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연 May 30. 2021

초콜릿 칩 쿠키 다시 만들기

 어떤 이유에서 인지, 나는 여러 면에서 purist(순수 주의자)에 가깝다. 무엇이든  근본적 이유와 형태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시대적 변화에 오염된 것을 거부하고 변화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음식과 디저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내게 익숙한 맛만 보겠다는 고집스러운 애착은 아니라도 한 음식의 역사에 대한 이상한 존중이 있어서 무언가 심하게 변형된 것을 보면 기분이 상한다. 내 직장은 젊다 못해 어린 세대가 즐겨 찾는 지역에 있는데, 보고도 믿기 힘든 그야말로 '끔찍한 혼종' 수준의 음식들을 파는 식당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감자튀김을 얹어 구운 피자, 치즈를 산 처럼 뿌려 쌓아 놓은 매운 갈비찜 같은 것 들이다. 봐도 봐도 새롭게 고통스럽다. 최고로 맛있는 이탈리안 피자, 한국에서 가장 맛이 좋다는 불고기 집을 찾아다닐 시간도 부족한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 우리의 식문화는 이미 디스토피아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종종 내 순수주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곤 하는데 내가 어떤 이유에서 이런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파운드케이크를 만드는데 갑자기 말차와 초콜릿을 섞어버리면 그게 정말 안타깝고, 바스크 치즈케이크에 단호박을 넣는 것은 정말이지 비극적이다. 베이킹을 하면서 이 사고방식이 나 자신에게 한층 더 고착화되는 것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럽다. 이것이 결국에 아집이나 고루한 정신으로 뿌리내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 이렇게 베이킹 흥선대원군이 되면 남들은 다 즐기는 사이 나만 놓치는 것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에게도 영원한 고집이란 없다. 내 정신은 여러 면에서 느리게 변화한다. 뭐든 남들보다 늦고 무언가를 잊는데도 조금 더 오래 걸리고, 3번 경험해서 느낄 것을 7번은 해봐야 알아낸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내가 나 자신을 설득하기 전까지는 마음 편히 새것을 취하기가 어렵고 마음 한구석이 켕긴다. 그렇게 헤매다 결국엔 어떻게든 배우고 알게 된다. 때론 좀 더 빨리 알아차리고 싶고, 또 금세 익숙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먼길을 돌고 돌아 충분히 고심한 후 새로운 곳에 도착했을 때, 멀리 돌아온 길에서 마주친 것들에 대한 기억과 경험, 더 강한 감정들도 나쁘지 않은 재산이다. 그렇다고 단호박 바스크 치즈케이크를 용서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베이킹하는 생활은 어릴 적 미국 슈퍼 마켓에서 보던 화려하고 커다란 아메리칸 버터크림 케이크들, 그 노스탤지어 속의 맛을 재현하고 싶었던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흔한 쿠키와 케이크의 레시피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맛있는 것을 찾는 것이었고, 꽤 오래 그렇게 해왔다. 보통은 조금 새롭고 특별한 재료나 방식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경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매일 베이킹을 하지 못하니 성공하는 베이킹만 하고 싶어 졌던 것도 같다. 파운드케이크, 초콜릿 케이크, 애플파이. 이런 평범한 것들을 가장 맛있게 만드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변형된 레시피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방식과 재료를 우선시해왔다. 그래서 몇 번의 시도 끝에 좋은 레시피를 찾으면 그것으로 정착하는 편이다. 그런데 초콜릿 칩 쿠키는 조금 다르다. 간단한 재료와 레시피이지만 레시피마다 주는 결과물이 다르고, 취향에 따라서도 많이 갈리는 것이 초콜릿 칩 쿠키라, 그만큼 많은 레시피가 존재하고 또 기분에 따라서 다른 초콜릿 칩 쿠키를 골라 구울 수 있다.  

