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 불량 빈혈을 동반한 발작성 헤모글로빈뇨증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으레 그렇듯 처음에는 단순했다. 만성 피로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있는 거고, 조금만 걸어도 유난히 숨이 차는 건 최근에 불어난 체중 때문인가 보다 했다. 어서 운동을 해서 살을 빼야지. 마음을 먹고 작심삼일을 반복하는 채로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오랜만에 친한 언니 커플을 만난 자리였다. 요즘 날이 더워서 그런지 얼음 밖에 안 땡겨, 카페에 앉아 무심히 떠들며 음료를 다 마시고 남은 얼음을 아작내고 있었다. 병원에서 일하는 애인 분이 내 모습을 유심히 보더니 혹시 빈혈인 거 아니냐고 했다. 얼굴과 입술이 너무 하얗고, 빈혈 증상 중에 얼음을 유독 많이 섭취하는 것도 있다며.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기를 권했다.
동네 내과에 가서 피검사를 맡길 때까지도 가벼운 마음이었다. 철분이 좀 부족하다고 나오려나, 철분제 먹고 만성 피로가 좀 나아지면 좋겠네, 정도의 마음. 의사도 외견상으로는 크게 빈혈인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 느슨한 평화가 팽팽해지기 시작한 건 다음 날 아침 병원 문이 열리자마자 걸려 온 한 통의 전화가 시작이었다.
여기 ○○내과인데요, 원장님이 오늘 꼭 병원에 들리시라고 합니다. 꼭 오세요.
적혈구는 정상치의 절반이고 혈소판은 오분의 일도 안 된다고 했다. 범혈구감소증. 의사는 어제와는 정반대의 심각한 분위기로 바로 신촌세브란스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고 진단서를 끊어 주었다. 이틀 후로 예약 날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 있으려니 이번에는 세브란스에서 전화가 와서는 피검사 결과지의 자세한 수치들을 물었다. 그러더니 “내일 바로 오셔야겠는데요.”라고 말하며 예약 날짜를 바꿔주었다.
다음날 바로 세브란스로 가 피검사를 다시 하고, 수혈을 받고, 그다음 날에는 골수 검사를 하고, 그다음 날 1차 결과를 듣고,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CT를 찍고... 서대문구에 삼십여 년을 살면서 한 번 가볼 일도 없던 신촌세브란스 암병원을 일주일 내내 들락날락 거리며 온갖 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모두 정상. 특별히 감염된 질병도 없고 장기도 다 멀쩡하다고 했다. 세브란스의 의사는 이런 경우 재생 불량성 빈혈일 확률이 있다고 했다. 친절하게 직접 펴서 밑줄을 그어주며 보여주는 재생 불량성 빈혈 안내서에는 ‘90%는 발생 원인을 모른다.’고 적혀 있었다.
대한혈액학회에서 발간했다는 그 책자를 인터넷에서 찾아내 다시 읽어보니, 그나마 원인이 밝혀진 경우도 HIV 감염이거나 방사선, 발암물질에 장기간 노출 등 흔하지 않은 경우라고 나와 있었다. 감염은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 뭐지, 예전에 분자생물학 랩에서 일할 때 노출됐나, 일 년 넘게 머리를 탈색하고 다녀서 그런가, 온갖 생각이 다 들었지만, 병원도 모른다는 걸 내가 알아낼 수는 없었다. 일단 받아온 스테로이드제를 열심히 열흘간 챙겨 먹고 다시 찾은 병원에서 드디어 정확한 진단명을 알 수 있었다.
적혈구 막단백인 glycosylphosphatidylinositol(GPI) 생성에 관여하는 PIGA(Phosphatidylinositol glycan class-A)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하는 발작성 헤모글로빈뇨(Paroxysmal nocturnal haemoglobinuria)증이 양성이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희귀 난치성 질병을 가진 환자가 되었다.
앞으로 매주 한 편씩 제 투병기를 올릴 예정입니다. 저도 처음 겪는 일이라 얼떨떨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일기로 기록해가며 이겨 내보고자 합니다. 다소 특수한 정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