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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Feb 06. 2021

우리집 베이글

집에서 베이글 만들기

 베이글 하면 다른 것 보다, '베이글 한 개가 식빵 6-8개를 뭉쳐 놓은 밀도와 칼로리를 가지고 있다'는 가설이 생각난다. 한 15년 전쯤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베이글을 먹을 때면 '지금 식빵 8개를 한 번에 이렇게 먹는 게 괜찮을 것일까?' 잠시 고민에 빠지지만, 끝내 잘 구워서 크림치즈까지 발라서 즐겁게 먹었었다. 베이글을 먹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세계적으로, 특히 오랜 베이글 문화가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겐 대부분 자기만의 베이글 먹는 방식이 있지 않을까. 기본적으로는 크림치즈 하나만 발라 먹는 방식이 있을 테고, lox( 록스:훈제 연어)를 얹어 먹는 것도 인기 있다. 샌드위치 형태로도 먹는데, 아침 식사용 식재료 '에그, 베이컨, 치즈' 등을 넣어 먹는 것이 한 예다. 한국에서는 베이글이 우리 식문화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아서 종류가 다양하지 않은데 플레인, 어니언, 블루베리 정도가 주로 있는 것 같다.  

 영국에 살 때 베이글로 유명한 브릭 레인이 멀지 않은 곳에 살았었는데, 그곳에서는 가게가 들여다 보이는 유리 창문 안 히트 램프 아래 커다란 삶은 소고기를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 구미를 자극한다. 그게 Salt beef라는 그것이다. 누구나 알아보기 쉬운 베이글 가게의 간판을 확인하고 들어서면 작지 않은 매장 안에 목소리 큰 점원들과 베이글을 사려는 손님들- 주로 관광객이나 주말에 브릭 레인(brick lane: 런던 동부에 위치한 골목, 빈티지 숍과 주말마다 열리는 다양한 마켓으로 많은 지역인들과 관광객들이 몰리는)에 오는 타 지역 사람들- 이 정신없이 주문을 주고받고 베이글을 받아 나가는 등의 모습이 펼쳐진다. 베이글로 유명한 곳이지만 정식 명칭은 베이커리이고 당연히 베이글 외에 여러 가지 베이커리 제품류가 있다. 베이글을 사러 왔다가 이건 뭔가 하고 큼직한 케이크들이 진열된 쇼케이스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그 사람들은 주로, '저건 디저트로 먹자' 하고 원래 목적이었던 베이글을 고른다. 가게 앞에 서서 베이글을 다 먹고는 그 포만감에 디저트 버튼은 힘 없이 꺼진다. 나는 당시 근처에 살다 보니 베이글을 자주 먹어본 탓에 다른 것도 시도해 볼 여유가 있었다. 브라우니, 애플 스투르들, 커다란 머핀, 초콜릿 케이크 등이 투박하게 잘라져 있고, 세련된 맛도 아니지만 꼭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한번 사 먹어본 브라우니를 굳이 또 사 먹진 않겠지만, 궁금증은 해소됐다. 이 베이글 샵을 유명하게 만든 salt beef 베이글을 주문하면 유리창 안에 있던 큰 고기 덩이에서 몇 조각 두툼하게 잘라, 갈라놓은 베이글에 끼우고 노란색의 매콤한 겨자 소스를 뿌린 salt beef sandwich를 준다. 소금 간을 한 기름지고 따뜻한 고기에 톡 쏘는 겨자 소스와 쫄깃한 베이글의 조화를 한입 크게 베어 물으면 '아이고, 혈관이 막히는 맛이로구나'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제대로 씹지도 않은 빡빡한 한입을 꼴깍 삼켜 넘긴다. 런던 베이글은 그랬다. 철자도  Beigel로 미국에서 쓰는 bagel 과는 달랐다.   

 한국에서 베이글에 대한 기억은 아무래도 엄마가 사 오던 코스트코의 베이글, 또는 대학생이 되어 높은 구두에 샐쭉한 표정을 하고 드나들던 커피빈이나 스타벅스의 베이글이 아닐까 생각한다. 커피빈에서 베이글을 주문하면 크림치즈를 함께 주는데,  그걸 보곤 '아니 실수로 손에 묻히기라도 하면 반은 없어지겠네' 생각이 들 정도로 적은 양이였다. 그래서 두 개, 세 개를 추가로 주문해야 했다. 베이글은 한국에서 그다지 일상적인 빵이 아녔는데도 신기하게 많은 젊은이들이 베이글을 좋아했다.


