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초록색이네. 산으로 아주 도배를 했어. 울진 산촌 여행을 해보겠다며 관광 지도를 얻어다 펼쳐 놓고 보는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산지 비중이 이렇게 클 줄이야. 이 많은 오르막을 다 어찌 다니나? 고민 끝에 읍내 자전거포에서 접이식 자전거를 샀다. 접어서 버스 짐칸에 싣고 올라갔다가 내리막은 슬슬 타고 내려오면 되겠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가장 난코스부터 섭렵하기로 한다. 그래서 산촌 여행 첫 목적지는 지도의 초록색 한복판, 태백산맥 줄기 위라 해발 4~500m 정도는 가뿐히 넘기는 데다 원시림인 금강송 군락지가 있다는 금강송면(당시는 ‘서면’) 소광리로 정했다. 이 겨울에 대뜸 첩첩산중행이라니 역시 미친 짓이지? 살아서 돌아오자, 하하.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출발했는데 그러길 잘했다. 군청 앞에서 버스를 잡아탈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일단 소광리까지 가는 버스비가 범상치 않았다. 아니 무슨 시내버스비가 5천 원 가까이나 하는 거죠?(당시 서울 물가 기준으로 자장면이 4천 원을 안 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기사님이 금강송면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36번 국도(지금의 ‘불영계곡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우회전해서 산길로 들어서는 순간 깡그리 해소됐다. 버스가 비포장의 깎아지른 비탈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어오른다. 우당탕쿵탕, 바퀴에 바위 밟히는 소리가 요란하고 차체는 놀이기구마냥 들썩인다. 양옆으로 선 숲이 나뭇가지로 버스 몸체를 싹싹 쓸어내릴 정도로 좁다란 길도 무심히 뚫고 간다. 아니 이 정도면 운전 기술이 아니라 운전 ‘무술’ 아닌가…? 버스비를 5천 원이 아니라 5만 원은 드려야 할 거 같은데요? 입이 떡 벌어진 채 소광리 정류장에 내린다.
정신을 붙들고 금강송 군락지부터 향한다. 각오는 했으나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비포장이라 쓰고 돌밭이라 읽어야 할 노면 위로 이를 악물고 자전거를 몬다. 돌부리에 걸려 몇 번이나 자전거를 고꾸라뜨릴 뻔 한다. 조만간 앞바퀴가 떨어져 나갈 거 같다. 덤으로 내 귓바퀴도 떨어져 나갈 거 같다. 산골짜기 겨울바람이 정말 살벌하다. 스키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핸들을 잡은 손이 자꾸 곱아든다. 콧물이 흐른다. 눈물도 흐른다(추워서 흐르는 거다). 오기가 생긴다. 내가 진짜 억울해서라도 금강송 군락지 사진 꼭 찍고 간다! 오는 길에 버스 창밖으로 이미 소나무를 2천 그루는 본 것 같아 별 감흥은 없지만서도. 그러다 저 멀리 군락지 입구에 근엄하게 선 한 그루 금강송을 보자마자 반성한다. 저 멋드러진 걸 감히 다른 소나무들과 비교할 생각을 하다니 내가 바보네.
수백 수천 아름드리 금강송들이 뜨내기 여행자를 내려다본다. 곧게 뻗은 붉은 몸체에 용비늘 같은 나무껍데기, 꼭대기에는 뾰족한 이파리들이 몽글몽글 구름 마냥 피어있다. 제아무리 고개를 꺾어 카메라를 겨눠본들 그 늠름한 자태가 렌즈에 다 담기지 않아 안타깝다. 임금님 관 짤 때나 궁궐 지을 때 등 왕실 전용으로만 베어 쓰려 조선 숙종 때부터 아예 입산을 막으면서 보호해 온 원시림이라는 게 실감 나도록, 이 광활한 군락지는 헤매고 또 헤매도 끝나질 않는다. 게다가 비성수기라 그런지 여기 장대한 풍경 안에 인간이라곤 나밖에 없다. 추위도 잠시 잊고 압도된다. 그렇게 홀려버렸다. 다음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울진여객 운전 무술인이 모는 모험 가득 시내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소광리로 떠난다.
며칠째 드나들다 한번은 금강송이 ‘납치’ 당하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금강송을 한 그루씩 꽁꽁 묶어 실은 트럭들이 연이어 지나갔다. ‘어어, 이거 보호림이잖아? 설마 불법 반출은 아니겠지?’ 망설이다가 마지막 트럭 뒤로 따라붙었다. 체감 각도가 36도여서 36번 국도라 이름 붙인 게 아닐까 싶은 미친 내리막 도로를 트럭 속도에 맞춰 자전거로 달리다 보니 곧 영화 <ET>에서처럼 공중부양할 것만 같아 겁이 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어찌어찌 산 아래동네에 무사히 착륙(?)은 했는데 결론은 좀 허탈했다. 트럭들이 일제히 멈춰 선 근남리의 울진종합운동장에서는 식목이 한창이었다. 숲이 너무 빽빽하면 나무가 잘 자랄 수 없어 조금씩 솎아줘야 한다더니 그렇게 솎은 금강송들을 여기 가져다 가로수로 심는 모양이다. 밀반출이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만 트럭 기사님은 웬 정신 나간 사람이 제 뒤를 자전거로 악착같이 쫓아온다며 좀 무서워 하셨을려나?
오늘치 금강송 구경은 다 했다 싶으면 근방에 띄엄띄엄 자리 잡은 소광리 마을로 향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수정 광산으로, 60년대에는 화전민촌과 1968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침투로 외부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는데 요즘은 외지인이라면 나처럼 금강송 관광하러 온 치들이나 드문드문 찾아들 뿐 대체로 살던 사람들끼리 오붓하게 송이 따고 약초 농사짓는 외진 동네다. 첫인상은 이 시기 오지 산골답게 그저 황량할 뿐이지만 찬찬히 거닐다 보면 그 고즈넉한 분위기에 절로 빠져든다. 공기는 청량하고, 창백한 햇살은 사방에 파리한 필터를 씌워 이 계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색을 낸다. 시커먼 고목과 바짝 마른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말고는 도무지 고요한 마을 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노라면 오로지 나 혼자라는 기분에 막막한 한편 평온하다. 외로워서 더 다정한 겨울, 산촌. 지금 여기를 여행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다시 36번 국도를 30분가량 자전거로 미끄러져 내려오면 마침내 평지의, 양지바른 행곡리다. ‘이번에도 조난이나 부상 없이 귀환하는구나’ 하고 감사하는 시점도 이쯤이다. 마음에 여유를 되찾아서일까, 추위가 여전한데도 주변 풍경이 아까보다 채도가 두 칸은 더 올라간 듯 포근하다. 쉬엄쉬엄 페달을 놀려 외가로 복귀한다. 오늘의 모험담에 어느 정도나 양념을 쳐야 이따 저녁 먹으면서 외할머니와 수다 떨 때 흥이 더 오르려나 즐겁게 고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