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있는 여행을 위한 전제조건
계획 없이 떠난 런던여행이었지만 도시는 관광객들에게 넘치는 볼거리를 제공했다. 런던여행의 2일 차 아침은 영국이 제국이던 시절, 세계각지에서 거둬들인 문화재와 예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대영박물관 방문으로 시작했다. 해가지지 않았던 대영제국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영박물관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미라는 물론이고, 조선의 달 항아리까지 전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료로! 박물관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어마어마한 컬렉션에 놀랐지만 그도 잠시, 이곳의 소장품들의 넓은 지역적, 시대적 범위에 압도당하고, 사전 조사 하나 없이 방문한 탓에 나중엔 ‘그게 그거’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나 봐. “
아는 게 없는 우리는 남편이 좋아하는 이집트 미라들과 내가 좋아하는 인도와 티베트의 불상들에 눈도장을 찍고 난 후, ‘테이트 모던’이라는 현대미술관도 방문하고 노팅힐로 향했다. 런던행 비행기 안에서 검색한 ’ 런던여행 추천‘이라는 유튜브 비디오의 루트를 그대로 말이다.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주연한 영화 [노팅힐]은 세계적 배우인 ‘애나’가 노팅힐에서 작은 여행 서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 ‘윌리엄’의 책방에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영화를 떠올리면 윌리엄이 기자인 척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애나에게 물어보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영화 타이틀곡 ‘She’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여행을 하면 그 도시의 서점과 도서관에 꼭 가보는 나로서, 영화 속, 윌리엄이 운영하던 그 서점을 빼먹을 순 없었다. 실제 서점은 영화에서처럼 여행 전문 서점도 아니었고 로맨틱하지도 않았다. 관광객들이 드나들어 서점의 진정한 역할을 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관광 상품으로 전락한 서점의 모습이 안타깝고 서글펐다.
커피와 빵으로 허기를 달랬지만 서양식으로 채울 수 없는 헛헛함을 중국음식으로 채운 후, 우리는 호텔에 돌아왔다. 애당초 축구경기 관람 말고는 별 계획이 없었기에 침대에 누워 무엇을 해야 할지 검색하다가 번뜩 생각이 난 게 뮤지컬 공연이었다. 미국에 오기 전까진 한국에서 뮤지컬 동호회에서 활동했을 정도로 나는 뮤지컬을 좋아한다. 숙소가 위치한 피카델리 서커스는 여러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이 성행하고 있었다. 때마침 25주년을 맞은 맘마미아를 다시 한번 볼까 고민하다가, 함께 브런치 매거진을 운영하는 Presidio Library 작가님이 엄청 재미있다고 추천했던 ‘The Book of Mormon’이 걸어서 5분 거리의 공연장에서 공연 중임을 확인하고 재빨리 좌석을 예매했다. 비싸고 좋은 자리가 남아있었다.
브로드웨이에서 첫 공연을 하던 해, 최고 뮤지컬 상을 받은 이 작품은 토니상 9개 부문을 휩쓸 정도로 작품성과 흥행까지 검어 쥔 뮤지컬이다. 웬만한 대형 뮤지컬은 다 본 데다 남는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예매했기에 별 기대 없이 자리에 앉았지만 첫 번째 곡이 끝나고 나서 평소보다 두 배는 커진 눈에 활짝 웃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나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딩동, 안녕하세요. 저는 스미스입니다.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우리 시골집 아파트를 찾아온 몰몬교 선교사들이 떠올랐다. 흰 셔츠에 검은색 타이와 검은색 바지를 입은 백인 청년들이 초인종을 누르며 포교를 하는 첫 장면은 현실을 고증함과 동시에 과장된 배우들의 연기력과 재치 있는 가사, 밝은 멜로디로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뮤지컬은 두 몰몬교 청년이 우간다로 선교를 나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잘생긴 주인공 프라이스는 몰몬교 선교사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바른 사나이고, 또 다른 주인공 커닝햄은 자존감이 낮아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는 부산스러운 뚱보 청년이다. 둘은 에이즈와 할례문화, 지역의 깡패 반군들에게 시달리는 우간다 마을 주민들을 만나며 전도를 위해 헤쳐나가야 할 어려움에 대해 서로 다르게 반응하게 되는데... (줄거리는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이쯤에서 줄인다.)