 최근 이사 온 동네에 지역 주민들(상당수가 외국인) 이 많이 가는 베이글 가게가 있다. 입맛이 까다로운 남편과 나는 업장의 겉모습에도 상당히 혹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이 곳은 그다지 구미를 당기는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다. 몇 년 전에 우리가 살던 곳 근처에 뜬금없이 정말 커다랗게 문을 연 베이글과 커피 전문점의 베이글이 그저 그랬다. 베이글을 내세워 건물 통째로 매장을 냈기에 기대치가 너무 컸던 것일까? 종종 염세적으로 생각하기를 즐기는 우리는 한국에 맛있는 베이글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곳의 베이글이 아주 형편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 입맛은 사실 코스트코나 스타벅스의 것 같은 공장 제조 베이글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곳 베이글에서는 이스트 향이 많이 나면서 코스트코 베이글처럼 만족도 높은 빡빡함이 없었다.  또 한 번은,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들어온 다음날, 줄을 서야만 살 수 있다는 베이글 가게의 베이글 몇 개를 사는 데 성공한 언니가 찾아왔다. 이 베이글은 맛이 없다고 하기도 참 애매한 베이글이었다. 모양은 베이글인데 감촉과 맛은 그냥 모닝빵과 포카치아의 중간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베이글이 맛있다고 줄을 서서 사 먹는다니 뭔가 슬프다. 그렇게 베이글에 대한 거듭된 실망을 거쳐, 작년 말 첫눈이 내리던 날 아침, 강아지 산책을 함께 나갔다가 작은 골목길을 통해 큰 길-그래 봤자 좁은 이차로- 로 나왔는데 길 건너편에 이른 시간에도 바쁘게 사람들이 드나드는 이 동네 베이글 가게가 보였다. 혹시나 하고 아침으로 먹을 베이글을 사 먹어 보기로 했다. 베이글은 플레인과 어니언이 있고, 다양한 베이글 샌드위치가 메뉴가 있었는데, 종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패닉 하는 나는 메뉴 상단에만 눈을 고정하는 편이다. 나는 플레인 한 개, 남편은 베이컨, 에그, 치즈가 들어간 베이글 샌드위치를 선택했다. '아니 어떻게 크림치즈를 발라 먹은 기회를 저렇게 날리는 거지!' 종종 남편의 선택이 놀랍고 신기하다. 집에는 파운드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대용량으로 구매하는 크림치즈가 있어 따로 크림치즈는 구매하지 않았지만 그곳엔 다양한 크림치즈도 판매하고 있다. 굽지 않고 그대로 받아온 베이글을 반으로 갈라 토스터에 넣고 최대치(5분)로 굽는다. 토스터가 좀 오래됐는지 오래 구워도 먹음직한 갈색이 되지는 않아 조금 더 구워야 한다. 코스트코 베이글이 주는 빡빡하게 졸긴 한 씹는 맛이 있지만 훨씬 먹기 좋은 수준의 식감을 가지고 있고 적당한 이스트 향이 맛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뉴욕이나 몬트레올의 베이글을 먹어보지도 않았고, 어딘가엔 분명 더 맛있는 베이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어디 가서 이 베이글이 제일 맛있다고 하기도 조심스럽지만, 마음속으론 이 베이글이 정말 맛있고 좋다고 생각했다. 세 주말을 연속으로 베이글을 먹으며 보내던 중 뉴욕 타임스 쿠킹에서 올린 영상을 보게 되었다. 평소 즐겨 보던 영상 속의 셰프가 나와 베이글 만드는 방법을 설명하고 보여주는데 그다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아 보였다. 거기다 믹서를 쓰지 않으면서 손으로 반죽을 다루는 나름의 보람 있는 노동의 공정도 있어 보이고, 집에서 만들어 보기에 아주 매력적인 아이템이 아닌가 싶었다. 재료는 단순했지만 한 가지 생소한 재료가 있기는 하다. Barley malt syrup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직역하자면 보리 맥아 시럽이라는 재료다. 당밀과 비슷한 색과 농도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barley malt syrup의 대체 재료로 당밀을 쓰기도 한다. 그래도 뭐든 가장 근접한 조건으로 준비해서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즉시 직구 주문을 하고 다음 주말을 기약하기로 했다.

