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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Dec 14. 2020

내 나름의 우주

홈 베이커로서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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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NYEOBAKE 



 

모든 이가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갖추고 살아가기 위해 매일 같은 노력을 반복하고 있다. 누가 보기엔 평범한 머리 모양일지라도 그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시간과 공을 들여 준비하고 매일매일 그 기준을 만나기 위해 애쓴다. 그렇다고 그게 굉장히 멋진 것도 아니고 인상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 머리가 그 느낌대로 안되면 그날은 말아먹은 하루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기준 안에 들지 못했을 뿐인데 누가 한소리 할 것처럼 고민이 되고 짜증이 난다. 주변에서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고 정말 이상하지 않다고 몇 번을 말해줘도 당사자는 이 하루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지옥을 살아가고 있다. 그 지옥 밖 다른 이의 천국을 구경한다. 그 천국에 사는 사람도 내 천국을 보며 자신의 지옥을 불행해한다. 하나 분명 자기 세상 속에서 애틋하게 키워가는 작은 천국이 한편에 있다. 좋든 싫든 자신만의 정원이 있고 그 안에서 원하는 꽃을 피우고 가지를 친다.

일생 동안 너무 많은 감정과 경험을 거쳐가며 위대하면서도 별 볼 일 없는 하나의 우주가 만들어진다. 이 우주는 한 사람이 태어난 순간에서 시작되고, 크고 작은 삶의 결정들, 외부의 영향들, 살아가는 환경 등을 통해 만들어진다. 세상을 그저 평화롭게 살아가기엔 너무 큰 개개인의 우주를 살아간다. 각자의 우주가 이렇게 넓고 복잡한데, 신기하게 하나의 사회 안에 살아간다. 약속된 시간 개념과 공간에서 비슷한 감각과 고정관념들을 가지고. 그러니 문제가 날수 밖에 없지. 내가 고이고이 만들고 빚어온 못나거나 잘난 나를 펼칠 시간을 가지지 못하면 그냥 내 안에서 곪아 버리는 것이 오늘의 삶이다. 혼돈을 줄이기 위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어쩔 도리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 움직임, 생각들을 내 돈벌이하는 세상에 나가 할 수 없다면 다행히도 우리는 집에 돌아와 취미 생활, 번외 활동을 할 수 있다. 몇 년째 집에서 베이킹을 하다 보니, 종종 베이킹을 업으로 할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받는다. 손사래를 치며 결사적으로 그럴 마음이 없음을 내비친다. 물론 가끔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공상에 빠질 때가 없다고는 못한다. 하지만 베이킹을 좋아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내가 아직 홈베이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취미'라는 말로 가볍게 읽히지만,  홈베이커로서 내가 살아가는 우주는 무시 못할 만큼 방대하고 구체적이다. 나는 혼자 쿠키를 굽고 케이크를 만들며 나름의 동선과 작업 순서를 만들어냈다. 여러 사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생계를 걱정해야만 하는 환경이 아니다 보니 쳬계적일 필요가 없었고, 그냥 내 시간에 베이킹을 구겨 넣으면 되는 것이었다. 누군가 한 가지 쿠키를 만들 때의 하는 과정을 아주 설명해야 한다면, 그가 베이킹 경험이 있는 사람 일지라도 마치 자막 없이 보는 먼 외국의 영화 같지 않을까. 대충 뭘 하려고 하는지, 결말이 대충은 보이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기분이라고 해야겠다. 혼자 베이킹을 하면서 나만 이해 가능한 언어를 만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레시피를 접하다 보면 반죽을 미는 방식이나 밀가루를 덧칠하는 정도까지도 치밀하게 알려주며, 또는 자기식으로 컨트롤하듯 쓰인 것이 있는가 하면, 기본적인 생존 필수품 키트 하나를 주고 ‘무인도에서 생존하기’ 방식으로 쓰인 레시피도 있다. 전자는 모국어로 된 예능 프로그램에 더해진 정신없는 자막 같고, 후자는 먼 나라 외국어로 된 영화다. 말이 많아 생각할 틈도 주지 않는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주변을 느끼고 해석할 수 있도록 여유 공간을 내어주는 사람이 좋을 수도 있다. 생소한 어휘와 모호한 표현을 섞고 화려한 인용구를 써가며 말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재수 없고 피곤하듯, 전문적 표현과 애매한 설명으로 가득한 레시피를 읽으면 내가 너무 부족한 걸까, 이게 과연 되기나 할까, 케이크를 만들어보기도 전에 맥이 빠진다.

