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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런마음황구 Mar 26. 2021

나의 그리운 남의 고향 답사기
#3 5일장 데이트

 

 매월 2와 7로 끝나는 날 그러니까 2일, 7일, 12일, 17일, 22일, 27일 아침이면 외할머니 따라 밖을 나선다. 울진5일장 장날이다. 


 철철의 농산물과 해산물이 난전에 와르르 펼쳐진다. 다양한 볼거리에 똥강아지마냥 흥이 오른다. 특히 친가와 외가 둘 다 어업에 종사하지 않았던 터라 내겐 영 익숙지 않은 울진의 어촌다운 면이 여기저기 슬쩍슬쩍 드러나는 게 재미있다. 이를테면 생선을 옷걸이나 전봇대 같은 데 무심한 듯 시크하게 걸어놓고 판다거나, 그렇게 걸린 생선을 마치 세탁소에서 옷 내리듯 장대로 척척 내리는 장면들, 그리고 산나물 파는 할머니가 물미역 담은 바가지도 곁에 함께 두고 장사하는 모습도. 



 다 아는 농작물들도 희한하게 5일장에서 만나면 퍽 새롭다. 대형 마트의 인공조명 아래에서는 잘 도드라지지 않던 작물 고유의 색감이 여기 햇빛 아래 난전에서는 가감 없이 드러난다. 호박도, 가지도, 양대도, 두릅도 새삼 신기하게 들여다보며 그 때깔과 자태를 감상한다. 이따금 작물이 쨍한 민트색 소쿠리나 선명한 붉은색 함지박에 담겨 보색 대비까지 이루면 정말이지 미술 작품이 따로 없다. 


 이거저거 모두 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에 닥치는 대로 셔터를 누르다 보면 난전의 할머니들이 문득문득 별나다는 듯 쳐다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앞장 서 가던 우리 외할머니가 뒤돌아 날 스윽 가리키며, “내 손녀딸이라요.” 점잖게 한마디 하신다. 보디가드 같다. 멋있다. 현지인 위엄 뿜뿜. 어쩌다 아는 분과 마주치면 손녀딸이라는 소개말에 우리 엄마 이름이 더해지기도 한다. “야가 중기 딸이다. 중기 막내이”. 엄마, 여기서는 엄마가 아직 이름으로 잘 불리네요. 살면서 ‘누구 엄마’ 소릴 듣지 ‘전중기’ 세 글자 이름 들을 일이 거의 없잖아요. 고향이란 이런 데인가 봐요. 


 새벽부터 북적이던 장이 한낮에 가까울수록 잦아들고 나는 다시 외할머니를 뒤따라 쫄래쫄래 집으로 돌아온다. 외할머니가 보행기 겸 장바구니 삼아 밀고 다니는 손수레 안에는 천 원짜리 몇 장씩을 건네고 산 이런저런 반찬거리가 들어있다. 정작 당신께서는 신물이 올라온다며 잘 안 드시는 고등어가 검은 비닐봉지에 꽁꽁 싸인 채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때도 많다. 나 구워 먹이겠다고. 갑자기 짐 싸 들고 와 얹혀살면서 끼니 수발을 들게 만드는 외손녀가 뭐 이쁘다고. 가슴이 찌르르 울린다. 


 할머니, 내가 저번에 할머니 없이 장 구경 가보니깐요, 영 못 쓰겠더라고요. 이만큼 재미가 없더라구요. 금붕어 똥 마냥 할머니 뒤꽁무니나 주구장창 따라다녀야 맛이더라고요. 할머니, 난 할머니랑 둘이 이렇게 부대끼고 살면서 친해진 게 너무 좋은데. 우리 둘이 밥 해 먹고 꽁냥꽁냥 테레비 연속극 보고 이러쿵저러쿵 수다 떨고 농담 따먹기 하는 거 너무 좋은데. 할머니가 인간적으로 너무 좋아졌는데. 


 할머니도 내가 좋죠?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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