 처음으로 베이킹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먼저 해보는 것이 쿠키고, 나도 그랬다. 처음으로 오븐을 사고 무엇을 만들지 고민하다가 ‘초콜릿 칩 쿠키가 가장 기본이지 않나?’ 하는 남편의 말에 이리저리 인터넷에서 미국 레시피를 찾아 만들었다. 레시피를 따라가면서도 내가 왜 이 과정을 왜 거치는지, 왜 이렇게 믹스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우왕좌왕하며 쿠키 도우를 만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정말로 경험이 없어서 10-12분만 구워도 된다는 지시도 이상하고 마음에 안 들어서 15분 넘게 구웠다가 푸석 푸석한 쿠키를 구웠다. 초콜릿 칩도 그야말로 마트에서 파는 저가의 제품을 사서 썼으니 맛도 별로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 번 해보고 다양한 레시피를 시도하며 새로운 방식을 배우고 오븐을 이해하는 등 시행착오를 거쳐 노하우가 생겼고, 내가 어떤 초콜릿 칩 쿠키를 좋아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져서 쿠키를 만들어야겠다 싶으면 자연스럽게 재료를 준비하고 별 어려움 없이 도우를 만들어 구울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쿠키에는 일정한 크기의 작고  동그란  형태로 생산되는 게 보통의 초콜릿 '칩' 보다는 판 초콜릿이나 페브를 투박하고 불규칙적으로 자른 '청크(큼직한 덩어리)'가 들어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콜릿 청크 쿠키를 만들고 있다. 가성비보다는 결과물의 완성도를 우선시하는 레시피를 보면, 보통 그냥 초콜릿 칩보다는 다크 페브나 판 초콜릿을 불규칙적으로 잘라서 사용하길 추천한다. 흰 설탕에 황설탕까지 포함하거나, 버터를 갈색이 되도록 끓여서(brown butter) 사용하기를 권하기도 한다. 처음엔 레시피대로 다크 초콜릿을 넣어 만들곤 했는데 조금 익숙해지다 보니 다크 초콜릿만 넣으면 쿠키가 전체적으로 너무 강하고 내 입맛에는 너무 어른스러운 맛이라 느끼기 시작했다. 총사용량의 30% 정도는 밀크 초콜릿으로 대체하는 것을 선호한다. 쿠키를 굽기 전 도우를 30분 이상 냉장 또는 냉동하는 것은 필수적인데, 실온의 도우를 바로 구우면 반죽 속 버터가 빠르게 녹으며 쿠키가 필요 이상으로 퍼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상적인 ‘쫄깃한 테두리와 부드러운 중간’을 가진 도톰한 쿠키가 아니라 대체적으로 납작하고 쫄깃한 쿠키가 되어버린다. 보통 처음에 굽는 쿠키 몇 판은 덜 냉장되어 조금 퍼지는 경향이 있는데, 잘 냉장된 쿠키 도우는 많이 퍼지지 않고  원형에 가깝게 구워진다.

 해외 베이커가 올린 쿠키 사진들 속의 쿠키에 있는 촉촉하게 녹아 반짝이는 초콜릿 웅덩이, molten chocolate (녹은 초콜릿)이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먹음직스러운 쿠키의 형태가 기분 좋은 우연이라면 좋겠지만 그것도 나름의 손길을 거쳐야 만들어진다. 잘 몰랐을 땐 소분한 쿠키 도우 위에 자르지 않은 초콜릿 페브를 얹어서 구웠는데 아무리 해봐도 원하는 그 모습이 나오지 않아 의아했었다. 계량할 때부터 일부러 따로 분리해둔 페브를 정성스레 올려 구우면, 쿠키와 함께 널찍하게 퍼지며 갈라지고 결국엔 초콜릿 웅덩이보다는 쿠키에 초콜릿이 묻은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나고 수많은 쿠키를 만들고 나서야, 만두피에 만두소를 넣듯 도우에 페브를 반 정도 파묻어야 내가 그리는 쿠키의 형태가 나온다는 것을 배웠다. 몰튼 초콜릿 디테일을 얻기 위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 녹는 부분은 다크 초콜릿이어야 한다. 쿠키 위의 밀크 초콜릿은 완전히 녹지 않고 본래의 모양 그대로 약간만 변형되는 정도라서 웅덩이를 형성하지 않는다. 밀크 초콜릿에 비해 첨가물이 덜하고 원재료에 가까운 다크 초콜릿이 더 빨리 골고루 녹기 때문에 반짝이는 초콜릿 웅덩이를 원한다면 최소 카카오 함량 65% 이상의 다크 초콜릿은 필수다. 굽기 직전 굵은 말돈 소금을 한 꼬집 얹어주는 것은 필수적이다.

