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임 Nov 02. 2024

박혜지, 런던라사 삐에르의 세련된 옷차림

이 세상에 안 죽는 사람은 없느니라. 다만 사람들이 그걸 자꾸 잊어버릴 뿐이지.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자꾸 잊어버리는 게야





울보 판근은 잘 살고 있겠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아이가 아이다워야 잘 산다고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도 늘 말씀하셨다. 아이답지 못했던 손주들이 마음에 맺혀서 내뱉은 탄식이시리라. 


드자이너가 되고 싶은 판근은 아이다워서 안심이 됐다. 작가의 고운 심성은 작품에 그대로 스며들어 어른들의 더러운 사정도 하늘에 뜬 붉은 달이 불러온 재앙처럼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판근에게는 할머니라는 든든한 안전판도 있다. 손주를 향한 아낌없는 사랑은 아이의 순수한 마음에 스민 더러움이 공포로 영원히 새겨지지 않도록 현명한 조언이 되어 판근을 다독인다. 


누구나 어린 시절 막연하게 꾸는 꿈이 있고 닿지 못해 실망하는 사람도 있다. 실망감을 솔직하게 토로하며 엉엉 우는 판근은, 집 나가는 엄마를 기어이 쫓아갔다가 버스 밖으로 밀쳐지고서도 순수를 잃지 않는 판근은, 더 이상 어린이답지 않아도 삐에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고오급 커피를 마시는 이면에 재앙의 붉은 달을 품은 '더러운 어른' 이. 아이라도 아이 답지 못한 아이들도 있다. 너무 어릴 적부터 고통을 참는 버릇이 몸에 밴 아이들이 있다. 세상을 차곡차곡 접어서 몸 안에 쌓는 아이들. 그 아이들의 밤에는 늘 붉은 달이 뜬다. 세상엔 부조리도, 절망도, 고통도 모두 있지만 그것이 붉은 달 탓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는 어른이 없었던 아이들의 밤은 늘 무섭다. 아이였을 때도 아이답지 않았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도 어른이 되지 못한다. 커다란 몸 안에 매일 붉은 달이 뜨고 강에는 둥둥 수군거리는 사연이 뜬다. 인간의 세상은 분명 더럽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의 세상은 슬프다. 


그래서 판근이 사랑스러웠다.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치며 축구공을 모는 판근이, 복사꽃처럼 환한 여학생을 보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판근이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어린이답지 않은 판근은 제대로 청소년이 되고 제대로 어른이 될 것이다. 아이였을 때처럼 툭하면 울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스스로 감정을 잠그지는 않을 것이다. 


눈물을 참는 것처럼 얼굴이 굳은 우리네 어른들의 커다란 외투 주머니에 가만히 꽂아주고 싶은 소설. 참으로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미나, 백장미의 창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