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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Sep 07. 2024

한여름의 붕어빵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이탈리아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남은 여름휴가를 보내러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인천공항에 내린 나와 봉이(남편의 애칭)는 동생들이 살고 있는 대전으로 가 깜짝 방문 소식을 전했고, 그다음 날, 엄마와 아빠가 있는 영천으로 가 또 한 번 서프라이즈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할머니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작게 옷 가게를 시작한 엄마는 우리 세 자매를 낳고 집중 돌봄이 필요한 몇 해를 제외하고 계속해서 일을 했다. 할머니와 집에서 매일 붙어있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그 잔소리하며 윽박지르는 말투와 잠시도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고 들들 볶는 시어머니 노릇에 아들과 손녀들도 나가떨어지기 일쑤니 말이다.

미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엄마의 월 수입은 꽤나 잘 번다고 생각했던 내 수입보다도 높은 것이었다. 동네에서 옷 가게를 하는 엄마의 주요 업무는 아줌마들의 수다, 주로 남편과 시어머니 욕, 자녀들 걱정이나 자녀들 자랑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말을 옮기지 않고 잘 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엄마는 강조했다. 물론 엄마의 늘씬한 몸매와 패션 센스가 뒷받침되었기에 엄마는 아직까지도 할머니를 피해 가게를 운영할 수 있었다.


쓱 엄마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표정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내가 반가웠을까 생각하니 그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언제나 엄마가 보고 싶다. 글을 쓰는 지금도 말이다. 엄마와의 뜨거운 재회 이후 엄마는 자신의 연기력을 십분 활용하여 아빠를 불렀다. 간밤에 온 비 때문에 가게 화장실에 물이 찼다는 핑계를 대며 말이다. 꼬꼬들에게 밥을 주고서 가게로 들어온 아빠는 나보다 봉이 얼굴을 먼저 확인하고 그를 꼭 껴안았다. '김서방'하는 외침에서 반가움이 피어났다.


다음 서프라이즈 타깃은 집에 계신 93세의 꼬장꼬장한 할머니였다. 엄마와 아빠, 나와 봉이는 각자의 차를 타고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집으로 나서기 전, 배가 고팠던 나와 봉이는 점심을 거른 탓에 요깃거리를 찾아 주변을 탐색했고, 처음 보는 귀여운 붕어빵 가게를 발견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손님이 없는 가게 안은 깔끔하고 정갈했다. 우리가 문을 열자 카운터 뒤에서 적으면 30대 초반, 많으면 40대 중반까지로 보이는 나이를 잘 가늠할 수 없는 여자분 한 분이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붕어빵 사려고요."

"저희 붕어빵은 일반 붕어빵이 아니고, 페스츄리 생지 안에 다양한 토핑을 넣어서 만드는 건데, 바로 구워서 시간이 좀 걸려요. 괜찮으신가요?"

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망설였지만 그냥 되돌아 나가기엔 마음이 약했던 우리는 괜찮다고 말하고, 붕어빵 4마리를 주문했다.  붕어빵은 한 마리에 4,000원이었고, 3마리를 사면 1마리를 더 끼워주는 구조였다.

생지가 느릿느릿 틀에 담기는 걸 보다가 나와 봉이는 입구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기다리고 있었을까. 딸랑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들리고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아이 한 명을 안고 들어왔다.


"엄마, 성윤이(가명) 왔어요."

"어머, 성윤이 왔구나."


카운터 뒤에서 열심히 붕어빵을 굽고 있던 사장님이 방긋 웃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배달온 아이가 너무 귀여웠다. 추측건대 어린이집 하원시간이 다 되어도 엄마가 오지 않자, 선생님이 안고 가게로 데려다주었던 것 같다. 붕어빵집 한 블록 아래에서 어린이집을 얼핏 본 것을 떠올렸다.


"어머, 성윤이 제가 안아보면 안 될까요?"

문 앞에 성윤이를 안고 서있는 선생님께 손을 뻗었지만 선생님의 굳은 결계는 풀리지 않았다. 나는 허락을 구하는 얼굴로 사장님을 쳐다보았다.


"안으셔도 돼요."


사장님의 허가가 떨어지자 선생님은 나에게 성윤이를 넘겨주셨고, 배꼽인사를 한 뒤 사라지셨다.