뮤지컬의 제작자 세 명은 종교를 까는 것으로 유명한 ‘사우스파크’ 출신이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몰몬교를 희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왜 종교가 필요한지를 전하고 있어 무신론자가 종교에 보내는 러브레터라는 찬사까지 받고 있다. 각 장면에서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노래와 춤들이 단순히 종교를 폄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람들에게 희망과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어 종교가 있든 없든 불편한 마음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묘한 매력이 있는 뮤지컬이다.
찰떡같이 캐스팅된 배우들과, 화려한 의상들, 귀에 착착 감기는 노래들과 최첨단 음향시설은 공연 예술의 경험을 극대화시켰다. 남편과 나는 공연이 준 감동을 잊지 못한 채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뮤지컬에서 나온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어지는 다음날 아침, 내셔널 갤러리에서 회화작품을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이 역시 무료였다. 런던에서 살면, 원 없이 작품들과 대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괜히 이곳 주민들이 부러워졌다. 런던 물가가 비싸다고는 하지만 그 못지않게 비싼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나로선 문화적 자원이 풍부한 이곳이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 것만 같았다. 런던 여행 유튜버가 알려준 또 다른 주요 관광지인 버로우 마켓에 들러 허기를 채운 후, 우리 부부는 셰익스피어 극장으로 향했다.
영국에 왔으니, 영미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의 연극을 보아야 한다며 남편이 적극 추천한 연극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극장에 들어섰을 때, 우리 부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셰익스피어가 살아 있을 당시 구조물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가운데가 뻥 뚫려 비가 쏟아지는 원형의 극장 지붕은 지푸라기가 덮여 있었다. 우리의 좌석은 무대 바로 옆이었고 큰 기둥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자리를 가득 메우는 관객들은 주로 단체 관광객, 그중에서도 수학여행을 온 독일인 학생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나와 남편, 그리고 반대편에 앉은 중국인 가족을 제외하고 아시안계는 없었다. 셰익스피어가 서양문화에서 가지는 의미가 남다름을 관객구성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또 한 번 놀랐다. 마이크가 없었다. 배우들은 육성으로 공연을 했다. 옛날 방식 그대로 말이다. 게다가 ‘로미와 줄리엣’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시도로 몬테큐와 캐퓰릿 두 가문을 갱단으로 그렸고, 그 때문에 배우들이 체육복 같은 허름한 옷들을 입고 있어 공연 예술에서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요소가 없었다. 난해한 현대미술을 보는 것 같이, 심미성은 없고 심오함만이 가득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전날 저녁 자본주의 공연 예술의 정점을 찍은 ‘The Book of Mormon’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유럽의 공격적 예술문화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경계를 허물고 파괴적인 시도를 하는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었던 내가, 나이 탓인지, 피로감 탓인지, 해석의 여지가 많은 새로운 예술형태에 피로감을 느꼈다. 강한 영국식 발음에 옛 문어체의 대사는 가뜩이나 마이크가 없어 들리지 않아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배우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 없었던 남편의 얼굴을 굳어져 갔다. 아마 내 얼굴도 비슷한 모습이었을 거다. 무대 바로 앞에 서서 공연을 보는 한 할아버지의 얼굴은 흥미로 가득 차 빛나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남편에게 속삭였다.
“여보 이제 나가야 될 것 같아. 공연료는 매몰 비용이었다고 생각해. 우리에겐 런던에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해. 기회비용을 낭비하지 말자.”
“자기가 그 말해주길 엄청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자본이 많이 투입된 공연 체질인가 봐”
경제학 용어가 오갔다.
