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그 황홀한 고독. 포포를 매순간 온전히 느끼는 사람은 나 하나뿐.
임신 선배들이 입을 모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출산 후 더 이상 태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임신 선배들은 출산 후 아이의 태동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게 매우 아쉽다고들 했다.
사실, 임신 초기에 나는 아이가 배 안에 있는 게 아닌, 배 밖인 세상으로 나오는 게 더 반가운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당장 보이지 않아도 너무도 예쁜 아이인데, 두 눈으로 직접 본다면 얼마나 더 즐겁고 행복할까?
그런데 태동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부터, 태동을 활발하게 느끼는 지금. 내 생각은 변했다.
보이지 않더라도 내 몸 어딘가로부터 그대로 느껴지는 아이의 움직임은 정말이지, 설레고 감사한 일이었다.
처음 태동을 느꼈을 땐 이 느낌이 맞나, 싶었다.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태동이 강해졌고, 물고기가 펄떡 뛰어오르는 느낌처럼 내 안에서 새로운 느낌인 큰 움직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손가락으로 커다란 동맥을 짚은 느낌이 배 곳곳에서 느껴질 때마다 반갑고 신기했다.
너, 거기에 있는 게 맞구나. 안녕! 포포야!
그동안은 지인에게 나눔 받은 심음측정기인 하이베베로 아이가 잘 있는지 심장소리를 통해 확인해 왔는데, 태동이 느껴진 이후부터 하이베베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아서 그 기계는 이제 서랍 속에 깊이 잠들어 있다.
기계 없이도, 별다른 매체가 없이도 언제라도 아이를 느낄 수 있는 태동이라는 존재가 벅차고 감사하다.
가끔 너무 태동이 조용한가 싶을 때, 자세를 바뀌거나 배를 살짝 만지면 태동이 느껴지고 이내 안심이 된다. 종종 배를 전반적으로 흔들 때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 보실 때 그러시길래 ㅎㅎ) 남편은 포포(아이 태명)가 잘 자고 있을 텐데 깨우지 말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태동이 느껴지는 게 좋고, 태동만이 주는 중독성이 강한 걸 어떡하남.
포포와 관련한 걱정거리가 있을 때, 혹은 다른 일로 조금 우울할 때 포포가 내 안에서 힘차게 해주는 태동은 교감 그 이상의 것으로 다가온다. 위안과 위로의 커뮤니케이션 의미로도 느껴진다. “걱정하지 마요”같은 느낌. 그럴 때마다 괜히 더 배를 한 번 더 쓰다듬게 된다. 고마워, 포포야, 이야기하게 되기도.
임신은 나와 남편이 함께 만든 업적(!)이지만, 임신 후 출산까지의 과정은 오롯이 내 몫이 된다. 포포가 내 안에 있으니까, 내가 그 친구를 잘 책임지고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그래서 아쉽게도 남편은 임신 주체라기보다 든든한 서브 역할이 된다. 그래도 포포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눌 수 있는, 포포에 대한 사랑을 과감없이 표현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포포를 매순간 온전히 느끼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그래서일까. 또다른 임신 선배는 임신은 황홀한 고독이라고도 말했다.
매일매일 남편은 커가는 내 배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포포가 정말 그 안에 있는 게 맞는지(!)는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병원 초음파와 위에서 언급한 심음측정기라는 매개체를 통할 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남편의 두 손이 그 매개체가 될 수 있다, 포포의 태동 덕분에.
보통 아이들은 태동을 하다가도 아빠 손길이 닿으면 멈춘다고 하는데, 포포는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아빠의 손길이 닿으면 안 하던 태동을 한다. 그 점이 참 사랑스럽고 흐뭇해진다. 내가 태동을 느끼고, 옆에 있는 오빠도 내 배에 손을 올리고, 포포는 태동을 하고, 그렇게 세 명이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포포는 카메라를 싫어한다. 태동을 아무리 열심히 하고, 세게 해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멈칫하고 숨어 버린다. 더 주차가 늘어나면 그때는 영상에 담겨주려나.
모든 것을 사진, 텍스트로 남겨야 직성이 풀리는 나이지만, 포포에 한해선 관대해진다. 당장 기록하지 못해도 괜찮다. 나는 매순간 포포를 느끼는 증인이니까. 때로는 기록하지 않고 그 순간에만 충만하게 만끽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고, 내게 지금 포포의 태동이 바로 그 지점일 테니.
포포를 품고 나서의 나는 이전의 나와 당연히 많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새로운 내 모습도 꽤 마음에 든다. 육체적인 변화도 그렇지만 포포를 맞이한 자세 그리고 또 한 번 새롭게 맞이할 준비를 하는 나의 심리적인 모습들도 퍽 괜찮은 것 같다. 엄마로서의 나를 꿈꿔온 적이 없기에 내가 포포에게 부족한 보호자가 되진 않을지 초조하고 불안했다. 물론 지금도 포포와 관련된 작은 일에도 크게 반응하고 예민해지는 나의 모습을 목도할 때마다 ‘침착하자’ 다짐하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포포에게 미안한 엄마로서 모습을 숨길 수 없다. 포포 초음파 앨범에 내가 짤막하게 쓴 글귀들만 보더라도 ‘쫄보 엄마라서 미안해’라는 구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럼에도 나는 기꺼이 용기 내어 포포의 태동에 오늘 하루도 웃고, 한 마디 말을 더 건네고, 포포가 이 안에 있는 이상 이 몸의 주체인 내가 더 행복하고 건강해야지 다짐하게 된다. 포포가 조금 더 힘차게 밝게 지낼 수 있도록, 즐겁게 태동할 수 있도록. 포포라는 존재가 준 감동이 제일 큰 선물인 사실은 변함 없으나, 그로 인한 태동 역시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금의 가장 큰 행복이다. 훗날 포포가 태어나고 나 역시 다른 선배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처럼 태동을 느낄 수 없음에 서운해 하겠지. 그러니 지금 포포를 품고 있는 이 시기만의 기쁨, 태동이 주는 벅찬 감동을 감사히 누려야겠다. 포포야, 고마워. 마음껏 태동해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