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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Jan 06. 2022

용기 말고 자신감

갈레뜨 데 루아

  지난 연말에는 유난히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제철이라는 이유만으로 딸기 케이크가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되는 점은 이상해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현상이다. 좀 궁금했던 한 가지, 도대체 언제부터들 당연한 듯 슈톨렌을 먹었지? 마치 십수 년째 매년 그래 왔다는 듯, 대단한 별미인 듯 당연하듯 하는 모습들이 생소하기도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혼란스럽기도 했다. 내 경험상 그렇게 대단히 좋은 디저트가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직장 동료가 슈톨렌을 '서양의 약밥' 같다고 표현해서 크게 공감하고 웃었다. 있으면 먹지만 굳이 생각나지 않고 그다지 신나는 디저트는 아닌 것. 베이커리들은 너도 나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넘쳐나는 케이크와 디저트들을 선뵌다. 많은 양의 주문을 받고 또 제품을 내보내며 마치 자신들이 크리스마스를 책임지고 있는 듯, 힘들다며 우는 소리를 하는 곳도 적잖이 보인다. 또 원하는 제품을 주문하지 못해 세상이 끝난 듯 좌절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을 보는 것도 부지기수. 케이크 주문 온라인 링크가 안 열린다며 구멍가게 장사하냐며 디저트 업체에 공격적으로 코멘트하는 모습도 보았다. 크리스마스에서 케이크가 그렇게 중요했던가? 행복하려고 하는 크리스마스 축하에 어울리지 않는 마음들.  

  이 소란한 크리스마스 케이크 대 혼란 속을 거닐다 보면, 다소 심플하고 오래 된 느낌의 디자인을 한 ‘Galette des Rois (갈레뜨 데 루아)’를 만드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갈레뜨 데 루아는 두 개의 파이지 속에 아몬드 크림(frangipane, 프랑지판)을 구워 만든 케이크이고, 정확히는 파이다. 거기에 보통 금빛 종이 왕관이 함께다. 이것도 크리스마스 음식인가 하고 더 알아보면, 그게 아니라 매년 1월 6일 주현절에 프랑스 사람들이 나눠먹는 파이다. 세명의 동방박사 세명의 왕이 아기 예수를 찾아왔던 성경 속의 날을 기념하는 것인데, 그래서 왕의 케이크 ‘Galette des Rois’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King Cake'라고도 한다. 파이 안에는 작은 도자 인형이 들어 있고, 케이크 조각에서 페브를 찾는 사람은 그날 왕 대접을 받는다. 종이 왕관 또한 그의 것이다. 아몬드 크림으로 채워진 재밌는 풍습의 케이크이고, 또 지겹고 보기 싫은 마음도 아직 들지는 않은 이 멋진 케이크를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나? 거기에 올해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재료 중 하나였던 아몬드 향이 가득한 필링이라고 하니,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파이가 아닐까.

 레시피를 한 번만 검색해봐도, 보이는 결과수에 따라 이 디저트가 상대가 될만한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조심스럽게 찾아보니 할만하겠다. 이 케이크, 또는 파이가 한국에서는 생소한 제품인 것에 비해 무척 단순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버터가 레이어 된 페이스트리 파이지와 아몬드 필링 딱 두 가지다. 필링은 재료를 넣고 갈아 섞는 정도로 간단하지만 고민해야 할 부분은 파이지 부분. 널찍한 판 버터를 만들어 반죽 안에 넣어 빠르게 접는 작업을 하는 퍼프 페이스트리 (puff pastry) 반죽을 만들어야 하는데, 때에 따라 약식 반죽인 러프 퍼프 페이스트리(rough puff pastry)를 사용하기도 한다.