조심스레 공연장을 빠져나와 다음목적지로 가기 위해 바로 앞 선착장에서 배를 타려고 할 때, 자신의 등장을 기다리는 주인공 로미오와 딱 마주쳤다. 원형 극장에서 배우들은 공연장 안팎 모두를 동선으로 활용하고 있었던 거다. 야자시간에 몰래 도망 나가는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딱 걸린 것 같은 찌릿함이 느껴졌다. ‘미안해, 로미오. 도저히 못 견디겠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등 뒤에 조심스레 진심을 말했다. 한국말로..
배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오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웬만해선 공연 중간에 나오는 실례를 범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 역시 미국에 살면서 자본으로 점철된 ‘보기 좋은’, 혹은 ‘떠먹여 주는’ 예술에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단번에 이해가 가는 플롯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백한 브로드웨이 공연에 대한 분명한 선호를 확인하고 난 후, 자부했었던 예술 영역의 포용성을 잃어가는 것을 슬퍼하며 빅벤과 버킹엄 궁전 주위를 산책했다.
짧은 일정에다 계획마저 없었지만 런던은 그런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내어주었다. 광관지로 오래도록 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 일거다. 하지만 이번 런던여행에서 할 수 있었던 경험들은 서구화된 현대사회에선 어디서든 대체 가능하다는 느낌이다. 공연도, 경기도, 미술관도 방문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엔 공연단이, 선수들이, 작품들이 전 세계를 옮겨 다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볼 수 있지 않던가. 내가 바라는 여행은 그곳의 ‘고유성’을 느끼고 그곳 사람들과 소통하거나 새로움에 눈을 뜨는 것인데, 준비 없이 떠난 탓에 우리는 관광만 해버린 것 같았다.
문득, 다음 사람을 위해 캄보디아에 남겨두고 온 책,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 떠오른다. [여행의 기술]은 각 챕터마다 몇 백 년 전 작고한 소설가나, 화가, 평론가들이 세계 곳곳의 여행지 맡아 해당 장소에 대해 안내하는 형식으로 기술된 책이다. 책은 여행이 자신에게 익숙했던 현실에서 벗어나 이국적인 것에서 심미적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이며, 거대한 자연이나 인류가 이루어놓은 문명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고, 잊고 있었던 정체성을 새로운 곳에서 발견하는 것이며, 일탈을 통해 익숙해진 루틴에 속에서 철학적 가치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서구화된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알랭드 보통이 이야기한 ‘여행’을 하기란 조금은 어려워졌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계화는 지구를 평평하게 만들어 놓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것들이 널리 퍼진 덕에 이제는 방구석에서도 세계를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행이라는 걸 떠나는 이유는 직접 다른 세상과 마주하면서 보고 느끼는 것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만남과 인연, 예상치 못한 문제들과 그를 해결해 나가기 위한 과정들. 뻔한 관광이 아닌 의미 있는 여행이 되기 위해서는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다. 사전에 조사하고 공부를 하면 내가 마주할 것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게 되고 이전에 알던 것과는 다른 점이 보이고, 예쁜 점도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준비된 여행자에게는 여행지에서 빚어내는 우연까지 겹쳐지며 더 깊고 풍부한 경험을 하게 된다. 준비가 없었던 이번여행은 그런 면에서 반성할 게 많은 여행이다. 소중한 시간과 돈이 별거 아닌 경험들로 날아가 버린 것 같아 아쉬웠고 무엇보다 런던을 대하는 첫인상, 첫 경험이 깊이 없이 지나간데 대한 아쉬움이 크다.
3개의 박물관, 2개의 공연, 1개의 스포츠 경기로 마무리된 런던에서의 3박 4일. 강력한 문화자본을 갖춘 영국의 심장 런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계적 박물관이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점이다. 모든 대중에게 열려있는 문화자본. 예술과 전통, 다양성이 집약된 박물관과 화랑들에 대한 손쉬운 접근성이야 말로 국가적인 문화적 힘과 관광산업을 활성화시키는 열쇠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 문화를 흡수할만한 충분한 학습을 하지 않았던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10시간의 여정이 기다리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음에 만나면 더 깊이 너를 알고 싶다.
안녕 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