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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 Jul 26. 2020

14. 가까이서 보면 더 흥미롭다.

예민충 너도 그렇다.

급한 성격 탓이 8할 이상이지만 덕분에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횡단보도에서 조금이라도 신호를 기다려야 하거나 버스 두세 정거장 또는 지하철 한두 정거장 코스라면 

버스를 기다리거나 앱을 켜서 지하철 시간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내 발은 걷고 있다. 

하도 걸어서 그런지 그저 성격이 급해 그런지 걸음도 많이 빠른 편이다. 



이 만큼 걷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니 핸드폰에 있는 만보기를 매일 애용하고 있다. 

하루 육천보가 목표 도보 수로 자동 지정되어있는데

서울에 살면서 출근하는 날은 아무리 걸어도 이천보 넘기가 힘들어 

날씨가 너무 덥지 않거나 비가 오지 않으면 서너 정거장 정도는 거뜬히 걸어서 퇴근을 하기도 했다. 

아, 사실 내가 걸어 다니는 것을 선호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지독하게 예민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 

서울 지하철 2호선에 출근길에 두어 번 갇혀본 이후로는 얕은 트라 우마까지 생겨

특히 바글바글한 지하철을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힘들어하게 되었다.

 다행히 당시 회사와 집이 가까워 40분에서 천천히 걸으면 5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여서 

지하철이나 버스 오는 시간 기다리느니 머리를 비우고 혼자 걸어서 30분 정도 집에 늦게 도착하는 편을 택했다. 걷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될 때도 있고 잡다한 생각이 아예 없어져버릴 때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퇴근길엔 하루 동안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킨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생각하며 

처음에는 씩씩거리며 걷다가도 다리가 살짝 당겨올 때쯤이 되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평소에도 성격이 급해서 또 예민해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비우기 위해서 

그리고 건강을 위해서 하루 최소 만보까지는 채우려고 노력하며 걷는 편이다. 


여행을 가서는 기본만 오천보 이상을 걷는다. 

여행을 가서 많이 걷는 이유도 있다. 

먼저는 주머니 두둑이 가서 교통비에 흥청망청 돈을 쓸 수 있는 

부유한 여행이 지금까지의 나의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유명한 관광 명소에 가서 오랜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고 포토 존에서 

사진 도장을 찍고 이 유명한 곳에 내가 왔노라고 증명해 보이는 것이 내가 선호하는 여행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례로 프랑스 파리를 네 번이나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몇 박 며칠 일정이 아니라 그중에는 2달을 파리에서 살았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없이 지나간 루브르 박물관을 아직도 제대로 관람해본 적이 없다. 매번 급할 때 화장실을 이용하거나 그 앞을 지나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박물관이나 미술관, 명소들을 아예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개 중에 내가 관심이 있는 곳에는 입장료나 관람료가 아무리 비싸도 찾아서도 간다. 그럴 때는 줄을 서야 하니 심하게 일찍 일어나서 첫 손님으로 간다.) 

조금 막무가내스럽지만 나는 그저 걸어 다니며 골목골목 사람들 사는 집들을 보고 마을을 보고

 유명한 레스토랑이 아니라도 작은 마을의 현지인들이 가는 우리나라로 치면 작은 백반 집 같은 곳에서

 밥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그런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곳들의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즐기는 여행 방식을 잠깐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영국, 런던에는 세 번 정도 여행을 갔었는데

 갈 때마다 지하철 노선도를 펴서 ‘오늘은 초록색 라인’이라고 정하고 

초록색 라인의 끝 지점인 Eailing broadway 역까지 가서 하차 한 다음 지하철 역을 따라 무작정 걷곤 했다.

설명하기도 좀 우습지만 그렇게 지하철 역들만 쫓으면서 걷다 보면

 westminister도 나오고 Hyde park도 나오고 유명한 명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길을 잃으면 또 가까운 지하철을 찾아서 지하철만 타면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보면 좀 무식하다 생각될진 모르겠지만

 가벼운 주머니 사정과 튼튼하고 빠른 두 다리를 가진 나에겐 똑똑하고 실속 있는 여행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매번 여행지에서는 매일 이만 보 이상은 물론 어떨 땐 삼만보 까지도 찍는 일이 종종 있다.


