 길을 걷는다. 그 과정에서 사랑에 대한 생각은 금지된다. 저 너머의 다른 길을 궁금해하기라도 하면, 남은 길은 메이탄푸로 향하는 길 밖에 없어 보인다.

등장인물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과정 안에서 주인공들은 사랑에 대해 생각하거나 서로를 위하는 것보다 자신이 택한 길을 계속 걸어 나감에 충실하고 이게 맞는 것이라는 데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그나마 키티에게는 찰스가 등장하여 본인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만, 그저 이용당하기만 할 뿐이다. 키티는 그저 찰스에게 돌부리에 불과했다.

키티가 자신의 길(결혼)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조바심과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 밖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돈만 축낸다는 죄책감.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살았는데 결혼은 못했다는 좌절. 동생에 대한 부러움 등의 감정들이 섞여 잘못된(결과적으로) 선택을 하고 만다. 그렇게 키티는 개에게 물린다. 아마 월터를 택하지 않았더라도 남들, 특히 동생에 부러움과 시샘으로 주변을 제대로 살필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홍콩을 떠나 메이탄푸로 가게 된 키티는 수녀들의 삶을 목격한 이후 삶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하고 이내 그들의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했음을 알게 되고 다시 자신이 걸어온 길로 돌아온다.

이는 월터의 죽음(혹은 이별)을 앞당기는 역할을 한다. 책에 서술된 바에 따르자면 찰스의 아이로 밖에 설명이 안되고 아마 월터와 키티도 알고 있었으리라 본다. 이로 인해 월터의 괴로움은 극에 달한다. 그의 무조건적이지만 일방적인 사랑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시점에서 이미 끝이 났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견딜 수 없던 월터의 질투와 자존심은 그를 목 조른다. 메이탄푸에 와서 제대로 먹지도 않고 연구에만 몰두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월터는 눈을 감으면서 결국 '죽은 것은 개'라는 말을 남긴다. 단테의 연옥을 알고 있었을까. 키티를 창밖으로 던지지 못해 그 자신을 내던졌다. 노력하는 자신이 고통 받음에 대한 억울함이 담긴 말로 들리기도 한다. 허나 사랑은 헌신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내 노력에 상대가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상대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리고 과연 월터가 키티의 조바심을 이용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걸 알기에 차마 키티를 내던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개가 되었다.

반면 메이탄푸의 수녀들은 주인공 부부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고, 남과 다른 길을 걷는 대표적인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키티에게 '당신의 자리는 월터의 곁'이라는 말을 한 걸로 보아 당시의 여성상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한계 또한 가지고 있다. 그저 헌신하는 대상이 다를 뿐. (이는 애초에 책이 가지고 있는 한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선택할 수 있는 최대한을 보여준다. 피드백이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아이러니 하지만, 그래서 더 그러한 삶이 가능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월터는 실패했다.)

키티는 남편이 죽은 이후, 임신 상태로 메이탄푸를 떠난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기 전 도로시의 호의로 머무는 며칠 동안 그는 다시 찰스의 유혹에 빠지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움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한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키티. 자신과 동일하게 의무감으로 고통받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이제야 자유로워지는 모습을 본다. 자신과 같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를 구하지만, 차마 아버지는 이를 저버릴 수 없어 끝내 손끝에 닿을 듯한 베일을 걷어보지 못하고 돌아선다. 키티도 이를 알기에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다.

이제 두 부녀의 삶은 어떻게 될 것 인가. 그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주성을 획득하는 데에 노력하겠구나 라는 예상을 할 뿐이다. 과연 키티는 두려움을 딛고 서서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을까. 그 길에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는 있을까. 응원하는 마음이지만, 마음 한구석 불안함이 아직 베일 너머에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관통하는 내용은 워딩턴이 해준 길에 대한 말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여인으로부터 기인한다. 키티도 그 점을 보았기 때문에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다. 자신이 가지 않은, 가지 못한 길을 걷는 여자.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다. 그 여자처럼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만이 두려움을 이기고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책을 읽고나니 허탈한 마음과 갈증이 느껴진다. 시대적 배경으로만 따지면 10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세상은 빠르게 변하면서도 너무 변하지 않는다. 나는 키티와 무엇이 다른가. 책을 읽는 내내 입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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