 기왕에 하는 것 대체재가 아닌 정통 방식을 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났고 주현절을 다가오는데, 한 번도 만들어보지 않은 이 파이를 실패하고 다시 만들 여유 시간은 부족하다. 처음 시도해보는, 또 실패할 확률이 다분한 것을 억지로 해보기보단 무난한 시도를 목표로 하기로 했다. 이 결정이 나로서는 굉장한 발전이고 성숙이다. 보통 재료나 기법에 있어 '대안'을 이용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지만, 몇 년간의 홈 베이킹 경험으로 배우고 얻은 것은 베이킹에 대한 이해와 스킬만은 아니다. 내 능력치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시간이나 기술적 능력에 있어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것을 구별하는 능력도 생겼다. 대학원 교수가 해줬던 이야기 중, 경험이 많을수록 전문가가 되는 것은 맞지만 알면 알수록 '해서는 안 되는 것', ' 불가능한 것'도 더 많이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아마추어나 학생 디자이너 시절에만 가지고 있는, '무지해서 시도하고 해낼 수 있는 능력' 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무척 공감 가는 이야기이며, 역시 아이들의 서툰 그림처럼 유니크하고 멋진 것은 없으며 실패는 아름답고 어쩌고 다 알지만, 지금 만큼은 내가 나 자신의 능력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버터지를 만들어 손으로 라미네이팅을 하기에는 지금 내가 가진 시간 제약과 스트레스의 무게 또한 크다. 도전과 시도의 가치는 높이 살 수 있겠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해가 넘어가기 전에 만들어진 그럴듯한 첫 번째 파이이기 때문이다.

 정식 반죽이 아니라 러프 퍼프 페이스트리로도 충분히 좋은 모양이 나올지 찾아보니 괜찮을 것 같다 생각해 가장 먼저 파이지를 만들었다. 판 버터를 사용하는 대신 차가운 버터를 그레이터로 갈아 밀가루에 섞고 소량의 물을 더해 반죽을 만들어 냉장한다. 아몬드 가루에 달걀과 설탕을 넣어 만드는 프랑 지판은 미리 완성해 냉장해 놓았다. 파이접시나 틀 없이 넓은 베이킹 시트에 얹은 두장의 반죽이 있고 사이에 필링을 샌드위치해서 만드는 새로운 형태라 무척 긴장이 되었다. 굽다가 모양이 퍼져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냉장한 퍼프 페이스트리를 꺼내 밀고, 가로로 접었다가 다시 밀고 회전시켜 또 밀고 접는 방식을 두어 번 반복하여 다시 한번 냉장고에서 휴지 시킨다. 휴지 시키는 동안 오븐을 예열하고 팬을 준비하는데 오븐이 작다 보니 파이 크기도 작을 예정이다. 최종 크기보다 약간 넓게 밀어 놓은 반죽을 오븐 팬에 올리고 원하는 크기로 원형 표시를 하는데 이때 아주 유용한 것이 타르트 링이다. 날카롭고 멋진 프랑스식 타르트를 만들어 보겠다고 사둔 타르트 링 두 가지의 크기 차이가 , 파이의 아웃라인과 필링이 채워지는 부분의 유격과 거의 똑같다.

 표시된 선 안에 프랑지판을 담고 아무 곳에나 통 아몬드를 하나 올려준다. 누가 찾게 될까? 물론 아무데라고는 하지만 에너지를 담아 의미를 담은 손짓으로 아몬드를 담는다. 그러고 나서 필링 주변 테두리에 계란물을 입힌다. 밀어서 휴지 시켜 놓은 차가운 반죽 중 나머지 하나를 꺼내와 조심이 들어 올려 필링 위에 얹고 테두리를 꼭꼭 누르는데 달걀물 덕에 어느 정도 접착이 된다. 윗 반죽 속에 공기 방울 없이 필링 위에 밀착되도록 살살 눌러 붙이고 아까 원형 자국을 내는데 썼던 타르트링 중 큰 것은 가져와 위치를 잘 잡은 뒤 반죽을 꾹 눌러 모양을 자른다. 그러고 나면 본격적으로 테두리를 꾹꾹 눌러 완전히 반죽을 포개어 접착시키는데, 아래위 파이지가 꽉 붙지 않으면 구멍이 생겨 열리고 거기로 프랑지판이 새어 나올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반죽을 다룰 땐 차가운 상태를 유지시키며 빠르게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마음이 무척 급하고 시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선가 커다란 초침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다. 테두리를 충분히 눌러주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타르트링을 제거한다. 타르트링을 이용해 고정을 한 채로 눌러주니 무척 안정감이 있다. 꽤 괜찮은 방법 같은데 전문가들도 이렇게 하는지 궁금하다. 나름 머리를 굴려 정돈된 과정을 지나온 것 같아 기쁜 마음. 다음에는 달걀물을 바르고 페어링 나이프를 이용해 나름의 문양을 그려주는데, 처음이니 가장 많이 봤던 방식으로 해보기로 한다. 마음껏 문양을 내고 나면 다시 한번 15분 정도 냉장해서 그 사이 늘어졌을 반죽을 긴장시키고 뜨거운 오븐에 넣는다. 걱정과 두려움은 경험이 없어서 더 커진다. 정식 반죽 말고 쉬운 간소화된 방식을 사용해서 예쁘지 않게 나올까 지금은 그게 제일 걱정이다.