조금씩 나만의 움직임이 만들어지고, 내 방식이 생기고 나면 레시피를 언뜻 봐도 이 사람이 내 마음에 들지 안 들지를 알 수 있다. 인간으로서 비슷한 삶을 살아갈지언정, 우리 각자가 편안해하는 것이 다르고 피하고 싶은 것들이 제각각이다. 남들은 그다지 신경 안 쓰는 저 사람이 나는 정말이지 싫고 불편하고, 남들은 싫다 하는 음악이 나에게는 자장가처럼 편안할 수 있다. 똑같이 출발해 다른 삶을 살아오며 이렇게 제각각의 우주를 키워 나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또 그 안에 더 작은 우주를 만들어 간다.

 각자의 우주라는 것은 심오한 정신과 내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자꾸 반복하면서 만들어진 단순한 몸동작과 버릇이 어느새 내 성격의 일부가 되어 내 삶을 형성하게 된다. 생각하지 않아도 나오는 이 버릇들이 어쩌면 나에게만 자연스러운 것일까 궁금해진다. 이 행동의 진화와 나의 찌질한 성찰까지도 내 우주에 포함 된다.

어딘가에 필요하지 않을까 했던 병에 말돈 소금을 담아 쓰고 있다. 필요하면 주저 하지 않고 이 묵직하고 귀여운 용기에 손을 뻗는 내 제스쳐도 다른 곳에 없는 움직임이 아닐까. 


  내 나름의 방식, 내 나름의 노하우라고 했을 때의 이 '나름' 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설명하기 어려운 우주를 대변한다. 내가 재료를 준비하는 순서, 스패출러로 믹서 볼안을 긁는 방식, 롤링핀으로 쿠키 도우를 미는 자세, 머랭을 만들 때의 집중도, 레몬 커드가 완성되었다고 판단하는 타이밍 등. 너무 많은 방식으로 나는 나에게 말을 걸고 또 답을 하기도 하며 보이지 않는 저글링을 한다. 이 우주는 정말 다채롭다. 나 혼자만 살고 있지만 심심하지 않고 나 혼자 있는데도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고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 나 말고는 알지 못하는 그 시간들이 생기는데, 오랫동안 홈베이커로 혼자 베이킹을 하다 보면 남이 몰랐으면 하는 버릇들도 생긴다.

 뭘 하더라도 별 노력 안 들이고 한 것처럼, effortless 한, 타고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사람 속마음이 아닌가. 타고남을 연기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몰래 애쓰게 만든다. 그럴 때마다 내 우주의 경계선이 좁혀져 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집에서 어정쩡한 자세나 몸짓으로 하는 행동들, 누구의 시선도 두려울 것 없이 실수하고 어지르고 화내고 불편해하는 자연스러운 태도들은, 좋든 싫든 나의 모습이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 누가 본 적도 없다는 것은 참 신기하면서도 축복과 같은 일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그 비밀스러운 세상을 제쳐두고 집 밖에 나가 직장에서 일하고, 길을 걷는 내 모습과 내가 내 집으로 돌아와 살아가는 '나'의 사이는 슬픈 흉내와 이상한 기대치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 사이가 클수록 슬픔도 부담도 크다. 매일 반복적으로 그 사이를 오가야 하는 인생은 더 빨리 지치고 슬퍼지지 않을까.  개인의 우주에서는 무의식과 환경이 만들어낸 내가 있고, 내 우주를 떠나서는 내가 그곳에서 이루고 싶은 나, 어디서 본 사람의 모습이 있다. 그냥 해 본 흉내가 어느새 타인들에게는 '나'로 익숙해져 버려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해 그렇게 두 가지 차원을 넘나들며 지치는 삶을 산다. 집 밖을 나가서 도대체 누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애쓰는 것인지,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정해준 나를 살아가는 것인지.

