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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윤종신 May 17. 2019

우유병

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 - 한남동 이야기

한남동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써달래.


누가?


월간 윤종신.


윤종신이 그런 것도 시켜?


그렇대.


부동산 소설을 써 달라는 거야?


배경이 한남동이거나 주인공이 한남동 출신이거나 지금 막 한남동으로 가는 길이거나.


역시 부동산이네.


기왕이면 잘 쓰고 싶어.


왜?


잘 보이고 싶어.


누구한테?


윤종신한테.


존나 속물같은 소리다.


우유병이야. 우유병.


그게 뭔데?


그 얘기 있잖아. 어떤 여자애가 우유를 팔러 시장에 가. 이른 아침 갓 짜낸 신선한 우유동이를 머리에 이고 먼 길을 가야 해. 졸리고 힘들겠지만 걘 기분이 나쁘지 않아. 왜냐하면 멋진 상상을 하고 있거든.


어떤 상상?


이웃 소를 돌봐주고 얻은 이 우유를 팔아서 병아리를 한 쌍 사야지. 정성껏 길러서 알을 잔뜩 낳게 해야지. 몇몇은 품어서 병아리를 까고 나머지는 팔고, 그래서 닭을 여러 마리 만들어야지. 그럼 알을 더 많이 낳겠지.


그 얘기 알아.


더 들어봐. 그래서 달걀을 자꾸자꾸 팔아서 소를 사야지. 그럼 그때부턴 이웃에서 우유를 얻어다 팔 필요도 없겠지. 그럼 내 소랑 닭들을 밑천 삼아서……


안다니까. 그 얘기랑 너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이번에 존나 개쩌는 소설을 써서 보내는 거야. 윤종신이 볼지도 모르니까. 아니다, 볼걸. 언제가 되든 보긴 볼 거야. 시간문제지.


그래서?


종신님이 막 엄청 좋아하고 이 작가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는 거야.


종신님이래. 미치겠다.


매거진 에디터님 통해서 한남동으로 한번 놀러오시라고 연락이 와. 그럼 나는 몇 번 빼야지. 품위가 있고 가오가 있으니까.


지금 말하는 거 보면 그런 거 하나도 없어 보여.


그쪽은 어쨌든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 모르잖아. 아무튼 기어이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술도 가볍게 한잔하고, 노래방에도 가는 거야.


한남동에 노래방 있어?


없겠어? 거기도 사람 사는 데잖아.


검색해보니까 엄청 부자 동네 같은데. 부자들도 노래방 다녀?


고급 노래방 가지 않을까?


아무튼 그래서. 고급 노래방이 있다고 치고.


나는 또 몇 번 빼다가 못 이긴 척 한두 곡 뽑는 거야. 근데 종신님이 와, 작가님! 노래도 진짜 잘하신다. 작가만 하기엔 너무 아까운데요, 이러는 거야.


그래. 참 그러겠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중요해. 칭찬받고도 별생각 없는 척 표정 관리를 잘해야 되거든. 아, 네. 아니에요. 무슨 그런 말씀을. 내가 그러겠지. 근데 종신님이 아니, 빈말 아니고 피처링 한번 하세요. 이러는 거야.


너 노래 그 정도로 잘하진 않아.


알아. 그쪽이 한 말은 당연히 예의상 나온 거겠지만, 난 그 순간, 동요한 티를 전혀 내지 않으면서 수줍게, 한번 해보고 싶긴 해요. 그러는 거야. 그럼 말 꺼낸 쪽이 난처해질 거 아냐. 그럼 난 아…… 죄송해요. 제가 또 농담 진담 구분을 못하고…… 이럴 거야. 그럼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시켜줄 수도 있잖아. 우리나라 사람들 그런 거 있잖아.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어요 이러는 사람한테 정색하고 언제요? 어디 가서 뭐 먹을 건데요? 저 월요일에 쉬어요. 이러면, 속으로 뭐야 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그럼 월요일에 만나자고 하잖아.


진짜 널 어쩌면 좋냐.


근데 또 이게 대박이 나버리네. 본의 아니게 소설보다 음원으로 유명해져버려. 막 예능 출연도 하고.


너 예능 나가서 이런 소리 하면 악플 팔만대장경처럼 달린다.


그런 건 됐어. 그때쯤 되면 대형 로펌에서 따로 관리해줄 거야.


병이 깊구나.


이게 우유병이야. 우유 파는 여자애가 우유 팔면서 머릿속에선 소 한 마리 벌써 장만한 얘기. 왜 인터넷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좀 맘에 드는 사람하고 손끝만 스쳐도 헉…… 영어 유치원 알아봐야 하나? 이런다고 하잖아.


그건 또 뭐래.


헉. 방금 손 스친 거 맞지? 번호 물어보면 어떡하지? 사귀면 얼마 만에 뽀뽀하면 되지? 상견례는 한정식이 괜찮겠지? 아이는 하나를 낳더라도 잘 키우고 싶은데 영어 유치원 시세가 어떻지?


너 나랑 처음 만날 때도 그런 생각 했어?


아무튼 한 일 년 바짝 땡겨서.


왜 말을 돌려, 그런 생각 했어 안 했어?


일 년은 무리려나? 몇 년 소처럼 일해서 한남동에 집을 사는 거야.


좋네.


좋지.


그러면 결국 부동산이네.


그러네, 얘기가 그렇게 되네.


진짜로 한남동에 집 있으면 좋겠다.


내가 원고료 받으면.


원고료 그렇게 많이 줘?


집은 못 사도 우유는 한 병 사줄게.


이제 병 우유 안 팔잖아.


그러네. 그럼 한 팩 사 줄게.


병 우유가 맛있었는데 왜 없어졌을까.


언젠가 한남동도 없어지겠지.


얘가 또.


한남동 없어지면 한남동에 있던 내 집은 어떡해?


또, 또.


근데 어차피 그쯤 되면 나는 죽고 없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그때까지 너랑 사귈까?


너 나랑 사별하고 싶어?


그런 것 같아.


나도 그런 것 같아.


박서련

1989년 철원 출생. 201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2018 한겨레문학상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이 있다. 본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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