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준수의 탈식민화
국제개발 분야에서는 일반적으로 후원자나 지원기관의 후원과 기금을 받아 프로젝트를 수행합니다. 그리고 그 기금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원기관에서 요구하는 규정을 준수해야 합니다. 회계에 대한 규정도 있고, 보고서 제출 등 보고와 행정에 대한 규정들도 존재합니다.
규정 준수(compliance)는 지원을 받은 기관으로서 당연한 의무이긴 하지만 요구되는 규정이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경우가 많아, 이것이 과연 사업의 효율적인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대다수의 실무자들은 고민해 보았을 겁니다.
* Compliance는 '규정 준수'보다 넓은 범위에서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국제개발 분야에서의 적용과 이해의 편의를 위해 본 글에서는 '규정 준수'로 번역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COMPLIANCE FOR INGO PARTNERS IS RIDDLED WITH COLONIAL ATTITUDES: HERE’S HOW THAT CAN CHANGE…'라는 제목의 블로그 글이 옥스팜 영국에서 발행되어 내용을 공유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글쓴이의 포지션과 역할부터 살펴 보면, 글의 작성자인 Dominic Vickers는 옥스팜 영국의 UK Donor Requirement Advisor입니다. 도너의 요구와 관련한 포지션이 별도로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역할 소개를 보면 UK 정부기금 프로그램의 규정준수를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원조 분야에서의 힘과 자원이 로컬 및 파트너국가의 기관들에게 이양될 수 있도록 원조 분야의 탈식민지화에 힘쓰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도너가 요구하는 규정 준수를 위한 일을 하는 것은 쉽게 이해되는데, '힘과 자원의 파트너국가로 이양', '원조 분야의 탈식민지화'와 같은 표현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규정준수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Dominic Vickers가 쓴 블로그 글을 보면, 이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쓴이는 대규모의 국제NGO(INGO)와 작은 규모의 현지 NGO 간의 관계에 집중했습니다. 국내 국제개발계에서는 한국의 NGO가 파트너국가에 지부를 설립하고 직접 사업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지만, 규모가 큰 INGO들의 경우는 파트너국가 내에서 또다른 파트너기관(편의상 현지 기관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을 찾아 협업을 하는 경우들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규정준수를 요구하는 지원기관은 정부기금을 가지고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유치한 INGO이고, 규정을 준수하며 사업을 수행해야 하는 기관은 현지NGO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의 도입부에서 글쓴이는 규정준수(compliance)를 '현지 기관은 본질적으로 risky하다'라는 식민지적 아이디어로 접근하는 전통적인 개념이라고 언급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모든 위험(risk)는 현지 지역사회가 아닌 도너가 감수한다는 가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대형 INGO가 현지 기관을 컨트롤하려는 문화로부터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한 문화로 전향할 수 있을지, 규정준수를 탈식민지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전통적인 규정준수 시스템은 현지 기관을 반복적이고 관료적인 실사(due diligence) 절차를 통과해야 하는 주체로 만들고, 이는 현장에서의 니즈에 빠르게 대응할 수 없게금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한편으로는 지원기관에서 요구하는 서류작업을 준수하지 못하는 현지기관은 앞으로의 펀딩 기회가 줄어들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글쓴이는 규정준수를 탈식민지화 하기 위한 7가지 방안을 제시합니다. 이 내용은 BOND라는 영국의 국제개발기관 네트워크에서 개최한 웨비나(https://www.youtube.com/watch?v=6W7oDEgStQk)에서 논의된 내용입니다.
7가지 방안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실사(due diligence)를 지역화(localize)하고 지역의 기준(local standards)을 존중할 것
'Start Network'이라고 하는 기관은 지역의 맥락과 언어를 기반으로 디자인된 due diligernce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나와있진 않지만, 지원기관이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규정이 아니라 현지에서의 회계 기준과 규정준수의 기준들을 기반으로 규정 준수 여부를 모니터링하는 모델입니다.
