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세요, 빛의 퇴적물을
불의 찬란이 촛농을 만드는 걸요
동굴 밖에는 종려나무가 흔들리고 청귤이 익는데
그는 내 손을 끌어당겨 만져보라 했습니다
참회하는 자의 젖은 얼굴을
자신의 내부를 명예롭게 할퀸 자국을
그를 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폭양이 그림자를
가혹하게 만드는 걸 알면서도
종려나무가 흔들리고 청귤이 익나니
종려나무가 흔들리고 청귤이 익나니
혼잣말을 하면서
동굴의 입구를 보았습니다
<에코> 중
시는 폐허에서 시작하는 무엇인지도 모른다. 모두 휩쓸고 지나가 무엇 하나 온전하지 않은 자리, 거기 이제는 없는 어제의 감정들을 세워두고 시인은 비로소 첫 행을 쓸 수 있을지도.
오늘의 백장미는 희고 옅지만 어제의 백장미는 창백하다. 모든 생기는 시간의 흐름에 실려 가고 남은 것은 희미한 유령들뿐. 자꾸 변하고 시시각각 상하는 것들 앞에 시는 무력하다. 언어는 늘 느리고 가늘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문득 침대 밑에 밀려온 어제의 파도 자국을 보았을 때, 발을 적시지 않고 바다를 걸을 때.
시인은 자꾸 희박해지고 창백해진다. 창백한 것들을 기록하느라 시인의 손가락은 앙상하다.
이것이 슬픔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마르고 차가운 것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