 시간이 흐르고 반복해서 자주 만드는 것들이 생겨나면서 나도 내 한계치에 다다르고 제2의 쿠키, 제2의 파이를 고려하게 되었다. 새로운 초콜릿 청크 쿠키 레시피를 찾던 중 우연히 스펠트 (spelt)라는 밀의 한 종류를 이용한 레시피를 발견했다. 그다지 낯설어 보이지 않는 쿠키이기도 하고 궁금한 마음에 스펠트 가루를 구해 쿠키를 만들고, 이전엔 몰랐던 맛을 발견하게 되었다. 언제나 일반 중력분으로 쿠키를 만들고, 변화라고는 초콜릿을 바꿔보고 버터를 갈색이 되도록 끓여 쓰거나, 어쩌다 피칸을 더하는 정도를 시도했지만 이렇게 새로운 종류의 가루 재료를 써본 것은 처음이었다. 밀가루 일부를 다른 가루로 대체해 만든 쿠키는 다른 차원의 쿠키가 된다. 딱 짚어 말할 수 없는 그 뉘앙스가 있는데 쿠키 안에든 진하고 강한 초콜릿의 맛과 향을 감싸고 있는 고소하고 깊은 밀의 향이다. 쌀밥과 누룽지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이 쿠키를 다른 사람들에게 맛 보일 때 이 특유의 향이 무엇인지 설명해주곤 했다. 예민하다면 조금 꿉꿉한 내음도 나고, 뭐가 잘못된 쿠키는 아닌지 생각할 수도 있다. 스펠트는 기원전 5,000년 경부터 재배해오던 밀의 한 종류로 청동기 시대 유럽에서는 식생활의 중요한 재료였다고 한다. 요즘은 정제된 하얀 밀가루를 벗어난 재료를 통해 다양성을 더하고 건강한 대체제의 활용을 위해 식업계, 특히 베이킹계에서 고대 곡류에 대한 언급이 많다. 스펠트, 아인콘(Einkorn), 테프(Teff), 카뮤트 (Kamut)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테프 가루는 글루텐 프리 베이킹을 할 때 사용해 본 적이 있다. 어쨌든 새로운 밀이라는 세계의 입문하며 이제 더 이상 일반 밀가루로 만든 초콜릿 쿠키는 못 먹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다 한번 중력분만으로 만든 초콜릿 칩 쿠키를 먹어보면 굉장히 단편적이고 밋밋한 맛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베이킹 책에 초콜릿 칩 쿠키를 여러 개 넣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최근 산 책에는 대표적인 초콜릿 칩 쿠키의 재료 중 중력분의 일부를 메밀가루로 대체했다. 보통 초콜릿 칩 쿠키 레시피는 고전적인 것을 기본으로 포함하고 변형된 버전을 추가로 담는 경우가 많은데, 메밀이 들어간 레시피를 대표로 골라 넣었다니 과감한 선택이라고 느낀다. 새로 산 책에 나온 레시피라서 어쩔 수 없다는 것과 동시에 분명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메밀가루를 구했다. 어두운 메밀 색 때문에 쿠키 도우도 탁하다 못해 칙칙하다, 언듯 보면 쑥떡인가 싶게 색이 진하고 메밀 입자들이 까맣게 보인다. 굽고 나면 일반 초콜릿 칩 쿠키보다는 조금 어두운 정도지만 위 표면에 따뜻한 구움색이 입혀지면서 오히려 채도가 올라간다. 스펠트로 만든 것도 맛있었지만 메밀은 또 차원이 다르다! 스펠트에서 느끼는 꿉꿉한 향은 없고, 메밀가루가 주는 묵직한 향이 마치 보리차나 둥굴레차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그것이 다크 초콜릿과 놀랍도록 잘 어우러진다. 일반 중력분은 단지 버터와 설탕을 위한 바탕이 된다고 하면 메밀가루를 섞은 쿠키에서는 메밀가루가 쿠키의 주인공이 된다. 따뜻한 메밀차 첫 한 모금을 마실 때 코로 먼저 느껴지는 메밀의 향이 이 쿠키에 담겨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맛이 강한 초콜릿과 설탕, 버터까지 들어있지만 메밀의 향이 모든 재료를 감싸는 느낌인데 그렇다고 해서 한국적이거나 전통적인 맛이 나는 것은 아니다. 달기만 할 수도 있는 디저트 안에 숨은 savory 한 분위기를 끌어내어 쿠키를 한층 어른스럽고 세련 되게 만들어준다. 보통 너트류를 제과에 사용할 때는 오븐에서 미리 한번 구워주면 그 향이 배로 깊어지는데, 그런 은은하지만 확실한 변화다. 밀가루와 버터, 설탕으로 이루어진 익숙한 느낌이 아니라 복잡하고 체계적으로 쌓아 올린 완성도 높은 맛이라고 해야겠다.

 굉장히 기쁜 충격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의욕적으로 반복해서 이 쿠키를 만들어 나 자신에게 검증시켰고 이것이 지금은 나의 표준, go to 레시피가 되었다. 스스럼없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변화의 결과가 만족스러운 기준이 되는 경험은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가장 좋아하는 것'이 생기는 것은 정말로 고마운 일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생겨나기 어려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영화, 색, 아티스트에 대해 생각할 때면 삶에 대한 의욕이 생겨나듯, 든든한 레시피를 가지게 된다는 것은 내 정신을 부유하게 만들어준다. 미뤄왔던 변화를 시도해 마음에 드는 경험을 하고 나니 조금은 용기가 난다. 그날따라 가보지 않았던 길로 방향을 바꿔보았는데 있는지도 몰랐던 아름다운 나무를 발견하는 경험이었다. 그다음 날에도 다시 한번 그 길로 가보고 그 나무에 한번 더 감탄하며 또 내일을 기약한다. 내 삶과 주변에 있지만 낯설고 못마땅해 내가 애써 외면하는 크고 작은 것들이, 또 먼길을 돌고 돌아 도착했을 때는 어떤 모습으로 내 삶의 일부가 될까? 그것이 두렵기도, 귀찮기도, 기대되기도 한다.

  


작가의 이전글 망친 레몬 타르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