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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May 18. 2024

대구 여행기 2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숙소에서 잠깐 쉬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걸리버 막창'이라는 인기 많은 막창집에 가기로 했다. 웨이팅으로 유명한 곳인데 5시가 좀 넘은 시간에 가니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사실 막창을 먹는 건 나에게 도전이었다. 이전까지 막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대학생 때 곱창만 한두 번 먹어봤다. 평소에 이런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다른 맛집을 갈까도 생각해봤지만, 대구까지 왔는데 막창을 지나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먹어보기로. 무슨 맛인지 궁금하니까!


첫 주문은 기본 3인분부터라 막창 3인분과 된장찌개를 주문했다. 처음에 구워 먹으라고 쫀드기를 같이 내준다. 아아, 추억의 쫀드기. 이게 그렇게 맛있다고 하더만 나에게는 불량식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지 딱히 손이 가지는 않았다. 대신 알배추를 와그작와그작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곧이어 등장한 초벌 된 막창.


지글지글 익는 중


남편이 앞뒤로 구워서 앞접시에 한 점을 놔주었다. 양념장에 푹 찍어 냠냠. 우물우물.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남편.


"어때 어때?"


나는 열심히 맛을 음미하며 대답했다.


"와, 이래서 막창 먹는 거구나. 고소하고 쫄깃쫄깃한 게 진짜 맛있잖아!!!"


...라고 하고 싶었지만.


"음, 맛있네. 이런 맛이구나."


...라고 다소 무미건조한 대답을 하며 야릇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맛도, 식감도 역시나 내 취향은 아니었다. 건강을 생각해 잘 먹지는 않지만 차라리 삼겹살이 훨씬 맛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막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떤 느낌으로 좋아하지는 알겠더라. 식감도 재밌고 고소한 매력이 있었다. 굳이 다시 먹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맛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던 즐거운 식사였다. (남편은 맛있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오락실에 들어갔다. 동성로에는 큰 오락실이 많다. 우리가 좋아하는 '틀린 그림 찾기'를 찾다가 럭비공 게임 기계를 발견했다. 농구공 던지기는 해 봤는데 럭비공 던지는 기계는 처음 봤다. 럭비공을 던져 크기가 다른 구멍 3개에 넣어 점수를 매기는 게임. 대결을 좋아하는 우리가 지나칠 리가 없다.


사진에서 느껴지는 승부욕


나부터 시작. 열심히 쉬지 않고 던지는데 처음에는 안 들어가다가 요령이 생기니 몇 개가 쏙쏙 들어간다. 진짜 재밌었다. 남편은 처음에 엄청 잘 넣다가 갈수록 감을 잃었다. 첫 끗발이 개끗발이었다. 나의 승!


다시 놀거리를 찾아 거리를 누비다 사진관에 가서 요즘 많이들 찍는다는 항공샷도 찍어보았다. 패션 안경도 하나씩 장착했다.


90년대 신인 듀엣 가수 느낌인데


재밌는 사진이 나오긴 했지만 항공샷 찍는 거 비추다. 카메라가 천장 한쪽 구석에 위치해 있을 줄 알았는데 천장 한가운데에 있어서 고개를 있는 대로 젖혀야 했다. 생각보다 힘든 각도에 당황해서 다양한 포즈를 하지는 못했다. 다른 지점은 다를 수도. 그래도 항공샷은 한 번으로 충분한 듯하다.


하루 종일 엄청 돌아다녔더니 슬슬 다리가 아파진다. 하지만 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우리는 스파크랜드로 향했다. 스파크랜드는 동성로에 위치한 큰 테마파크다. 한 마디로 거대한 오락실 건물. 실내형 스포츠와 어트랙션을 즐길 수 있고, 옥상에는 관람차가 있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건물 위에 거대한 대관람차라니, 서울에서는 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라 꼭 타보고 싶었다. 심지어 관람차 안에서 노래도 부를 수 있다. 입장료는 노래방 되는 관람차인 경우 2인 18,000원.


서울에도 있으면 좋겠다 (근데 있어도 한 번 타고 안 탈 듯...?)


타기 전부터 무슨 노래 부를지 고민고민. 첫 곡으로 같이 쿵따리 샤바라를 불렀다. 나이가 나온다. 목감기가 다 낫지 않은 상태라 노래는 주로 남편이 부르고 나는 옆에서 어깨춤만 췄다. 노래 부르면서 야경 보면 재밌겠다 싶었는데 막상 타보니 노래에 집중하느라 창 밖 풍경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도 15분 정도로 짧아서 그냥 일반 관람차를 타고 야경에 집중하는 게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다. 노래방은 코인 노래방을 따로 가면 되니까. 그래도 이색적인 경험이라 둘 다 신났다.


