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글쟁 Feb 15. 2021

노인의 트레이딩

누군가에겐 쉽고 누군가에겐 어려운

결혼을 하고 보니 나를 빼고 모두가 주식투자를 하고 있었다. 주식투자는 곧 패가망신이라는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몇 년 간은 시부모님과 남편은 주식투자를 하더라도 나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주식투자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었고 결국 나도 하게 되었다.


벌써 나도 몇 년째 투자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집안에서 나는 아주 초짜 트레이더이고 그다음은 남편, 그리고 어머님, 최고 경력자는 아버님이다. 나는 초짜이긴 하지만 스마트 기기에 가장 익숙한 신세대다. 반면에 아버님은 오랜 투자 경력을 자랑하지만 일반 기기를 다루기도 어려워 옛날 스타일을 고수하는 트레이더다. IPTV가 나온 이후 아버님은 헬로비전에 가입해 TV 화면에 주식 종목을 띄워 보는 서비스를 이용해 투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아버님이 급히 나를 부르셨다. 급하게 아버님 댁에 가보니, TV 화면에 보여야 할 그 주식 종목 창이 사라진 것이다. 이리저리 리모컨을 만져보고 셋톱박스를 만져보아도 그 창은 원래 없었다는 듯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헬로비전 고객센터에 전화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고객님, 그 서비스는 이제 폐지되었습니다."

그렇다. 그 서비스는 이제 폐지되었단다. 남녀노소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시대에 TV 창을 들여다보며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시대의 흐름에 따른 적절한 폐지였던 것이다. 아버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아버님께서 투자하는 종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방법이 사라졌으니 아버님의 일과에 큰 차질이 생긴 거다. 말은 그렇지 않았지만 아버님은 살짝 당황하고 초조한 모습이었다. 나를 비롯해 어머님과 남편은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생각해야만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버님이 심각한 기계치라는 것.


전화도 어머님의 폴더폰뿐이고 전화를 거는 용도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휴대폰을 개설하는 방법은 우선 작은 화면이라는 점에서 제외됐다. 컴퓨터는 너무 단순 정보 확인용으로는 너무 거창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태블릿 PC다. 태블릿으로 절충안을 찾고 나서 나는 바로 아버님 댁에 인터넷을 개통하고, 원하는 기종의 태블릿을 바로 구입할 수 있는지 몇몇 매장에 전화를 걸었다. 인터넷 개통은 당일 바로 됐고 태블릿은 다음 날 매장에 배송되어 바로 구입할 수 있었다.


태블릿을 집에 가져와 이것저것 설정했다. 기계치인 아버님이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세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태블릿을 설정하고 사용법을 따로 메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버님께 태블릿 사용법을 알려드리니 의외로 금방 사용법을 익히셨다. 태블릿을 켜고 암호를 풀고 주식 앱에 들어가 자신의 관심종목을 확인하는 것까지 말이다.


내가 할 일은 이제 다 끝났구나 생각했다. 다음 날 아버님의 전화를 받았다. 관심종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싶다고 하셨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아버님은 그 실시간 시황만 확인하면 주식투자는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있었다. 나는 그 아버님의 눈빛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실시간 시황 확인은 증권사의 계좌를 만들고 본인의 모바일 인증을 해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본인 명의의 모바일 기기가 없고 공인인증서 조차 없기에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우리는 머리를 짜내 어머님 명의의 로그인 아이디를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 가입절차를 하나하나 밟아가는데, 어머님의 주민등록증과 은행계좌, 은행계좌로 부여되는 개별 번호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어머님 주민등록증을 가게에 두고 오셔서 못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어머님 통장도 가계에 있어서 못했다. 계좌번호를 알아도 인터넷뱅킹을 쓰지 않으니 또 계좌에 부여되는 번호를 은행에 직접 가서 통장에 프린트해야만 했다. 하....... 본인인증의 길이 이렇게도 길고 험했다니. 스마트폰으로 모두 가능한 일들이 아버님에게는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나는 가게에 나와 다시 아이디 만들기를 시도했다. 말로 설명하기 지쳐 직접 어머님 계좌에 부여되는 번호를 확인하고 입력하기 위해서다. 가게에 앉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어머님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고 나니 어머님 휴대전화로 가는 문자 인증번호 6자리를 입력하란다. 휴대전화는 아버님께 있었다.

나는 아버님께 전화해서 문자 보는 법을 말로 설명하고 인증 번호 6자리를 불러달라고 했다.


"아버님, 전화받으시면서 전화기 버튼을 보면 편지 모양 버튼이 있을 거예요. 그 버튼을 눌러서 방금 간 문자, 제일 위에 있는 문자에 번호 6자리를 불러주세요."

"아, 그거?...... 문자가 안 나오는데?"

"화면을 누르면 안 되고 편지 모양 버튼을 눌러보세요."

"아, 그거!....... 안 나오는데?"

"편지 모양 버튼 누르셨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나요?"

"아, 그거!....... 난 안 보이는데?"


문자 확인이 안 된다는 아버님의 말을 몇 번 들으니 아차 싶었다. 안되는구나. 아버님이 아니라 내가 포기하지 못했구나. 내 마음속 든든한 아버님이 한순간에 노인이 돼버리는 순간이었다. 노인이 되어버린 아버님은 우리와 같이 지금을 살아가야 한다. 과거와 지금 그리고 내일의 공존, 그 삶의 순간들이 겹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되고 누군가는 끝까지 안 되는.






매거진의 이전글 뜻밖의 모성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