 개인적 삶 없이 바깥에서의 생활이 전부인 사람은 더더욱 자연스러운 자신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고 자기를 지지하던 축에서 멀어져 버리며,  결국 공중에서 방향 없이 날아다니는 공이 되어버리고 만다. 두어 가지의 '나' 사이에서 전원을 켜고 끄듯 사는 삶을 피 할 수 없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와 내 우주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나를 위해서 내가 집에서 하는 취미생활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나에게 자연스러운 나를 살아가고 , 거기서 실제로 나에게 가장 가까운 모습들을 발견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집에서 어떤 환경을 조성하고 어려움을 마주하며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꽤 희귀하거나 때로는 특수성을 띄는 자신만의 순간들을 얻게 된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내가 느끼는 나의 경험들을 통해 나를 더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자신을 대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된다.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

 내가 살면서 느끼는 나의 부족함과 강점은 베이킹을 하면서도 본다. 연구하는 과학자로서의 인내심이 부족한 것, 레시피를 관찰하고 변화를 주며 결과를 기록하는 것을 버거워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아보고 준비하는 것, 레시피를 공부하고 가장 적합한 방식을 리서치하며 재료를 찾는 준비성으로 나타나곤 한다. 막상 실제로 액션을 취할 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하는 도피성 패닉이나 상황에 대한 빠른 적응력은 삶과 베이킹에서 내 장점이기도 단점이 되기도 한다. 조금 마음에 안 든다 한들 달리 지금 와서 고칠 수 없으면 그냥 그런대로 케이크 레이어를 쌓고, 파이 크러스트 모양을 변경한다. 계획과 달라도 결과물에 긍정적이고, 그래서 오래 철저하게 그려왔던 계획을 완전하게 실행하지 못하기도 한다. 직장 생활에서도 길에서도 베이킹할 때도, 여러 개의 거울이나 마치 평행 우주처럼 같은 나의 모습이 메아리친다.

 베이킹을 할 때 내가 어려워하거나 게을러지는 순간들을 견뎌내는 변화를 주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의 나를 강하게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귀찮아도 미리 모든 재료를 준비해 진열하고, 레시피에 실패했으면 곧장 다시 한번 조건을 바꿔 시도해보고, 주변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다 보면, 내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 더 생산적이고 사려 깊은 듣는 이가 될 수 있을까? 레시피를 실행에 옮기기 전의 준비성으로 조금 더 정확하게 필요한 행동들을 할 수 있을까? 내 얼굴을 거울로 통해서만 볼 수 있듯, 신기하게 내 안에 있는 내면인데도 나 혼자 그 안을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수년간 수련한 명상가나 사상가가 아니어도 내 마음을 거울에 비쳐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혼자 자기만의 행복한 생활을 하며 작은 생태계와 사이클을 만들고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종종 그 거울을 들여다보면 나의 바보스러움, 무례함은 물론 나만 가지는 초능력과 명민함을 만나게 된다. 다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넓은 세상 속 작은 알갱이가 되기 위해선, 세상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읽는 것보단 내 우주를 만들고 그 안으로 더 깊이 가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내 우주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내가 더 깊고 좁은 곳으로 사라져 버린다기보단 그 우주가 팽창하는 기분이 들것이라는 상상을 한다. 다른 차원의 우주와 나의 내면은 확연히 다른 법칙으로 움직이고 있기도 하겠지. 나 자신을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으로서 베이킹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나에 대해 어떻게 숙고할 수 있을까. 밖에서도 하는 실수를 안에서도 하는 것을 보고 아 그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님을 알게 되는 이 순간들이 없었다면 나는 한층 더 모자란 사람으로 내 삶을 흘려보내고 있었겠지.  

 이 세상에 집에서 혼자 무언가를 하며 행복해하는 사람들, 대가나 칭찬, 누군가의 인정을 받을 생각 없이 오늘도 재밌는 것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집에서 방에서 작업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수많은 우주들을 생각하니 정말로 경이롭고 가슴 벅차오른다. 자기도 모르게 그 위대한 우주를 팽창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외롭지 않다. 조용하고 눈에 안보일수록 더 강하게 커지고 있는 그 사람의 우주를 응원하고, 또 내 나름의 우주도 잘 돌볼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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