 발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발리는 특히나 현대적인 도시가 아닌 섬일뿐더러 길도 엄청 좁고 협소하여 

차를 가진 운전자들도 운전을 버거워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처럼 초보 운전자가 운전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위험하다.

 택시나 누구나 타고 다니는 스쿠터 말고는 별다른 교통편도 없다. 

스쿠터가 있어도 빡빡하게 15c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운전하는 꽉 막힌 스쿠터 천지에서 오른쪽 왼쪽 맘 편하게 구경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다 보니 나는 또 걷는 편을 택한다. 

(발리에 살고 있는 내 친구가 나와 밥을 먹다가 내 만보기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그 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 좁은 방 안에서 30분 정도 왔다 갔다 수십 번 반복했다고 한다. 

그랬는데도 일천 보 올리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특히 우붓에서는 지난번에 갔을 때도 이번에도 같은 길을 도대체 몇 번 걸었는지 셀 수도 없다. 

아침에 걸었던 길을 또 걷고 요가 갔다 오는 길에 또 걷고

 스쿠터 타고 가다가 괜찮았던 곳이 있으면 튼튼한 두 다리로 또 찾아갔으니 매일이 2만 보였다.

 왜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았느냐고? 사실 걷다 보면 우붓 한 지역은 그리 크지 않다. 

나중엔 길도 뻔히 머릿속에 다 그려져 지겨운 마음에 오늘은 이 쪽으로 숙소까지 갔으니 오늘은 30분이 더 걸리더라도 굳이 저 쪽으로 걸어가 보기도 하고 그랬다. 


지난 여행, 이번 여행 합쳐서 우붓 메인 거리는 아마 백번은 더 걸은 것 같다. 

하루에 다섯여섯 번을 지나가는 곳이니까 그런데 신기한 건 지겨울 세 없이 걷다 보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한다. 생각 없이 한참을 걷다 보면 분명히 양 옆에서 어제는 보지 못했던 가게인데 오늘 발견하기도 하고

 발리에서 나의 취미가 되었던 재미있는 문구가 쓰여있는 간판들을 찾기도 한다. 

이쯤에 내가 좋아하는 캄보자 나무가 없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이 나무가 여기에 있나 싶기도 하고

어디 즈음에선 정말 맛있는 커피 가게를 발견하기도 한다. 

매일이 다르고 매 순간이 새롭다. 

시간을 두고 걸을 때만 할 수 있는 소소하고 재미있는 놀이다. 

목적지를 정하고 앞만 보고 걸어간다면 매일 똑같이 걷는 그 길이 따분하고 멀기만 할 텐데

옆도 보고 뒤도 보고, 맛있어 보이는 것이 있으면 사 먹어 보기도 하고

 더우면 잠깐 앉았다 가기도 하면서 구경을 하다 보니 

새로운 곳도 발견하고 재미있는 사람들도 만나고 황당한 광경들도 보는 재미도 누릴 수 있었다. 

결국엔 현지에 살고 있는 친구 아이린에게 

싸고 맛있는 아주 골목 모퉁이에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 식당을 소개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잘은 몰라도 걷고 걷다가 복잡한 생각이 조금씩 정리되고 결국 생각이 없어질 때 즈음이면

 본연의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미세하게라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을 정해 놓고 앞만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좀 여유를 가지고 앞도 옆도 보면서 

하염없이 걸어보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있는 서점도 만나고 내 코를 매료시키는 빵집도 만나고

 예쁜 액세서리를 파는 샵들도 발견하면서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지

 내가 조금 지쳐있을 땐 어떤 것들이 나를 치유하고 기쁨을 주는지

 하나둘씩 나 스스로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게 되는 것 같다. 

늘 그래 왔듯 발리에서도 매일 이만보씩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걸으면서 발견했던 

다양한 식당들 재미있는 가게들 예쁜 꽃들 싱그러운 나무들만큼이나

나 스스로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꽤나 흥미로운 매력적인 아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했다.   



 '가까이서 보면 더 흥미롭다. 우리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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