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2년 1월. 홍콩의 대학을 떠나면서 미국에 있는 여러 대학교에 지원했다. 미국 대학에 두 번째 도전이다. 홍콩에 가기 전 해에는 면접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홍콩에서 1년 커리어를 쌓은 후 다시 미국대학에 지원한 두 번째 해에는 면접요청이 쇄도해서 대학 간에 시간이 겹쳐 날짜를 재조정해야 할 정도였다.
첫 면접은 시애틀 북쪽에 있는 한 주립대학교의 자유전공학부였다. 워싱턴 주에는 주립대학교가 일곱 개가 있는데 3번째 정도의 규모다. 시애틀 북쪽 한 시간 거리의 인구 8만 정도의 벨링햄이라는 도시에 있다.
나는 사회심리학 중에서 세부적으로 문화심리학을 공부했는데 이곳에서 보기 드물게 '문화심리학' 전공 교수를 뽑는다고 공고를 냈다. 이건 굉장히 드문 경우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미국의 심리학계에서 문화심리학은 여전히 변방의 학문이었기 때문에, 관심은 있지만 굳이 그 전공에 특화된 교수까지 뽑아야 할 정도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보통 다른 대학들은 사회심리학 전공 중에서 ‘문화심리학' 강의가 가능한 사람을 뽑았다.
나는 1월에 홍콩대학과의 계약을 마치고 하와이로 돌아와 만 3일도 쉬지 못하고 워싱턴 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아마 면접일이 1월 10일이었을 것이다. 밤 10시에 도착한 공항에는 여성우울증에 관한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데이나 잭 교수(상담심리학)가 마중하러 왔다.
데이나를 필두로 4일 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다. 둘째 날 같이 점심을 먹은 일본계 미도리 타카키 교수와 아일랜드 출신 닐 오모추 교수(나는 나중에 두 사람과 가장 가까이 지낸다), 마지막 날, 저녁을 먹은 알래스카 원주민 출신 테니스 세일튼 교수. 마약중독에 찌들었던 과거를 가진 학생 하나는 내 발표시간 내낸 거의 날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지만 다 끌렸다. 이 친구는 싱글맘인데 나중에 아주 친해진다. 키가 작고 유쾌한 교직원인 수잔은 휴식 시간에 날 사무실 뒤에 있는 공간으로 데리고 가서 긴장을 풀라고 담배도 줬다.
면접의 하이라이트는 공개강의다. 이 대학은 공개강의에 모든 교수와 모든 학생이 자유롭게 참석하게 했다. 시간도 두 시간 내에서 아무 주제나 원하는 것을 시간제한 없이 발표하라고 한다.
강의를 재미있게 하려면 넉살 좋고, 반응이 좋은 한 사람을 타겟으로 삼고 수업 내내 끌고 가는 게 좋다. 질문하고, 놀리고, 같이 웃고, 공감을 받고, 중간에 숨도 돌리면서 청중의 반응도 보고, 등등. 나는 (나중에 학장이 된) '존 바우어'라는 나보다 5살 정도 많은 교수를 상대로 계속 질문과 농담을 이어가면 면접강의를 했다. 사람 좋은 존 바우어는 마치 사전에 나와 연습한 개그 파트너처럼 유머 넘치는 애드립을 보여주었다.
나: "존, 문화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기독교 문명의 원죄의식 때문에 서양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리면 죄책감이 커지는데. 너는 서양 사람이니까 죄책감이 좀 많겠구나, 나는 아시아인이라서 별로 없는뎅. 너는 우짜냐? 쏴리!"
존: "Really? Damn! (나, 엿 됐네)"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발표를 마친다.
이 대학은 히피 스쿨로 불린다. 우선 원로교수의 1/3 정도가 실제로 60년대 반전운동에 참여했고 일부는 히피집단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 나머지 젊은 교수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이며 흑인, 아시아인, 치카노(멕시칸)들이 고루 섞여 있었다. 수업은 반드시 20명 미만의 학생으로만 구성되어야 하며, 교수의 일방적인 강의는 허용되지 않고 대화법을 통해서 강의를 해야 된다. 성적은 A-F 학점으로 평가하면 안 되며, 한 한기 동안 학생이 성숙하고 발전한 내용을 한 페이지짜리 보고서로 작성해야 한다. 학생과 교수의 매우 밀접한 관계가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전공을 학생이 스스로 정한다. 만일 전공 명이 "20세기 문명의 심리주의 글쓰기"라며 학생은 4년 간 심리학, 역사학, 문학 수업 등을 자유롭게 수강하면서 자기만의 전공커리큘럼을 정해서 공부하는 식이다. 진보적이고, 참여적이며, 학생 중심의 교육이다.
