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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D Jan 14. 2020

무드 인디고: 사랑이라는 필터

<미셸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Mood Indigo)>


사랑이라는 필터가 씐 세상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해 냈으므로 이 이야기는 완전히 사실이다.”-보리스 비앙   




*각자의 노래     


 타자기를 두드리며 만들어 가는 삶, 음악을 칵테일로 즐길 수 있고 음식을 눈으로만 봐도 괜찮은 그의 세상에 ‘클로에’라는 음악이 흐른다.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음악. 그 음악은 그에 의해 움직이던 타자기 이외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함의 중 가장 큰 것은 '정서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음악은 우리의 '청각'을 자극하는 예술로 볼 수 있는데, "시각 정보는 건조하고 청각 정보는 촉촉하다."는 말도 있듯 청각은 시각에 비해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한다. 이는 시각이 청각에 비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책 '뇌로 통하다'를 참고해서 적은 내용입니다)

 이렇듯, 음악은 우리의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 음악을 듣다 보면, 잊히지 않는 음악이나 계속 듣고 싶은 음악을 만난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잊히지 않는 음악들은 내 음악 재생목록으로 채워지고, 하루의 기분에 따라 그 음악을 듣게 된다. 그렇게 그 음악이 가지게 되는 의미는 내 마음에서 작게 싹튼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음악'으로 다가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이미 내가 내 감정을 알아채기도 전, 우리는 이미 반복되는 음악으로 그 마음을 싹 틔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정서'가 나의 선택의 범위를 벗어나, 한 순간에 의해 나에게서 새어 나와 마음에 싹을 틔우는 것이다.


*사랑은 무슨 색일까?   

  

 예전에 ‘라라 랜드’를 보며 사랑은 보라색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두 주인공이 해가 진 보라색 밤하늘을 배경으로 춤추는 장면을 바라보며 '아 이게 사랑이구나', 하며 생각했더랬다.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의 색은 보라색이 되었다. 하지만 사랑에는 결코 사랑만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랑이라는 필터, 보라색의 필터는 세상에 새로운 색을 씌우지만 그곳엔 마냥 보라색만 남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은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 내, 세상을 새로운 색으로 물들인다. 영화의 주인공 콜랭이 클로에를 만나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며 그 속에 서로의 모습이 변화하면서 만들어지는 색감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세상에 내려왔다가 또 어느샌가 달라진다. 그렇게 잠시 보라색이 되었다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를 반복하며 사랑이 진전된다.

       

*비본질적인 선택

     

  이 영화를 보고 한참 동안 ‘사르트르’의 이론을 팠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영화는 사르트르의 의견에 반박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임에도 내가 사르트르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확실히 그의 철학은 영화에서 콜랭의 친구 시크가 '파르트르'에 빠졌던 것처럼 매력적인 이론임이 분명했다.

     

 인간이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사물의 경우에는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규정하지만, 인간의 행위에는 거꾸로 미래가 현재를 규정하기에 인간은 미래의 많은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 자기를 내던지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란 곧 선택이고 인간이란 자유가 선고된 존재이며, 선택이 강요된 존재라고 사르트르는 생각했다.

 즉, 인간은 인간의 의식에 말미암아 자유로운 선택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존재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콜랭은 어떠했는가.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는가.

 단편적으로 클로에가 병에 걸렸을 때를 예 들면, 그녀는 그녀 스스로 병에 걸리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점점 커지는 병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의 생에는 자신의 선택에 벗어나는 것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떠한 이론들이나 신념들(의식)은 알 수 없는 자연의 흐름에 의해 어딘가 변형되고, 흐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 '시크'와 '알리즈'

 잠깐 이 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면, 이들의 사랑은 사이에 '파르트르'를 끼고 시작된다.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 사이의 '파르트르'때문일 것이다. 콜랭과 클로에의 사랑이 음악이 되어 서로에게 스며든 사랑이라면, 시크와 알리즈의 사랑은 파르트르라는 공통 관심사에 의해 발현된 하나의 호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스며들지 못한 그들은, 자신을 죽이고 파르트르를 죽이며 끝을 맺게 된다.


*타인을 발견하다

 

콜랭의 음악을 들려주는 클로에

 

 각자에게는 각자의 곡조가 있다. 그러므로 관계를 맺는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알맞은 화음으로 맞추어질 수 있으면서도 누군가에게는 조용히 그만의 노래를 들어주는 것일 수도 있고, 영화의 클로에처럼 콜랭의 노래를 있는 그대로 들려줄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느껴졌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다가가며 서로의 음악을 듣는 것이다. 그리곤, 이내 아름다운 하나의 음악이 되겠지.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믿게 됐다.

 하지만 모두가 나에게 알맞은 화음이 될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협화음이 만들어지지 않을 만큼의 거리도 필요하다. 음악에서도, 불협화음이었던 음이 다른 음과 만나면 화음이 만들어질 수 있듯.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얼마만큼의 화음을 내고, 얼마만큼 그의 곡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by. UD(유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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