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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지나온 시절은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by 이사라

보통은 아무 생각 없이 잊고 지내지만요, 가끔 이런저런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멍하니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죽었어도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며 그 사람들을 추억하고 싶습니다.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낱낱이 떠올리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들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글로 써 놓으면 그들이 글 속에서나마 존재하는 듯이 여겨지지 않을까요? 내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그들을 만났고, 그들은 떠나보냈으니, 그들에 대해 추억하는 것은 곧 나의 지나간 시절에 대한 추억도 되겠지요.


요즘은 건망증이 늘어가고, 점점 무언가를 자꾸 잊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몇 년 후에는 잊을지도 모르겠어요. 요 몇 년 사이에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냈고, 시어머님도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셨지요. 친구 두 명이 암으로 우리 곁을 떠났고, 올해 초에는 시동생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답니다. 모두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을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영원히. 다시는. 만날 수 없다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한번 지나온 시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사무치게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습니다.


친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일 년쯤 지났을 때, 새엄마가 오셨지요, 그때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그 시기에도 나는 두 사람을 연거푸 잃었는데, 친엄마와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였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개월 후에 언니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마와 언니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던 적은 있습니다. 몇 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나긴 하지만 별로 없더군요. 시간은 과거로부터 끊김이 없이 그때에 이르렀을 테이고, 그 과거는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을 테인데, 그것이 그대로 암흑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왜 난 엄마에 대한 기억을 그렇게 모조리 잃고 만 것일까. 새엄마가 미울 때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해야 할 엄마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랬다면 나도 사랑을 받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어리광을 부리며 떼를 쓰던 그런 시기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을 텐데. 어린 시절 기억나는 것은 새엄마의 눈치를 보며 자랐다는 것.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렇게나 정이 들지 않다니... 하며 새엄마의 쌀쌀한 표정을 견디며 지냈던 기억뿐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도 이젠 나이가 들어 아주 외로운 노인이 되었으니까요. 내가 어쩌다 하는 전화에도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우리 딸, 우리 딸 하며 부르는 목소리는 얼마나 정다운지, 예전의 새엄마가 아닌 진짜 나의 엄마가 되었답니다. 나는 커서도 엄마를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자라고 보니 엄마는 늙었고, 예전의 엄마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늙고 허약하고, 외로운 그런 엄마로 변해서 미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에겐 고우나 미우나 나를 키워주신 엄마가 계실 뿐입니다.


나에게 떠오르는 가장 최초의 기억은 장독대 위에 대야를 놓고 세수하던 어느 때입니다. 그때, 친엄마가 나의 얼굴을 씻기시면서 "우리 아가"라고 불렀는데, 내가 " 난 아가 아니야, 사라야, 사라라고 불러."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가 세 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 이후 난 더 이상 아가라고 불리지 않았는데, 한편으로는 무척 섭섭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 여름날, 엄마가 대청마루에 앉아 동네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를 낳을 때 갑자기 배가 아팠다고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고 '나는 다리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니구나' 하고 안심했었던 기억도 납니다. 사촌 오빠들이 못생긴 나를 다리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리곤 했으니까요.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추운 겨울에 치마를 입고 학교에 가겠다고 떼를 쓰다가 엄마한테 혼났던 기억도 납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은 엄마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엄마는 시장바구니를 들고 골목을 나가셨는데, 나는 엄마를 쫓아갔습니다. 엄마는 아주 슬퍼 보였고, 왠지 집을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쫓아가는 나를 세우고 엄마는 지폐를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언니와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고 하셨지요. 그 돈을 받지 않고 끝까지 쫓아갔다면 엄마는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하지만 기억이란 너무 오래되면 믿을 수 없이 희미해지게 되니까, 그것이 실제 있었던 것인지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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