3박 4일 간 이 대학에서의 했던 면접은 날 잘 보이려고 스트레스를 가득 안고 "제발 날 간택해 주세요!"라는 저자세로 평가받다가 오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 알래스카 원주민이며 미술전공 교수 테니스 세일튼의 배웅을 받고 공항으로 가며 나는 어디 페스티발에 초청을 받아서 같이 합숙을 하며 뻐근하게 놀다 온 기분이 들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후 나는 다른 대학에서도 계속 면접을 보았다. 미국 대학은 빠른 곳은 1월 초, 늦은 곳은 2월초에 면접을 보고 일주일 안에 채용 오퍼를 준 후, 당사자에게 오퍼를 받을 지 결정을 내리는 데 최대 2주 정도의 시간을 준다. 그래서 미국 대학의 면접시장은 1월부터 꼬박 두 달 계속되는 시즌이다.
몇 개의 대학에서 더 면접을 보고, 1월 말 애리조나와 엘에이에 있는 대학에 면접을 가려고 준비를 하던 중에 워싱턴의 대학에 전화가 왔다. 이 대학은 남달리 끌렸다. 여기를 교수를 뽑는 게 아니라 '나'를 원한다는 생각을 아주 선명하게 주었다.
오퍼를 바로 수락할 필요가 없고 2주 간 생각할 시간이 있으므로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일정이 정해진 애리조나의 대학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면접을 하는 도중에도 이상하게 이 대학의 생각이 계속 났다(애리조나의 대학도 마음에 들었지만). 애리조나의 면접을 마치고 다시 엘에이의 대학에 면접을 보러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엘에이에 있는 대학에는 전화를 걸었다.
"고맙지만 면접을 취소하겠습니다." 심리학과 학과장에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결국 워싱턴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2.
인디언 교수 대니(Danny)는 인디언 전통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암트렉 기차가 서는 벨링햄 역의 2층은 해가 질 때 경치가 너무 좋아서 작은 연회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내가 속한 대학은 교수가 온 지 만 1년이 지나면 그 곳에서 파티를 열어주었다. 수업을 마치고 30명의 동료들이 모여서 와인을 마시며 돌아가면서 덕담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학장은 나보고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러자 인디언 교수 대니가 구석에서 뭘 가지고 온다. 인디언들의 전통담요였다. 대니는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진짜 친구가 되었다고 느끼면 따뜻한 담요를 선물로 주는 풍습이 있는데, 내게 담요를 걸어주는 의식은 그걸 따른 것이다. 나보다 스무살 쯤 나이가 많고, 허리까지 오는 포니테일에 키가 2미터에 가까운 거구의 대니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는 내가 그 대학에 일하던 6년 동안 마치 삼촌처럼 날 대했다.
1년이 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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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수업은 눈물 나게 어려웠다. 그 대학의 규칙은 수업을 세미나 방식으로만 해야 되고 교수가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수업은 금지다. 교재을 요약해서 발표자료를 만들어 설명하는 것은 미리 준비하면 되니까 처음이나 떨리지 시간이 가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반면, 세미나 수업은 학생들이 계속해서 말하는 내용을 들으며 의도한 주제로 유도해야 되고 멀어지면 붙잡아 와야 된다. "이런 점에서는 그 관점이 맞는데 이런 방향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런 애드립을 끝없이 해야 되는 세미나 수업은 골이 아팠다.
특히 영어로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건 내게 고문과 같았다. 똘똘한 학생들은 수업 중에도 문어체를 쓰지만 수학능력이 떨어지는 친구들은 수업 중에 하는 말도 일상에서 쓰는 말처럼 온갖 은어와 유행어로 가득하고 논리가 없어서 이들이 수업 중에 어떤 방향으로 튀는지 알기가 어렵다. 나는 이들이 하는 은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단어가 여성의 성기를 암시하는 것을 모르고 썼다가 망신을 당한다. 한참 웃던 학생들은 자기들도 미안해서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너무나 웃기는지 차마 참지를 못했다. 그저 울고 싶었다.