 5일 만에 이 생소한 재료를 받았고, 주말 이틀의 걸친 베이글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첫 번째 단계는 밀가루, 물, 보리 맥아 시럽을 혼합해 반죽을 만드는 것이다. 좀 처럼 강력분을 쓸일이 없기에 밀가루 봉투를 개봉하며 꽤 설렜다. 이때 보리 맥아 시럽을 혼합한 온수에 이스트를 활성화시키는데 이스트가 시럽의 당을 소모하며 더 활발하게 살아난다. 물론 편집 탓이겠지만 참고 삼아 본 영상 속에서는 이스트가 꽤 빨리 활성화되는데 역시나 이상하게도 내가 할 땐 뭔가 문제 항상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니 자잘한 거품이 일어나고 살짝 걷어낸 거품 밑으로 큰 거품들이 살아나 있다. 잘 활성화된 이스트와 보리 맥아 시럽이 섞인 물을 밀가루에 넣고 반죽한다. 적당히 끈기가 생기고 구조가 잡힌 반죽을 테이블로 꺼내 본격적 반죽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글루텐 형성이 일어나고 반죽이 단단해진다. 초반부터 탄력이 생긴 반죽은 꽤 많은 힘을 들여 이리저리 치대야 한다. 그렇게 20분간 씨름을 하다 볼에 담고 반 정도 젖은 수건을 덮어 1차 발효,  bulk fermentation에 돌입한다. Bulk fermentation 이란 반죽 덩어리 전체를 발효시키는 과정인데, 소분해서 성형을 하기 전에 하는 발효를 말한다. 두 시간 정도 지나니 원래 반죽에서 두배 정도 통통하게 부푼다. 눈으로 봐도 팽팽하게 부푼 느낌이다. 1차 발효를 잘 마친 반죽을 12개로 나누고 베이글 모양으로 성형한다. 길게 쭉 늘린 후 양 끝을 이어 붙여 튜브를 만들 수도 있고,  반죽 가운데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모양을 만들 수도 있다. 뉴욕 스타일은 전자라고 하길래 그렇게 해보았다. 끝을 이을 때는 테이블에 놓고 굴리면서 눌러 만나는 부분이 꼬이듯 붙게 되는데 이 모양이 뉴욕 베이글에서 보이는 모양이라고 한다. 베이킹을 하면서 반죽을 밀고 성형하거나 쿠키 도우를 떠내는 등 조리 전 모양을 내는 단계가 가장 재밌다. 형태가 없는 것에서 내가 만들려고 하는 그것으로 갑자기 점프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손을 직접 쓰면서 하기 때문이다. 고리형으로 성형한 베이글 반죽을 냉장고에 넣고 proof 하는 과정을 거친다. Proofing은 2차 발효인데, 성형이 된 반죽을 조리하기 전 마지막으로 발효하는 단계다. 최소 4시간에서 하루 정도 냉장고에서 천천히 저온 발효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냉장고 안에서 마지막 발효를 마친 베이글을 꺼낸다. 베이글은 굽기 전 끓는 물에 데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통해 겉면이 살짝 익으며 모양이 잡히고 또 식감도 쫄깃해진다. 오래 데칠수록 더 쫀득해진다고 한다. 반죽을 만들 때부터 시럽을 섞는 이유는, 그 안에 함유된 당과 이스트의 상호 작용으로 활발한 발효를 하도록 돕고, 이것으로 탄탄한 글루텐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실제로 약간의 단맛을 더해 더 맛있는 베이글을 만들고 보리 맥아 시럽이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글쎄다, 이렇게 글루텐 함량이 높은 음식에 크림치즈까지 한 겹 두껍게 바르는데 시럽 약간이 건강에 도움되는 역할을 할 수나 있을까? 큰 더치 오븐 냄비에 물과 보리 맥아 시럽,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끓이다 어느 정도 끓기 시작하면 대기하고 있던 베이글을 진한 갈색의 시럽 물에 넣고 짧게, 1분간 한 번만 뒤집으며 끓인 후 꺼낸다. 잠시 망에 올려놓았던 베이글을 베이킹 시트에 올려 오븐에서 20분 정도 구우면 끝. 굽기 전 젖은 상태의 베이글에 원하는 토핑을 더하면 되는데, 말 돈 씨 솔트, 깨, 파피 시드 등 그건 자유롭게. 나는 깨, 소금 그리고 플레인 버전을 해봤다.  베이글을 만드는 과정은 대체적으로 어렵지 않다. 발효가 무사히 되기만 한다면 크게 어려울 것 없지만 약간의 생소한 단계라면 아무래도 발효된 반죽을 데치는 순간이다. 베이킹 소다를 넣자 갑자기 거품이 일어나 더치 오븐 가득 물이 넘치고, 부엌이 좁고 도구가 적어 반죽을 데친 후 꺼내는 과정에서 약간의 난항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조금 더 계획적으로 움직이다면 더 쉬워지리라 생각한다.

 베이글은 딱 내가 재밌게 만들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다. 적당한 익숙함과 낯섦, 적절한 수준의 고난과 즐거운 성형 과정, 그리고 생각보다 짧은 구움 시간까지. 거기다 아침으로 먹는 식사 빵이라는 실용성까지. 나름 완벽한 아이템이 아닐까 싶다.

 베이글 표면이 조금 질기고 구우면서 생기는 표면의 공기 방울이 꼭 생기길 바랬는데 원하는 대로 멋진 물집들이 올라왔다. 비주얼을 보니 보람차다. 내가 원하는 쫀득하고 밀도 높은 묵직한 베이글을 만들었다니 기쁘다. 만든 베이글을 한 김 식혀 가로로 잘라 토스터에 넣고 구워서 크림치즈를 바른다. 발효 과정에서 가스가 빠져나가면서 약간 낮은 베이글이 되었지만 그래서 그런지 더 밀도 높고 맛있고 질깃한 기분이다. 앞으로는 내가 만든 베이글에 익숙해지고 싶다. 잘 만드는 가게의 베이글도 좋지만, 최고가 아니어도 익숙한 엄마의 닭볶음탕, 집 근처 김밥집의 심플한 김밥과 쫄면처럼 익숙한 우리 집 시그니처 베이글이 있다는 것은 너무 즐거운 일이지 않을까? 남은 베이글은 냉동해놓았다가 다음 주말엔 베이글 샌드위치를 만들어야겠다. 남편이 다음엔 블루베리 베이글도 만들어 달라고 하는데 알겠다고 했지만 그럴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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