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시작하는 여름휴가
나의 여름휴가 계획은 인도여행이었다. 친구의 결혼식도 참여하고, 대학시절부터 배낭여행으로 가고 싶었던 1순위 여행지를 드디어 가게 된 거다. 막연하게 꿈꾸기만 하던 인도 여행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한 달 동안 머무를 수 있는 비자가 나와 막 짐을 꾸리던 출발 하루 전이었다. ‘자기!’하고 남편이 불렀다. 경유지인 델리 공항이 폭우에 무너져 8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는 기사였다. 인도가 폭염과 폭우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되어 가뜩이나 마음이 찜찜했는데, 출발 직전, 공항까지 무너졌다니, 온 우주가 인도에 가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만 같았다. 게다가 일주일 내내 아빠가 전화를 해 위험하다는 이유로 인도 여행을 취소하면 어떻겠냐는 설득을 계속해왔기에 내 머릿속 어딘가 에도 이 일정을 강행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심겼고 결국 우리는 인도여행을 포기했다.
친구에겐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긴 메시지를 남겼다. 하루 직전에 불참 소식을 들어서인지, 그녀에겐 It’s ok(괜찮아)라는 짧은 답장 외 그 후 몇 주간 소식이 없었다. 여러모로 불편한 마음이었지만 나와 남편은 어디론가 떠나야만 했다. 남편은 인도여행을 위해 2주간 휴가를 썼고, 이는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내일부터 휴가인데, 어디로 가야 할까?
몇몇 후보지가 거론되었다.
“한국, 너무 자주 갔어. 싱가포르랑 홍콩은 우기라서 덥고 습해. 베트남이랑 태국도 비가 많이 오더라. 지금 날씨가 가장 좋은 곳은 유럽뿐이야. 준비 없이 갈 수 있는 곳도 그곳뿐이고.”
스텐바이 트래블러인 우리는 샌프란을 출발해 내일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 목록을 쭈욱 살폈고,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가자, 이태리로.”
이태리는 우리 부부 각자 3번씩 방문한 나라였다. 옛것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아름다운 도시가 많은 나라. 유적, 음식, 자연의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그곳은 언제 가도 멋진 곳이다. 이태리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대략적인 여행계획을 세웠다. 로마에서 이틀, 나폴리 이틀, 그리고 아말피 해변에서 3일. 그 후 일정은 여행을 하며 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로마.
우리는 몰랐다. 7월 극성수기의 로마가 어떤 모습인지.
이전에 방문했던 때는 코로나 이전이기도 했고, 5월과 6월이었다. 그때도 붐볐지만 7월의 로마는 정말인지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게다가 재작년부터 이어져온 극심한 고온현상이 유럽을 강타하고 있었고, 성수기에 맞게 그곳의 가격들이 비싸게 조정되어 있었다. 여러모로 우리가 추구하는 현지인 친화적인 여행이 어려운 때였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로마에 있으니까. 어딜 가나 행복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가득 차 활기가 온 도시를 가득 매웠다. 길에 있는 사람들이 웃으면 나도 괜스레 따라 웃게 된다. 거리의 모든 이들은 서로에게 행복한 감정을 전파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남편과 나는 발길 닿는 데로 걸었다.
우리의 숙소는 트레비 분수 근처였고, 그곳을 기점으로 판테온, 스페인 계단, 개선문, 콜로세움 같은 주요 관광지들을 돌아다녔다.
내가 생각하는 로마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보도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차가 거의 필수인 미국에서 살다가 다시 만난 높은 인구밀도의 유럽 도시는 내 몸뚱이와 튼튼한 다리로만 온전히 세상을 느낄 수 있는 것만 같아 엄청난 효능감을 주었다. 나는 나 자신만으로도 온전히 괜찮은 사람이구나. 잘 살아갈 수 있구나. 생필품들을 하나씩 제거해 가면서도 잘 살아가는 나를 마주하는 것만큼 즐겁고 뿌듯한 일도 없다.
가장 힘을 많이 받아야 하는 아치형 천장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있는 판테온은 다시금 봐도 과거 건축 공법의 신비함을 느끼게끔 했고, 로마의 휴일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스페인 계단은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활기 넘치는 사람들과 파란 하늘 덕에 보고만 있어도 엔도르핀이 솟구쳤다.
여행이란 그런 거였다.
익숙하던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자극을 받는 것. 그 자극으로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 되살리고 내일의 새로운 나를 계획하는 것. 그 외에도 관광객을 대상으로 가격만 부풀린 식당을 피해 진정한 맛집을 찾았을 때의 뿌듯함과, 68년째 바리스타로 일하는 할아버지가 내려준 카푸치노에서 진정한 이탈리아 커피 맛을 느꼈을 때 여행은 더욱 완벽해진다.
저녁녘 해가 지고 가로등 불빛에 도시를 둘러싼 유적들이 주황빛으로 물들면 로마는 로맨틱한 영화 세트장처럼 새로운 장소가 된다. 남편과 손을 잡고 더위가 누그러진 거리를 걸으며 콜로세움으로 향하고 있던 무렵, 한 여자가 우아한 발레동작으로 춤을 추고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남자와 마주쳤다. 나도 따라 춤을 췄다. 그들은 마치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의 OST처럼 거리에 울리는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소리에 이끌려 거리의 연주자를 만났을 땐 그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당신이 도시를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어요!’라고 외치면서! 남편은 청년의 바이올린 케이스에 20달러를 쾌척했다.
다음날, 우리는 로마에서 가보지 않았던 곳을 찾아 보르게세 공원에 갔고, 그곳에서 사륜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렸다. 이어 메디치 가문의 저택인 빌라 메디치를 방문했고, 그곳이 프랑스인 예술가를 양성하는 아카데미이자, 오늘날까지 프랑스 정부가 선발하는 예술가들의 활동을 위한 레지던스를 제공한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이 적었던 곳들에서 한적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여유롭고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아직도 로마 안에는 내가 모르는 가봐야 하는 곳이 더 많았다.
너무 걸어 덥거나 지칠 때는 근처의 성당에 들어갔다. 성당은 아름다운 피난처였다. 간혹 미사가 있는 곳에 들어서면 아름답고 장엄한 성가가 울려 퍼졌고, 시선이 천장화에 머무를 때면 신을 위해 인간이 빚어놓은 예술 속에서 종교적이지 않은 나지만 신적인 존재를 찾게 되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로마는 여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반겼다. 오랜만에 방문했지만 짙은 여운을 주는 도시를 뒤로 한 채 우리는 이탈리아의 부산, 나폴리로 향했다. 남편은 나폴리에 처음 가본다며 설레했다. 한 번 나폴리를 방문한 적이 있던 나는 호기롭게 에어비앤비를 예약했고, 테르미니 역에서 나폴리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나폴리에서 보내는 이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