어떤 날 새벽 4시까지 수업 자료을 읽다가 도저히 내용을 소화하지 못한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전화를 해서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휴강을 했다. 수업시간에 교수가 말이 안 떨어져서 멍하니 있는 것보다 그게 덜 창피하고 나았다. 아프지 않은데 휴강을 했으니 양심에 찔리고 거짓말을 하는 내가 부끄러웠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학과회의는 절반밖에 못 알아들었다. 매주 수요일에 조찬 겸 학과회의를 하면 다들 평상시의 속도대로 빠르게 대화를 한다. 다른 우리말로 치면 "그랬삼?" 하는 식으로 말들을 하니 난 유머도 못 알아듣는 바보천치였다. 특히 인디언 대니는 늘 회의가 시작할 때마다 뒤집어지는 웃긴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었는데, 나로서는 그가 농담을 시작하면 괴로워 미칠 지경이 된다. 신경성 위염이 재발했다.
한 주의 수업은 목요일 오후에 끝이 난다. 목요일 저녁에 집에 가서 혼자 밥을 해 먹고 나면 마음이 편하고 좋아서 밤새 잠을 안 잤다. 자면 다음 날이 오는 게 무서워서 일부러 안자고 버티느라 위염이 있는데도 밤새 술을 마셨다.
그래도 대부분 진보적인 성향이 학생들이 들어오는 대학이라서, 외국인, 소수에 대해서 너그럽던 그들은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눈치를 주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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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시계만 가는 것은 아니고 내가 살던 도시의 시계도 간다. 기어이 1년이 지나가고 비로소 학과 동료들이 상징적으로 가족이 된 것을 축하해주는 파티를 열어준 것이다.
3번째 학기에 접어드니 수업은 할 만하기 시작했고, 학과 회의에서도 이제 대화의 80프로정도는 알아들었다. 이제 대니는 웃긴 얘기를 할 때 전보다 좀 천천히 했다. 가끔 웃어야 될 포인트에서는 내게 눈을 찡긋했다.
3.
처음에는 평생 수업준비로 벌벌 떨면서 죽을 때까지 고생할 것 같았지만, 나도 급속도로 그 대학 사람이 되었다.
그 곳의 학생들은 많이 달랐다. 채식주의자가 아주 많았고 학생의 90프로는 백인들인데도 불교신자들도 많았다. 대부분 진보적이지만 게을렀다. 세상과 이웃을 보는 눈은 따뜻하고 심장은 뜨거웠지만, 정해진 날에 과제를 내거나 하는 것은 이들의 성향과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쁜 것으로 경멸했다. 아메리칸 인디언 문화에서는 대답을 빨리 하면 경솔하다고 비난을 받는다. 주어진 시간 안에 남들보다 정답을 빨리 맞춰야 된다고 믿는 우리가 아는 교육은 평균이 되기를 거부하고 남들과 다름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에게 악(evil)과 같았다.
시애틀에서 반세계화 시위가 열렸다. 학생들은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 중에 잡혀가면 대학생이라고 대충 훈방으로 내보내는 한국과 달리 그곳에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경찰에 잡혀서 호된 고생을 한다. 그래도 시위에 참석하겠다던 학생들은 내게 수업에 빠지야겠다고 알려줬다. 나는 그 주에는 중요하지 않은 다른 걸 다루고 원래 해야 하는 진도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미루었다. 시위를 다녀 온 다음 주 수업시간에는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서 대화를 했다. 학생들은 시위 현장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나는 그게 제대로 된 수업이라 믿는다.