요즘 주변에 아기를 낳은 친구가 있는 데다, 7살 어린 동생을 어린 시절부터 키워 왔다고 자부하는 나는 프로 아기 돌보미다. 게다가 나는 예쁜 아기를 보면 사랑하는 눈빛을 숨길 수가 없다.


성윤이는 처음 보는 낯선 나에게도 잘 안겨 있었다.

"애기 엄마신줄 몰랐어요. 성윤이는 몇 살이에요?"

"이제 5개월 됐어요."

"5개월이요?"

5개월 치고 제법 커다란 아기였기에 놀라기도 했지만, 5개월 된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붕어빵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다.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의 아이를 두고, 돈을 벌러 나온 엄마가 보이지 않는 아기에게 보낼 애잔한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 혹은 조금이라도 가게에 보탬이 되고자 일을 하는 투사 같은 의지. 그 모든 것에 마의 마음은 울렁거렸다.


"우와. 성윤이랑 성윤이 엄마는 정말 대단하구나. 엄마가 성윤이를 위해서 정말 열심히 일하시고, 성윤이도 엄마를 위해서 어린이집에 잘 있다 왔구나."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냥 그렇게 내 마음을 전했다. 대단한 엄마와 대단한 아기. 서로를 위해, 가장 필요한 시기에 떨어져 있는 두 사람에게 자연스레 마음이 갔다.


잠시 후, 초등학교 2학년이라는 성윤이의 형이 가게로 쪼르륵 들어왔다. 성윤이를 안고 있는 나를 보고 어리둥절해하더니 곧장 가게 뒤쪽 가림막 뒤 자신의 아지트로 들어갔다.


한참 성윤이를 안고 둥가둥가를 하면서 여러 감정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얼마나 편안하게 살고 있는지 그동안의 생활에 대한 감사함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고 미국에서 아이 없는 백수로 흘러 보내는 시간 동안 누군가는 아이도 키우고 돈도 버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이었다. 분명 사람들의 삶은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 저마다 고유의 것이지만, 같은 지역에서 태어난 비슷한 연령의 누군가를 보게 되면 어쩌면 내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순둥이 아기와, 일하는 아기엄마. 회사를 다니면서 육아휴직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나와, 내 친구들과는 달리 자영업을 하는 이들에게 육아휴직은 언감생심이었던 거다.


마침내 따끈한 붕어빵이 완성되고, 나는 성윤이를 엄마에게 내주었다.

성윤이도 엄마품이 더 좋은 듯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나는 붕어빵을 받아 들고 따봉을 날리며 대단한 사장님을 응원하고 가게 밖을 나왔다. 따끈따끈한 붕어빵은 갓 구워 쫀득하고 맛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께도 성공적으로 서프라이즈를 마친 우리는 엄마, 아빠에게 성윤이와 붕어빵 가게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말 장한 엄마다. 요즘 같이 애들 낳지도 않는 시대에 애 낳아 기운다고 붕어빵 가게까지 하고. 거기가 어디야?"

엄마는 붕어빵 가게 이름을 받아 적었다. 엄마랑 친구들이 응원을 갈 거란다.

아빠도 이야기에 감동했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 엄마들은 애기를 잘 키울 수 있도록 주변에서 도와줘야 해."

엄마, 아빠는 입을 모아 성윤이와 사장님을 칭찬했다.


저녁을 먹고 잠을 자러 누운 나와 봉이는 일과 육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차피 평생 일할 거니깐 지금 잠시 쉬는 건 괜찮은 거라 합리화했지만, 아이를 낳을지 말지도 모르는 우리 부부에게 성윤이와 사장님은 작은 화두를 던져주었다.

"일을 안 하고 있을 때, 애기를 낳아 키우는 게 맞는 걸까?"

 내가 물었다.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살 순 없는 거잖아. 그분은 훌륭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으니깐. 아이가 생기면 낳고, 아니면 아닌 거야. 우리 삶은 우리 거니까."

봉이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비 온 뒤, 시골의 진한 흙냄새가 살짝 열린 베란다 문을 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집에 와서 너무 좋은 밤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생일이던 나와 내 친구들 (제가 누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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