노래 부르면 15분이 후딱 갑니다


대구여행 가면 관람차는 한 번쯤 타볼 만한 것 같다. 꽤 높이 올라가서 대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야경을 즐기기 좋다. 남편은 노래 부르느라 야경을 하나도 못 봤다고는 했지만.


어느덧 저녁 8시.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 코스만이 남았다. LP 바에서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미리 열심히 검색해서 평이 좋은 바를 골라놓았다. 골목골목을 돌며 찾아갔는데 아뿔싸, 아쉽게도 만석이었다. 어쩌지? 카페라도 가야 하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며 '어디 가지?'를 반복하다가, 아까 잠깐 후보에 올랐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칵테일바에 가기로 했다. 이건 신의 한 수였다. 대구에서 제일 좋았던 곳이다.


별 기대 없이 갔는데, 들어서는 순간부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 여기 대박이다."


오른쪽 사진에 나온 테이블에 앉았는데 자리 너무 좋았다


'문학이 흐르는 바'라는 명성답게, 문학과 관련된 소품들이 정말 많았다. 벽면에는 비디오와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었고, 다이어리, 스티커, 피규어 등 추억의 물건들이 한가득 있었다. 사장님이 팬이셨는지 특히 슬램덩크와 관련된 소품들이 유독 많이 보였다. 실로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이걸 다 어떻게 수집하셨을까?


맥시멀리스트 끝판왕


어딜 봐도 흥미로운 것들 투성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엄마랑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 빌려보던 기억이 새록새록. 월별로 받아보던 두꺼운 만화책도 보인다. SES와 서태지 사진들까지. 나 시간 여행 중인가?


어릴 때 비디오 가게 가는 거 좋아했는데.. 추억 돋네


쉬지 않고 두리번거리며 감탄하던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칵테일을 주러 오신 여자 직원분께 슬쩍 물어보았다.


"이거 다 사장님이 수집하신 거예요?"


"네. 다 사장님이 모으신 물건이에요."


"와아-"


사장님은 열일 중


중년의 남자 사장님은 바에서 열심히 칵테일을 만들고 계셨다. 도대체 얼마나 문학을 사랑하신 걸까.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을 어떻게 이런 특별한 바로 맺을 생각을 하신 걸까. 아마도 하나 추측컨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셨나 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의 원제가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한다. 마침 내가 앉은자리 바로 옆에도 <상실의 시대> 책이 놓여있었다. 나는 무알콜 칵테일을 마셨지만 분위기에 흠뻑 취해버렸다.


심지어 칵테일도 맛있다구요


너무 좋았던 시간. 유독 기억에 남는 시간.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바와 맛있는 칵테일, 눈을 즐겁게 하는 소품과 사랑하는 남편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하루종일 살짝 긴장하며 다녔던 몸이 평온함으로 나른해진다. 아까 처음에 갔던 LP 바에 자리가 있었더라면 이런 순간을 누리지 못했겠지. 역시, 때로는 계획하지 않은 일이 나를 더 재밌는 길로 인도해 주기도 한다. 언젠가 대구에 또 가게 된다면 꼭 다시 가고 싶은 곳.




둘째 날은 가벼운 일정으로 마무리했다. 오전에 수성못에 가서 산책을 하고, 점심으로 인도 커리를 먹었다. 첫날 열심히 돌아다녔더니 둘째 날에는 수성못을 가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수성못은 동성로에서 지하철로 20분 정도 걸리는 지역에 있다. 연못 둘레를 빙 둘러 길이 나있어 산책하기 좋았다. 초록초록 자연을 보며 힐링할 수 있는 곳.


연못가에 예쁜 노란 꽃이 폈다


원래 저녁에 뭉티기 맛집에 가기로 했었는데, 둘 다 뭉티기가 그다지 당기지 않아 결국 가지 않았다. 대신 기차 시간을 조금 당겨 동네에 와서 맛있는 일식을 먹었다.


당일 여행으로 갔어야 했나 싶다가도, 그랬다면 전날 밤에 노르웨이의 숲에 못 갔을 테니 1박 2일로 다녀오길 잘한 것 같다. 여행이 끝난 건 아쉽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니 괜스레 더 좋다.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으니 또 재미나게 살아야지. '노르웨이의 숲' 사장님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애정 듬뿍 담으면서, 내 열정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맺으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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