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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YOND DEVELOPMENT May 30. 2023

역량 관점의 빈곤 정의와 국제개발: 자유로서의 발전

아마티야 센의 빈곤 정의

니제르 농촌지역에서 농업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 대다수의 농민들이 자급 형태의 농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소득 증대가 과연 농업 프로젝트의 가장 상위 목표일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농사는 3개월의 짧은 우기 때만 지을 수 있고 당나귀 수레를 끌고 1시간 이상 나가야 하는 시장은 주 1회만 열리는 상황에서, 1년 치 식량을 저장해 놓은 후에 잉여생산물만 시장에 판매하는 것이 그들의 경제적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소득 증대를 프로젝트의 최상위 목표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식량안보 개선 같은 다른 영역에서의 변화들이 더 커보였기 때문이죠.


이때부터 소득증대 사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어떤 방향이 옳은 것인가, 더 나아가서는 빈곤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석사 과정을 거치면서 아마티야 센의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에 기반한 빈곤에 대한 정의를 접하게 됩니다.  


빈곤을 경제적 요소의 결핍으로만 규정하지 않는 아마티야 센의 이론들은 제가 당시 가지고 있던 고민에 대한 답을 알려주는 듯 했습니다. 발전은 무엇이고, 빈곤은 무엇인지.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는 통합적 지역개발은 어떤 관점이 바탕이 된 것인지 제 나름 더 깊은 고민을 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아마티야 센의 대표 저서 중 하나인 '자유로서의 발전' 중 4장까지의 주요 내용을 정리해 보면서, 국제개발 분야 실무자 혹은 연구자로서, 빈곤에 대한 관점과 시각을 다시금 정리해 보려 합니다.



책의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센은 발전(development)을 '사람들이 향유하는 실질적인 자유를 확정하는 과정'으로 간주합니다. 일반적인 경제사회적인 성장보다 더 광범위한 관점으로 발전을 정의합니다. 물론 소득 증대, 산업화, 사회 근대화 등은 사회구성원들의 실질적인 자유를 확장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자유는 보다 다양한 영역에서 영향을 받는 개념입니다. 즉, 소득증대나 기술적 진보 등은 발전을 위한 과정이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발전의 최종적인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발전의 최종적인 목표는 '자유의 확장'이어야 합니다.


자유는 발전의 최종 목표이지만, 동시에 발전을 위한 주요 수단이기도 합니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의 확장은 경제적 안정을 가져오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경제적 자유의 확장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경제적 성장은 사회적인 자유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자유가 존재하고 각기 다른 자유는 서로 다른 자유를 서로 강화시키며 발전의 목표이자 수단으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자유를 강화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자유(도구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용이성, 사회적 기회, 투명성 보장, 안전보장'으로 구분됩니다. 이 다섯가지의 도구적 자유들은 발전을 의미하는 실질적 자유의 확장(구성적 자유)을 위해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보완하고 강화시키기도 합니다.



자유와 더불어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이 역량(capability)입니다. 센은 자유를 역량(capability)과 연계하여 설명하며, 역량을 '개인이 가치있게 여기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실질적 자유'라고 정의합니다. 즉, 역량은 인간이 달성하거나 되고자 하는 삶의 모습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충분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는 것, 적정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 등이 역량의 예시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빈곤은 '역량 박탈(capability deprivation)'로 규정됩니다. 개인이 추구하는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이 박탈된 상태가 빈곤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는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빈곤을 정의하던 고전적인 방식에 도전하는 개념 정의입니다. 하지만 센은 낮은 소득은 빈곤에 영향을 미치는 도구적 요소이고 소득 외에도 빈곤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들이 많으며, 낮은 소득과 낮은 역량 간의 관계는 개인・가정 혹은 공동체의 각기 다른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유로 역량 관점에서의 빈곤 분석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소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득과 역량은 서로 깊이 연관되는데, 이는 소득이 역량의 중요한 도구로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소득이 증가한다면 자유 실현하기 위한 역량 또한 증대될 수 있고, 그 반대로 기초교육이나 보건과 같은 영역에서의 역량 확대는 더 많은 소득을 증대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강화시키기도 합니다.


다만, 소득 부족 그 자체가 빈곤으로 동일시 될 수는 없습니다. 90년대 기준 미국의 흑인이 상대적으로 부유할 수 있으나 사망률은 다른 개발도상국의 빈곤층보다 높았던 점, 정부 지원을 받는 실업자는 소득 손실은 일정 부분 보완 가능하지만 여러 사회적・심리적 어려움에 처한다는 점 등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시로 등장합니다. 즉, 소득의 측면에서는 보다 나은 조건에 있더라도 사망률, 영양, 심리정서적 상황, 권리를 주장하거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 등 여러 다른 요소들에서는 경제적으로 더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빈곤에 대한 센의 관점은 1999년에 발간된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잘 정리가 되어있지만, 1981년에 출판된 'Poverty and Famine: An essay on Entitltement and Deprivation'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센은 3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1943년 벵갈지역의 대기근 당시, 벵갈지역의 식량 생산은 충분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오히려 기근 전 해보다 식량은 더 많이 생산이 되었는데도 심각한 기근 현상이 온 것이지요.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빈곤은 단순히 경제적인 요인에서만 오지 않으며,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경제적 요인들로부터 야기된다도 이야기합니다.