 계속해서 오븐을 들여다보며 혹시라도 파이가 잘 부풀지 않거나, 터져서 필링이 흘러나오거나 그냥 푹 꺼지기만 할까 싶다. 언제까지고 오븐 앞을 서성일 수는 없으니 굽는 시간 동안 정리와 설거지를 한다. 경험상 이때 정리 정돈을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무척 괴롭다. 정리하는 사이 파이가 얼마나 구워지는지 눈으로 확인하는데, 파이를 구울 때는 레시피에서 알려준 시간을 무조건 따를 필요가 없다. '진한 금빛의 갈색 Deep golden brown'이라는 영어식 표현은 레시피마다 공통적이지만 이 세상 홈베이커들이 생각하는 그 색은 수백만 가지의 다른 색이겠지. 어쨌든 파이의 표면이 진한 금빛의 갈색이 되었으니 꺼낸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리하다 말고 가서 오븐을 확인했을 때, 멋지게 부풀고 있는 파이의 모습을 확인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지막까지도 제법 그럴듯한 갈레뜨 데 루아로 구워졌다.

 처음 만들어본 페이스트리 반죽이 이렇게 멋진 파이가 되다니! 나에게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은 베이킹만 있었던  해였다고 스스로에 대한 나름의 피드백을 주고 있던 차에 이렇게 성공적인 갈레뜨  루아를 만들었다.  주간 두려웠던 파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내고 나니, 당연한 소리지만 두려움은 그저 허상이자 안전하게 도망치기 위해 쳐놓은 덫이었구나.  자신이 대견하고 멋지다. 뭐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관두고 싶지는 않다. 어려워도 해보리라는 용기보다는,  것이라는 자신감에 가까운 확신이 든다.  케이크를 만들며 다름 아닌 내가 왕이  기분이다. 만든 갈레뜨는 새해 첫날 가족과의 식사에서 나눠먹었다. 페브 대신 사용한  아몬드는 조카의 차지.

 베이킹을 처음 시작했을 때, 쿠키 몇 가지와 파운드케이크까지만 만들 수 있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레이어 케이크를 만드는 것은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안 가서 처음으로 케이크를 만들었다. 그 후로도 파이 까지는 만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만 곧이어 파이를 만들 줄 알게 되었고, 절대로 내 사전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또 확신했던, 퍼프 페이스트리 도우를 만들게 되어 갈레뜨 데 루아 까지 만들었다. 심지어 터지거나 가라앉지도 않는 멋진 모양으로. 또 어려운 것을 만들어 보고 싶다! 손을 번쩍 들어 모든 이에게 가서 우린 모두 할 수 있고 지금의 걱정과 두려움도 너무 중요하지만 정말로 그냥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무언가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될 때, 그렇게 생각했지만 결국은 하고 말았던 많은 일들을 기억하며, 어차피 될 것이라는 가슴 떨리는 생각이 나면 얼마나 좋을지. 이런 순간이 아름 다고 짜릿한 이유도 그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어려울 것 같은 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은 마음껏 느끼 되, 반드시 언젠가는 늦더라도 해보기로. 나를 포함한 모든 이의 삶 속 어려움 안에, 그것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자신감'이라는 행운이 함께 하기를.

 성공의 기쁨 때문에 조금 흥분 상태이지만 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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