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와 열 맞추고, 색깔 맞추는 것보다 더 심각한 질병
뭐든지 '그냥' 생각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디자인 전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디자인적인 사고, 디자인의 기초 개념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첫 2년 까지는 정말 많이 깨지면서 배웠다. '이거 왜 이렇게 했어?'라고 선배가 물어보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무작정 '이쁘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두번째로 다녔던 에이전시에서는 디자이너 출신이었던 대표님 덕에 한 단계 점프업을 했다. 대표님은 디자이너 출신이었고, 아주 가끔, 1년에 한 번 정도 우리 일손이 모자랄때면 직접 실무에 투입되어 함께 작업을 하곤 했다. 나에겐 대표이자 사수였던 셈이다. 그 과정에서 디자인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전부 새로 배웠다. 디자인은 단순히 뭔가 이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목적에 맞게 정보를 전달하는 설계 과정이라는 것도.
그뒤로 작업을 할 땐, 내 작업의 모든 요소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런 행동 덕분에 결과물의 완성도는 예전에 비해 높아졌을 지 모르겠다. 거기까지였다면 좋았을텐데, 점점 과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냥'이라는 말은 디자이너에게 죄악과도 같은 말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일하는 의미를 잃어버려서 잠시 방황했었다.
나는 뭘 위해서 일하는가? 나는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
내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뭘까?
하지만 지난 날들을 떠올려보면, 나는 애초부터 내 일을 통해서 뭔가를 이뤄보겠다는 비전같은 건 없었다. 그냥 일하는 내 모습을 좋아했을 뿐. 그러면 왜 안돼? 일하는 게 덧없네 어쩌네 하면서 처져있는 것보단, 멋있어보이는 뽕에 차서 뭐라도 하려고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냐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노트북 펴놓고 일과 삶을 자유롭게 스위칭하는 내 모습이 멋져보여서 일한다. 일하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고 나의 가장 멋진 모습이니까. 거창한 의미는 잠시 내려놓고 '그냥' 즐겨야지. 나의 중심이 바로 서고 안정적이어야 타인이 보이고, 세상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