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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Jul 03. 2024

생일의 끝을 잡고

(사진과 묘하게 어울리는 제목인데)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는데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려 집에서 조용하게 보내야 했다. 평소에는 혼자 책 읽고, 명상하고, 공부하고, 유튜브도 보고, 이것저것 하면서 잘 노는데 어제는 이상하게 뭘 해도 재미가 없었다. 밖에 나가볼까 했지만 비를 뚫으며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비가 와서 날이 흐려서였을까 아니면 생일 전에 마음이 심란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의 감정적 여파가 남아서였을까. 기분이 자꾸 처져서 나를 다독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어 유튜브로 어떤 대만 로맨스 영화 몰아보기를 봤다. 재밌게 잘~ 보다가 결말에서 김이 팍 샜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 타이밍이 안 맞아서 여주가 결국 다른 남자하고 결혼하고 남주는 보내주는 결말이었다. 아니, 지금 해피해피해피엔딩을 봐도 기분이 나아질까 말까인데 장난치나. 잘못 골랐다. 역시 영화든 드라마든 해피엔딩이 좋다, 나는.


기분이 꿀꿀한 와중에 나를 즐겁게 해주는 일들도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생일 축하한다고 연락해 준 몇 명의 지인들. 참 고마운 존재들이다. 스타벅스 케익도 받고, 스타벅스 상품권도 받고, 올리브영 기프티콘도 받았다. 생일에만 누릴 수 있는 묘미다. 축하 메시지와 함께 안부를 묻는 것도 재밌었다.


'잘 지내고 있어? 나 여기로 이사했어. 너는 다시 본가로 들어갔구나. 아기 키우는 건 어때? 너네 회사 근처에 거기 좋던데 가봤어?'


그리고 언제나 마지막은


'나중에 꼭 보자!'


국룰이다.


또 다른 즐거움. 남편이 퇴근하며 사온 예쁜 해바라기꽃.


샛노란 꽃잎이 너무 예뻐


남편이 종종 꽃을 사 오는데 해바라기꽃을 사 온 건 처음이다. 왜 해바라기를 사 왔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말했다.


"우리 집에 어울릴 것 같아서. 꽃말도 좋아. '당신을 영원히 숭배하겠습니다' 이런 뜻이던데."


"오, 나한테 하는 말인가? 나를 숭배하겠다?"


"그렇지."


그래, 좋아. 숭배하라! 생일왕을.


활짝 핀 해바라기꽃이 좋아서, 꽃말이 좋아서, 꽃을 사 온 남편이 좋아서, 움츠렸던 내 마음도 그때서야 조금씩 펴지는 것 같았다.


생일 외식 찬스는 지난주 금요일에 오마카세를 먹는 것으로 당겨 쓴 터라, 어제는 외식을 하지 않고 집밥을 먹었다. 메뉴는 표고버섯이 들어간 들깨 미역국. 남편이 맛있는 미역국을 끓여주겠다며 미리 장도 봐놨다.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덜어내고 다시 간을 맞추고 있는 남편


국물색만 봐도 벌써 맛있쟈나


미역국은 성공적이었다. 진-짜 맛있었다. 둘 다 계속 감탄하면서 먹었다. 작년에 남편이 끓여준 미역국보다 훨씬 맛있었다. 유기농 표고버섯을 써서 그런가? 딱 내가 좋아하는 맛이라서 남김없이 먹었다. 조만간 또 해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저녁에는 잠깐 비가 그쳐 집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와서 남편의 편지를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카드 안에 빼곡히 적힌, 정성스레 꾹꾹 눌러 쓰인 글자 하나하나가 날 안아주었다. 위로받았다. (남편은 내가 울 것이라 기대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울지는 않았다... 눈물은 살짝 고임)




작년 생일에는 뭐 했더라. 재작년 생일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달력이나 휴대폰 앨범을 봐야 알겠다. 2024년의 생일은 자세히 기억하기 쉬울 것 같다. 하루 지나긴 했지만 이렇게 기록을 남겼으니까.


조용하고, 심심하고, 나를 계속 들여다보고, 동시에 소소하게 기쁘고, 편안하고, 감동했던 생일이었다. 1년 후에 나는 뭘 하고 있을까. 내년에는 좀 더 신나는 생일을 보낼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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