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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런마음황구 Mar 26. 2021

나의 그리운 남의 고향 답사기
#2 엄마의 바다

 

 끽해야 망양정 해수욕장이나 후포 해수욕장, 그리고 죽변항이 내가 알던 울진 바다의 전부였다. 그나마 해수욕장은 명절 귀성길에 차창 밖으로 스쳐보거나 이따금씩 차 세우고 내려서 구경하는 정도였고 죽변항은 외식하러 횟집에 갔다가 횟집 앞바다를 내다보는 식이었다. 


 일 년 간 머무르면서 비로소 울진 바다를 제대로 만났다. 다른 해수욕장, 다른 항구를 가보았고 늘 지나치기만 했던 어촌들에 처음으로 제대로 발을 디뎠다. 특히 근남면과 매화면에 걸쳐 나란히 붙어 있는 산포리, 진복리, 오산리 어촌은 첫눈에 반해버려 여행 내내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드나들었다. 


 날것의, 투박한 이 세 어촌의 바다가 좋았다. 자갈 섞인 불친절한 모래톱, 툭툭 불거진 바위에 부딪혀 사납게 으르렁대는 파도의 가공되지 않은 보석 같은 아름다움이 좋았다. 해수욕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아 관광객이 드문 덕택에 여기서는 거의 항상 바다를 독대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그런 거친 바다 주제에 또 물빛은 한없이 고운 쪽빛이라, 그 대비감이 좋았다. 좋은 것 투성이니 그저 좋을 수밖에. 해변에 길게 누워 시시각각 다르게 물드는 물색을 감상하며 핸드폰에 그날 치 파도 소리를 녹음하노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는데, 아… 이걸 적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다시 돌아가고픈 생각이 간절하다. 



 바다 신선놀음을 하다 둑 너머 1차선 도로 하나만 휙 건너면 곧장 마을이다. 막상 가보면 바닷가 아닌 데서도 흔히 볼 법한 동네들 같다가도 문득문득 아 여기 어촌이지, 깨닫는 순간들과 맞닥뜨린다. 빨랫줄에 아무렇지도 않게 나란히 널어 둔 한 쌍의 고무장갑과 한 쌍의 오징어라든지, 그 오징어 한 쌍이 옥색 신발장에 드리운 귀여운 그림자, 바닷가 둑 위에서 말리고 있는 빨간 고추, 꽃나무 옆에서 꽃보다 더 화려하게 핀 채 건조되고 있는 생선들, 한 줄로 꿰어다 걸어 둔 살구색 생선 토막들이 해 저무는 바다 하늘과 기막힌 색 조화를 이루는 장면 같은 거. 


 산포 바다도, 오산 바다도 좋지만 진복 바다는 좀 더 애틋하다. 엄마가 젊은 선생님일 적 진복국민학교에 발령받아 근무했던 이야기를 들어서다. 이야기 하며 들떠 있던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가 생각나서다. 손수레 하나에 이삿짐을 몽땅 싣고 읍내 외가에서부터 여기까지 외삼촌들과 함께 밀며 끌며 왔었다고. 늦은 밤 혼자 깨어 있을 때 자취방 창문 너머 아득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좋았다고. 그래서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지금도, 도로 위로 차들이 쌩쌩 달리며 내는 소음이 창틈으로 웅웅 새어 들어올 때면 ‘파도 소리인가보다’ 생각하려 한다고. 진복 사는 동안 밥반찬으로 먹었던, 읍내 살 적엔 한 번도 못 먹어 본 엄청 비리고 싱싱한 고등어 젓갈이 요즘도 가끔 생각난다고. 일과가 끝난 늦은 저녁,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바닷가 모래를 퍼날라 가며 맨손으로 지어 올린 진복교회의 추억이 소중하다고. 


 울진을 여행하지 않았더라면 엄마와 진복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을까. 들려준들 무슨 얘기인지 알아먹었을까. 아마 진복이라는 지명조차 한 귀로 슥 흘려버리지 않았을까. 몇 십 년 전 내 또래의 엄마가 이 바다 앞에 서 있는 상상을 하며 혼자 괜히 울컥한다. 엄마 나 아무래도 이 여행 하길 잘 했나 봐요. 


 

그리고 작년 겨울 진복을 다시 찾았을 때 이곳은 어머니의 추억을 거치지 않고도 내게 충분히 애틋한 바다가 됐다. 읍내-진복은 배차 간격이 드문 터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스 기사님께 돌아가는 막차 시간을 확인한 게 계기였다. 마을 구경도 하고 바다 구경도 하며 느긋하게 놀다가 문득 찻길 쪽을 돌아봤는데 버스 타는 지점에 선 교통 표지판에 웬 종이가 한 장 바람에 덜렁거리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기사님이 집게로 집어 놓고 간 메모였다.


  ‘막차는 오후 5시 30분이 아니고 오후 6시 20~25분입니다. 죄송합니다. – 버스 –’.


  외지인에게 막차 시간을 잘못 알려준 걸 퍼뜩 깨닫고, 혹시 막차를 놓치거나 주구장창 기다리면 어떡하나 걱정하다가 펜과 종이를 가져다 메모를 하고, 집게를 찾고, 버스를 잠시 세워두고 표지판에 집게로 메모를 물려 놓고, 제발 내가 이 메모를 발견하기를 바랐을 기사님 생각에 배시시 웃음이 났다. 울진은, 울진 버스는, 진복 바다는 내게 왜 이리도…. 사랑하는 나의 바다. 나는 이 순간을 오래오래 잊지 못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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