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폭력만이 소음을 일으킨다. 소음은 점점 커져간다. 마치 슬픔처럼. 벨러의 말마따나 오로지 슬픔만이 공간을 필요로 한다. 반면 폭력은 공간을 그냥 차지한다. 나는 죽은 가방을 손에서 떼어내 눈밭에 떨어뜨린다. 그리고 장화 신은 발로 그 위에 눈을 밀어 덮는다. 싸늘한 무덤이다. 화가 난 나는 축사 벽에 주먹을 휘둘러 손마디가 까지도록 후려친다. 이를 악물고서 축사 칸막이들을 바라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축사는 젖소들로 다시 채워질 것이다. 부모님은 새로 주문한 소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빠는 사료 저장고에 페인트칠도 새로 했다. 저장고가 너무 눈길을 끌어서 죽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을 자극할까 봐 걱정된다. 문제는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 듯 보이리라는 것이다. 맛히스 오빠의 죽음과 구제역 이후에도 모두가 자기 삶을 살아가듯이. 하지만 나는 아니다. 죽음을 향한 갈망은 전염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나의 반에 들끓는다는 머릿니처럼 이 사람 머리에서 저 사람 머리로 - 이번에는 내 머리로 - 뛰어 옮겨가는 것인지도. 나는 눈밭에 털썩 드러누워 양팔을 위아래로 움직여본다. 지금 일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도자기로 만들어졌고 누군가가 나를 실수로 떨어뜨려 산산조각 낸다면, 그래서 나를 보고 내가 부서졌다는걸, 포일에 싸인 그 빌어먹은 천사들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다는 걸 알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가늘어진다. 손바닥에 닿던 장도리 손잡이의 감촉이, 수탉 울음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하다. "너희는 죽이지 말고 스스로 복수하지 말지니라." 나는 복수를 해버렸고, 그렇다면 재앙 하나가 더 남았다는 뜻이다.
죽음은 위대한 음악가의 가곡처럼 문을 두드리고 올지도 모른다. 커다란 외투를 펄럭이며 폭풍에 실려와 문 앞에 서면 정중한 방문객처럼 모자를 벗고 인사를 건네는지도. 그러나 그날 저녁 야스의 집에 찾아온 죽음은 난폭했다. 맛히스 오빠는 스케이트를 타러 갔고 차가운 물속에서 발견됐다. 그날 이후 이 집은 죽음이 거주하는 장소가 되었다.
맛히스, 오버, 야스, 하나. 성경에 나오는 네 명의 아이들.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맏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부모님도 기도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진심인가. 폭력과 광기, 고통이 기도의 앞뒤에 따라붙는다. 그들의 경건함은 의무이며, 의무의 무게는 맛히스의 몸을 차갑게 식힌 얼음과 물의 무게와 같다.
건너편으로 가면 아이들은 탈출할 수 있다. 그걸 알지만 건너갈 수 없다. 건너가려면 맛히스 오빠가 죽은 강을 가로질러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넘어가면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 아빠는 거칠게 딸을 움켜쥔다. 죽어버린 오빠를 속에 담고 있기 위해 코트도 벗지 않고 배변도 하지 않는 딸에게 건너편은 죽음이라고 일갈한다. 정작 죽음은 이 집 위에 드리워져 있는데.
아이는 죽고 소들도 죽는다. 굶주림과 절망이 따라온다. 부모님은 더 이상 서로를 어루만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유사 성행위에 몰두한다. 방을 구석부터 물들이고 창문을 잠식하고 식탁에 놓인 음식의 온기를 빼앗고 거칠게 몸을 후벼파는 고통으로 번지는 죽음을 무의식중에 거부한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는 실질적인 잉태 활동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흉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죽음은 점점 더 깊게 짙게 번진다.
야스는 코트를 벗을 수 없다. 야스는 똥을 눌 수 없다. 배꼽에 압정을 박아 무언가를 봉인한다. 자신 안에 시커멓게 드리운 것이 빠져나오는 것이 두렵다.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렵다. 또는 죽음을 방출하는 것이 두렵다. 야스는 이 집을 삼키고 목장의 울타리를 넘어 사방으로 흘러넘치려는 죽음을 봉인하는 말뚝처럼도 보인다.
맛히스가 죽기 전 소박하기는 해도 따뜻했던 저녁식사는 그의 죽음 이후 사라졌다. 죽음은 장기 체류자 같다. 야스의 상상 속 지하실에서 숨을 죽이고 숨어 있는, 엄마가 따뜻한 차와 비스킷을 내어주는 유대인들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기 있다. 이야기의 마무리에 지하실이 열리고 야스는 결국 한 번도 교접하지 않은, 죽어버린 두꺼비들을 코트 호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으로 내려온다. 그날은 아빠가 강제로 야스의 코트를 벗기기로 한 날. 지하엔 유대인이 없고 냉동고가 있다. 아빠가 가져가버린 맛히스 오빠의 침대, 야스가 몸을 굴려 들어가면 꼭 오빠 품에 안긴 것처럼 움푹 팬 윤곽처럼, 냉동고에는 야스를 위한 자리가 있다. 그녀는 거기 반듯하게 드러눕는다. 오빠에게 인사를 건네며.
야스는 죽음으로 건너가 탈출했을까. 죽음에서 분리되어 강제로 살아있음의 세상에 내팽겨졌을까. 그건 아무도 모르지만 어느 쪽에든 야스는 한 번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 새로운 소들이 도착하고 소들이 송아지를 낳고 아이들은 점점 자라고 유년의 은밀한 비밀은 죽음 속에 봉인될 것이다. 야스가 가까스로 틀어막고 있던 죽음에 스스로 제물이 되어 그녀는 이 집에 머무르던 죽음을 배웅했으리라.
노래 속에서 부모는 아픈 아이를 끌어안고 죽음에게 맞선다. 우리는 살면서 언젠가는 죽음의 방문을 맞는다. 문을 두드리고 찾아오는 죽음, 혹은 창문을 벌컥 열고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죽음. 죽음이 지나가고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날 저녁 이후 우리의 저녁은 어떻게 변할까. 계단을 올라 현관 앞에 선 죽음이여, 느리게 손마디를 내 집 문 위에 내려놓는 죽음이여, 나의 슬픔은 경계 없이 넒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