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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Sep 09. 2022

희귀병 환자가 되었다 5: 질병과 함께 살아가기

질병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발작성 야간혈색소뇨증도 그렇고 재생 불량성 빈혈도 그렇고, 쉽게 치료되는 병은 아니라고 한다. 몇 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아도 다시 재발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나는 이제 평생, 죽을 때까지 이 질병을 신경 쓰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적부터 동생들이나 또래 친구들에 비해 건강한 편이었어서 스스로의 건강을 약간 자신하고 살아왔다. 몸치라 활달한 운동을 열심히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올 정도의 지구력은 있고, 유행성 질병이 창궐할 때마다 한 번도 감염되지 않고 감기에도 잘 안 걸리며 어쩌다 걸려도 약 먹고 하루 푹 자면 금방 낫는 정도의 건강은 갖춘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살았다.

   

 그런데 이제 희귀병 환자가 되었다. 유전자 돌연변이가 원인이라 정확한 발병 인과관계도 알 수 없고, 며칠 약 먹으면 낫는 병이 아니라 평생을 꾸준히 관리해줘야 하는 병에 걸렸다. 이십 대 때는 일부러 지하철 몇 정거장 거리를 걸어 다닐 정도로 산책을 좋아하던 내가 이제는 집 앞에 나가는 일도 버겁고, 밤새워 소주를 마시고도 잘 안 취하던 내가 이제는 맥주 한 모금 삼키는 일도 조심스럽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절망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추석 연휴 첫 날을 맞아 여유를 즐기고자 오랜만에 다시 꺼내 든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 선생님의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마침 질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을 차례였다. 김보통 소설가의 『아만자』에 대해 쓴 글이었다.     


 삶이 생사로만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생·로·병·사다. 시간은 나이 듦과 병듦으로 채워진다. (중략) 누구나 아프고 죽는다. 슬프고 두려운 것은 ‘인간’이어서 그렇다. 인간은 의미 중독자다. ‘자연’이라면 순리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나 안도감이 아니라 의료 보험 개혁뿐이다. 아프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아픈 사람을 루저로 대하지 말자. 어차피 우리는 자연에서 다시 만난다.     


이어지는 다음 장은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윤리 중 하나는 고통받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대개는 자기 몸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다. 나도 지병이 있는데, 이전의 사고방식은 “다 나은 다음에 책 쓰기, 여행, 운전 배우기, 운동을 하자.”였다. 아픈 시간은 삶의 대기실, 의미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몸이 가르쳐주었다. 병은 낫지 않았다. 도대체 완치는 누가 만든 말인가. 죽을 때까지 재발되지 않을 뿐 어떤 병도 완치되지 않는다. 세상은 아픈 사람과 안 아픈 사람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완벽하게 건강한 몸은 없다. 아픔의 차이가 사람의 차이다. 이 차이는 위중 여부가 아니다. 아픈 사람마다 증상과 기능이 모두 다르다. 앞에 쓴 심장마비, 고환암, 우울증, 자궁암이 다른 질병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문제는 같은 병도 증상이 다르며, 정반대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이다. 같은 사람도 매분마다 증상이 다르지 않은가. (중략) 의학이 환자를 분류하는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진단 범주는 질환(disease)에 쓰이는 것이지, 질병(illness)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생과 사가 두려운 것은 인간이어서이고, 자연이라면 순리다, 죽을 때까지 재발되지 않을 뿐 어떤 병도 완치되지 않는다…. 마치 그만 궁시렁거리라는 듯 타이밍 좋게 나타난 이 글을 읽고 더 이상 내 병 때문에 절망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야말로 병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일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병은 내가 가진 나의 특징 중 하나일 뿐이다. 어차피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면, 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리라. 이 연재도 그 시도 중 하나가 될 수 있겠다. 나는 질병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매주 한 편씩 제 투병기를 올리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 겪는 일이라 얼떨떨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일기로 기록해가며 이겨 내보고자 합니다. 다소 특수한 정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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