실사(due diligence): the investigation or exercise of care that a reasonable business or person is normally expected to take before entering into an agreement or contract with another party or an act with a certain standard of care. (wikipedia)
2. 지원기관도 현지기관의 평가를 받을 것
지원기관은 현지기관에게 규정준수를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현지기관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현지기관이 지원기관을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은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이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서, 'Start Fund'라는 기관은 국제적인 규정준수 및 실사 평가 정보공개 플랫폼(repository)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플랫폼은 소형 현지기관들이 대형 INGO들(지원기관)의 규정준수 시스템과 실사 절차를 파악하고 검토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대형 INGO들도 본인들이 신뢰할 만한 기관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현지기관들과의 상호 신뢰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3. 전통적에서 벗어난 규정준수 시스템을 참고하여 배울 것
세금 납세자(ODA사업의 경우) 혹은 후원자들의 요구는 부적절한 관료주의를 현지 기관에 강요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세금 납세자와 후원자들에 대한 책무가 있기 때문에 관료적인 실사와 점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관점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프로젝트가 원활히 수행되면서 기금이 목적에 맞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기금을 사용하는 주체(현지 기관)에게 불균형한 부담이 주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영국의 National Lottery Community Fund(LCLF)라는 기관은 현지의 기금담당자에게 현지 기반의 지식을 활용하여 이슈들을 해결하고 불필요한 서류작업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전통적인 규정준수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변의 사례들을 참고하여 전통적인 규정준수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4. 중요한 것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자유를 부여할 것
USAID 및 Global Giving과 협업하고 있는 필리핀의 Center for Disaster Preparedness(CDP) 기관은 현지 기관에게 요구된 52개의 준수사항을 1개로 줄였습니다. 이들은 현지어로 된 단순한 템플릿을 사용하였고, 수많은 입찰 참가 서류들을 대신하여 비디오영상을 제출하도록 권장했습니다. 중소 기관의 경우 준비된 서류문서가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서류 작업을 요구하는 대신에 기관의 거버넌스, 파트너십 가치, 재정상황 등을 실질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영상 자료 제출을 권장한 것입니다.
5. 기금의 이점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해(harms)가 발생할 수 있음을 이해할 것
현지 기관은 해당 기금이 없더라도 기존의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수행해 왔습니다. 때문에 지원기관은 지원 기금이 기존의 프로젝트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추가적인 기금이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을지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6. 현지 지역사회의 자산을 이해하고 활용할 것
전통적인 규정준수와 실사 평가에서는 현지 지역사회의 자산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지에서는 다양한 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인적 자원)이 함께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고, 기타 여러 잠재 자원들(지역사회에서 조성된 기금, 현지 정부 기여금 등)이 함께 투입됩니다. 이를 지원기관에서는 고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7. 전통적인 규정준수 시스템에서의 변화지점을 살펴볼 것
앞서 언급된 필리핀의 USAID, Global Giving, CDP 3개 기관 간에는 기금의 현지화, 현지 기관을 지원하는 기금의 조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고, 필리핀 현지 출신의 USAID 직원을 중심으로 한 규정준수 시스템 변화 노력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규정준수 시스템에서 벗어나 현지 중심의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들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국내와는 배경이 다른 내용들이라 직관적인 이해가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만, 요약해 보자면 '현지의 맥락과 상황에 맞는, 일방적이지 않고 양방향적인, 현지 기관에게 더 많은 자율과 권한을 부여하는 규정준수 시스템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내용입니다.
글쓴이는 INGO가 현지 기관에게 요구하는 규정준수를 기준으로 글을 작성하였지만, 국내 국제개발 분야에서는 정부기관-NGO 간의 관계에 이 내용들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상황을 강요하며 회계 정산을 요구하고, 대규모 기금을 유치하기 위해선 수십페이지의 기관소개서를 별도로 제작해 제출하도록 해야만 기금의 투명성과 파트너기관의 책무성이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도한 규정준수 요구는 오히려 사업의 본질적으로 목표로 하고 있는 성과 달성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현지 기관(현지 NGO)과의 협업을 권장하고 있는데, 한국 파트너기관에 대한 신뢰도 부족한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현지 기관을 존중하며 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됩니다. 현지에 대한 이해와 배려, 존중과 신뢰를 기반으로 시스템을 점검하고 개편해야 합니다.
국내 NGO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차 현지 NGO와 협력할 기회들이 많아질텐데, 파트너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기반으로 파트너십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규정준수에 대한 무리한 요구가 있다면 현지의 상황과 맥락을 고려한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원기관에 종속되기 보다는 보다 선도적으로 이 분야의 구조와 체계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는 단순히 국내외 실무자들의 행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현지의 상황과 맥락에 대한 이해와 존중, 파트너 기관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사업의 효과적인 목적 달성을 대한 이야기입니다. 국제개발 분야가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지향해야 하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방향성과 관련된 주제이기 때문에, 규정준수(compliance)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더 자주 논의할 수 있는 장들이 마련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