매년 개최하는 학술대회에서는 교수들과 학생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뭘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학술제에서 뒹굴고 놀았다. 자유전공학부였지만 예술을 하겠다는 친구들이 많았다. 심리학을 공부해도 불교심리학을 공부하겠다는 학생들이 많았고. 학술제에 음악하는 친구들은 노래를 발표하고, 연극하는 친구들은 10분 정도로 짧은 연극의 한 장면을 공연한다. 영화를 만드는 친구들은 짧은 비디오를 만들어서 계속해서 틀었다. 나 보고도 진행만 하지 말고 뭔가 발표를 하라고 강권을 한다. 나는 영어로 번역된 박노해의 시를 읽었다. 반전운동하던 시대에 존 바에즈를 따라다녔던 가수 출신 여자 교수는 학생들과 준비한 곡으로 짧은 콘서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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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교수가 어딜 가서 말을 하면 돈을 준다. 공무원들은 속으로는 비웃으면서도 교수가 나타나면 마치 석학이라도 온 것처럼 입에 발린 말을 해준다. 또 어떤 교수들은 그게 진정이라고 믿고 헤벌레거린다. 기업체에 가면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속으로는 ‘현실은 다르지’ 하면서 비웃는다. 서로 배우려 하지 않는다. 교수고 공무원이고 기업인이고 서로 혐오하고 열등감을 해소하려 하나라도 더 잘 났다는 것을 확인시킬 정보를 찾아보려고 혈안이다.
그 작은 도시에서는 특강을 가면 스타벅스 상품권이나 반즈앤노블 서점의 상품권을 줬다. 3~5만원짜리. 특강은 사회를 위한 봉사이지 돈 버는 수단이 아니다. 은퇴한 노년의 신사들은 컨트리클럽의 하우스를 빌려서 가끔 날 불렀다. 다른 문화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전공에 대해서 특강을 요청하기도 했고,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의 사회에 대해서 강의를 요청했다. 나는 일부러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 자료를 주기 위해서 뒤져 보니 518 민주화 운동을 영어로 만든 자료가 참으로 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한국에서는 논란이 많지만 영어로 소개된 책자에는 대개 Kwangju uprising (광주항쟁)으로 표현됐다는 것도.
어느 날, 강의를 마치니 어느 노신사가 다가왔다. 자신은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실제로 몇 명의 북한군을 죽였고, 지금까지 오래 동안 그들을 증오했으며 노년이 되면서 그런 자신의 과거를 못 견디게 후회한다고 했다.
이제 알 것 같다. 그곳은 천국이나 해방구 같은 곳이었다. 천국이란 인종, 국적, 민족, 나이, 성별, 성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어울리던 곳이다. 그런 곳이었다. 나는 너무 세상 경험이 없어서 그곳이 내게 진정 자유로운 곳이었음을 모르고 그곳을 떠났다. 마치 고향을 버리고 대처에 돈을 벌려고 나간 사람처럼. 돈을 더 벌겠다고 대처로 나갔지만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돈은 더 줬지만 영혼이든 뭐든 팔아버린 대가일 뿐이다. 대처에는 실제로 차가운 새벽 공기만 있을 뿐인데 낮이면 차갑지 않은 곳인 것처럼 무엇인가로 덮어서 감춘다.
한국에 돌아오니 세상에 교수하기가 이렇게 편한 줄 처음 알았다. 컴퓨터로 강의자료를 만들고 강의하는 것은 누워서 아이스크림 빠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강의와 연구가 아닌 황당하고 어려운 것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게 보인다. 겉으로는 점잖고, 속으로는 중도 우익이지만, 밥그릇을 건드리며 번개같이 태극기 부대로 변하는 사람들이 대학에도 참으로 많다. 기말고사를 마치면 학생은 자기가 무엇이 부족한지 알려주시면 고맙겠다고 하는 장문의 이 메일을 보낸 뒤에 B+학점을 A로 바꿔달라고 슬그머니 요청한다.
학교는 집처럼 따뜻한 곳으로 남으면 좋겠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기술인재를 만들어서 키우는 곳 따위가 아니라. 내가 잠시 살던 어느 작은 도시의 대학에서는 교수도, 학생도 취업이나 성공과 같은 구체적인 무엇을 얻기 위해서 공부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공부를 가르치고 배우는 대학.
히피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다소 극단적인 경우에는 남자와 여자가 배타적으로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도 소유로 생각하고 죄악시했다. 그러나 무소유의 정신이 그른 것은 아니다.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공부는 그 목적에만 충실할 뿐 다른 곳에 쓸 곳이 없다. 법을 배워서 어떤 상황이든 목적에 맞춰 기소하는 예술을 배우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나이가 좀 알 것 같다. 공부에 목적을 두고 공부하면 안 된다는 걸.
인생에서 뒤로 돌아가는 경우는 없다. 나도 12년 전의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다만 잠시 해방구에 살았던 기억은 눈물이 나도록 소중하다. 비록 6년간이지만 그런 곳에서 내가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내 인생의 우연함에 감사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