 아마티야 센의 빈곤 정의는 빈곤을 보다 다차원적인 요소들의 총체로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해 줍니다. 소득 중심의 빈곤 정의에서 사회・정치・심리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역량과 자유가 박탈된 것으로 빈곤을 바라보며 빈곤이 무엇인지를 보다 본질적으로 접근합니다. 센의 역량 관점(capability approach)은 보건・교육・소득을 주요 기준으로 삼은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HDI) 개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인당 하루 $2,15를 개인의 빈곤선으로 규정하는 세계은행의 접근법과는 차별화되는 관점입니다.



아마티야 센의 주요 저서들이 1980~90년대에 출판되었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경제적 측면으로만 빈곤을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관점은 이미 40년 전부터 논의되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국제개발 분야에서는 여러 현실적인 이유들로 인해 여전히 경제 외의 요소들을 다루기 버거워 합니다. 인간개발이나 웰빙 등 다양한 개념들이 등장하고 현장에 적용하려는 시도들이 있으나, 객관성과 효용성 측면에서 여러 논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센의 역량 관점을 기반으로 한 빈곤 정의는 국제개발 분야 종사자들이 기억해야 할 관점을 제시해 줍니다. 저의 몇몇 생각들을 정리해 봅니다.


첫째, 센이 반복해서 강조하듯이 소득 증대는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입니다. 빈곤은 소득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소득 증대는 빈곤문제 해결을 위해 중요한 수단은 될 수 있지만 소득 증대만으로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빈곤 문제를 보다 다차원적으로 바라보면서 교육・보건 등 다른 영역들과 통합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근래 들어 섹터 기반 접근에서 섹터 통합적인 접근(농업+보건의료 등)으로 국제개발 기관들의 관심이 옮겨가는 흐름을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통합적 접근의 필요성을 아마티야 센의 역량 관점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현지 지역사회와 주민들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거나 문제 해결을 위해 변화이론을 그리다 보니 섹터 간 통합이 필요하다는 식의 단순한 접근이 아니라, 대상 지역사회와 주민들의 실질적 자유의 확장을 위해서는 농업 소득 뿐만 아니라 교육, 보건 등 다양한 영역들의 개선이 함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역량(capability)은 개인의 능력 부족 차원이 아닌, 사회환경적과 연계된 개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국제개발 사업에서 역량 강화(capacity building)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역량 강화 요소로는 거버넌스 체계화, 리더십 및 기술 교육 등 다양한 요소들이 있는데,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인지 역량 강화 활동을 진행하는 목적이 마치 참여자들의 '능력과 지식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 지역사회는 리더십이 부재하고 체계가 잡혀있지 않다거나, 이 농민들은 기술교육을 받지 못해 농업기술이나 지식이 부족하다거나 등 대상 지역사회 혹은 개인들의 '능력・지식 부족'에 초점을 맞추고 접근을 합니다. 하지만 아마티야 센의 역량 관점을 기반으로 바라본다면, 개인의 능력과 지식 부족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사회환경적인 요소들이 능력과 지식을 빼앗아간 배경에 보다 집중합니다.


얼핏 듣기엔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야기같지만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접근을 하는지는 국제개발 활동 전체의 방향과 연관될 정도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전자처럼 개인 혹은 조직 자체의 능력과 지식 부족에 초점을 맞춘다면, 주변의 사회환경적인 요소들을 개선의 범위에서 배제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반면, 후자와 같이 개인 혹은 조직이 박탈당한 역량과 자유에 초점을 맞춘다면, 왜 어떻게 누가 역량과 자유를 박탈하게 되었는지 그 주변의 사회환경적인 요소들까지 포괄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됩니다.


국제개발 분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역량 강화(capacity building) 활동들은 많은 경우에 참여자들의 지식이나 기술 습득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른 사회환경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한 기술과 지식의 전수만을 목표로 한다면, 센이 이야기하는 발전(자유의 확장)을 달성하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역량 강화'라는 용어의 사용이 사업 참여자들을 기술과 지식이 부족한 존재들로 대상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좀 더 본질적으로, 역량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역량 강화(capacity building)라는 표현이 사업 참여자들을 기술과 지식이 부족한 존재 혹은 교육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대상화하는 표현이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아마티야 센은 1980년대부터 기근과 빈곤에 대한 연구를 해왔고, 그 결과 국제개발 분야에서도 Human Development Index가 개발되는 등 센의 접근법에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접근법이 거시적이거나 학문적인 영역에서만 주로 적용이 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여러 단위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프로젝트들은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큰 지향점의 설정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발전이란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은 어디인지에 대한 고민과 토론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마티야 센의 빈곤에 대한 관점과 접근법은 이 고민과 토론의 장에 깊은 영감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빈곤과 발전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고 더 활발해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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